1995년 5월 14일에 시행한 서울시 (지방직) 9급 소방직 (소방·운전·구조 대원·구급 대원)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 1 】  조선 시대 신분 제도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A.  16세기 이후에 양반은 독서인층을 의미하였다.
B.  농민도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G.  신분이 세습되어 노비의 신분 상승은 불가능했다.
M.  사농 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질서가 확립되었다.

G:조선 시대의 신분은 아주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양반이 반역죄를 저질러 노비가 되거나,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중인과 상민이나 노비가 과거나 군공 등을 통하여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평민들은 납속이나 족보 위조, 학생 사칭 등의 방법으로 양반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간의 이동이 그리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문 2 】  위정 척사 운동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A.  「조선 책략」의 보급으로 이 운동은 약화되었다.
B.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반대하였다.
G.  영남 만인소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M.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

A: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 정책의 추진과 「조선 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만인소로 대표되는 격렬한 개화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1890년대 이후에는 위정 척사 운동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문 3 】 조선 시대에 사림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는?
A. 세조의 찬탈에 협조
B.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
G. 서원과 향약
M. 중앙 집권 체제

G:지방 사림들은 향약이나 서원, 향청(유향소) 등을 통해 지방 자치를 실현함으로써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지위와 세력 기반을 강화시켜 갔다.

【문 4 】 조선 시대는 이상적인 정치를 왕도 정치로 보았다. 왕도 정치의 구현과 거리가 먼것은?
A. 경연 제도
B. 진관 제도
G. 구언 제도
M. 서연 제도

B.진관 제도:세조 때 행정 단위인 군․현을 군사 조직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행정과 군사를 일원화시키고자 한 군사 체제이다. 즉, 지역 단위의 독립적 방위 체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국의 군현이 방위 체제로 편제될 수 있었다.
A․G․M:유교적 통치 이념에 입각하여 군주의 독재와 관료의 횡포를 견제하고 신민의 여론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되었으며, 어진 정사를 실현하기 위한 배려로 경연과 서연 제도를 마련하여 국왕과 세자의 학덕을 배양하는 한편, 여론을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한 상소 제도, 때에 따라 백관과 민중의 의견을 묻는 구언 제도 등이 있어서 학문과 언론이 정치를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문 5 】  발해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A.  고구려인과 말갈족에 의해 세워진 이원 국가이다.
B.  일본과의 교류는 신라와의 친선 관계를 강화시켰다.
G.  연호를 사용하여 왕권의 강화와 대외적 자주성을 과시하였다.
M.  당의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B:발해는 당, 신라의 협공으로 인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고, 발해와 신라는 발해 문화의 취약성과 신라 귀족의 보수성으로 인해 당나라에 이용당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A:발해의 주민은 지배 계층을 형성한 고구려인과 피지배층의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G:발해 시대에 인안, 대흥, 건흥 등 독자적 연호가 사용된 것은 중국과의 대등한 지위를 강조한 것이며 왕권의 강대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M:발해의 중앙 관제는 당의 3성 6부제를 취하면서도 3성의 독특한 운영 방식, 즉 정당성 아래에 선조성과 중대성을 두어 6부를 양분하여 통치하게 하는 방식이나 유교적 성격의 6부의 명칭에 발해의 독자적 성격이 나타나 있다.

【문 6 】 행정 구획인 사출도가 있었던 나라는?
A. 고조선
B. 부여
G. 고구려
M. 백제

4출도(四出道):부여의 행정 구역을 의미하는데, 중앙에는 왕이 있고, 지방 4곳(4출도)에는 4가(加)가 있어 그곳의 주민들을 다스렸다. 부여는 부족 연맹 사회였으며, 왕은 부족장들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는 매우 미약한 권력의 소유자였을 뿐이고, 실제 사회의 중심적 존재는 가(加)라는 부족장들이었다. 이들 가(加)들은 가축의 이름을 본떠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렸고, 이들이 4출도를 각각 다스려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이들을 통치하여 대가(大加)라고 하는데, 이들은 왕과 마찬가지로 대사(大使), 대사자(大使者), 사자(使者) 등 직속의 가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문 7 】 공납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미․포․전으로 납입하게 하는 제도는?
A. 대동법
B. 균역법
G. 영정법
M. 과전법

A.대동법:민호(民戶)에 토산물을 부과, 징수하던 공납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미(米), 포(布), 전(錢)으로 납입하게 하는 제도로, 정부는 수납한 미, 포, 전으로 공인을 통하여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여 쓰게 되었다.

【문 8 】 동학 농민 운동의 배경으로 가장 거리가 먼 것은?
A. 전통 질서의 수호
B. 농촌 경제의 파탄
G. 탐관 오리의 횡포
M. 농민 의식의 성장

B․G․M: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착취로 인하여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팽배해 갔다. 한편 대내외적인 정세의 변화에 따라 농촌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정치․사회 의식이 급성장하여 사회 변혁의 욕구가 고조되었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포접제(包接制)의 조직은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산발적․분산적이던 민란 형태의 농민 운동은 농민 전쟁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문 9 】 조선 시대 서민들의 문학과 예술 활동 분야와 거리가 먼 것은?
A. 판소리, 타령
B. 농악무, 승무
G. 산대놀이, 인형극
M. 나례춤, 처용무

M:조선 시대에 궁중에서는 나례춤, 처용무 등을, 서민들은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다. 또한 산대놀이라는 가면극과 꼭두각시 놀음인 인형극도 민간 사회에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문10】 다음은 열강의 침략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다. 시대순으로 맞는 것은?
㉠ 거문도 사건  ㉡ 삼국 간섭  ㉢ 을미사변  ㉣ 아관 파천
A. ㉠ ⇨ ㉢ ⇨ ㉡ ⇨ ㉣
B. ㉠ ⇨ ㉡ ⇨ ㉢ ⇨ ㉣
G. ㉡ ⇨ ㉢ ⇨ ㉠ ⇨ ㉣
M. ㉡ ⇨ ㉠ ⇨ ㉢ ⇨ ㉣

B:㉠거문도 사건(1885. 4.)⇨㉡삼국 간섭(1895)⇨㉢을미사변(1895. 10.)⇨㉣아관 파천(1896~1897)

【문11】 지방 세력을 통제하여 중앙 집권화를 꾀한 정책과 거리가 먼 것은?
A. 경재소
B. 상수리 제도
G. 면․리제
M. 사심관 제도

G.면․리제:조선 시대에는 군․현 아래에 면․리․통을 두고 향촌 주민 중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여 수령의 정령을 집행하도록 하여 국가의 통치권이 향촌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방 세력의 통제를 통해 중앙 집권화를 꾀한 정책은 아니다.
A.경재소: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 기능을 맡게 하여 정부와 향촌을 직접 연결시키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B.상수리 제도:통일 신라 시대에 지방 호족을 중앙에 머물게 한 제도인데 지방 세력 견제가 목적이었다. 이 제도는 고려 시대의 기인 제도, 조선 시대의 경저리 제도와 유사하다.
M.사심관 제도:고려 시대에는 중앙의 공신이나 고관들을 자기 출신지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의 향리직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지방의 치안 통제를 책임지게 하여 중앙 집권화를 도모하고 지방 세력의 동태를 파악․견제하게 하였다.

【문12】 고려 시대 귀족 지배 체제의 동요를 나타낸 것과 거리가 먼 것은?
A. 이자겸의 난
B.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G. 무신 정변
M. 삼별초의 항쟁

M.삼별초의 항쟁:고려 무신의 배몽 사상과 국민의 자주성의 일면을 드러낸 삼별초 항쟁은 고려 시대 귀족 지배 체제의 동요와는 거리가 멀다.
A․B: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귀족 사회의 폐단과 모순을 드러낸 것으로서, 이들은 모두 진압되었으나 그 근본적인 문제는 시정되지 않아 고려 귀족 사회는 그 근저에서부터 동요하게 되었다.
G.무신 정변:무신란 발생의 원인은 숭문 경무의 사회적 풍조,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 무신이 문반 관직을 독점하고 중방에 의한 정치가 시작되면서 사회 질서가 동요되었고 고려 귀족 사회는 점차 붕괴되어 갔다.

【문13】 다음 사회 시설 설치의 공통된 목적은 무엇인가?
㉠ 동․서 대비원  ㉡ 구급도감  ㉢ 제위보  ㉣ 의창
A. 물가 조절
B. 고리대 방지
G. 빈민 구제
M. 환자 치료

G.빈민 구제:고려 시대에 빈민 구제를 위한 사회 시설로 의창(⇦흑창), 동․서 대비원, 혜민국 등이 있었고 물가 조절 기관으로 상평창이 있었다. 이밖에 시대에 따라 재해에 대비하여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 등의 임시 관서를 설치하여 빈민 구제에 힘썼으며, 기금을 만들어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도 설치하였다.

【문14】  고려 시대의 정치 제도에 대해 맞는 것은?
A.  삼사에서는 왕명의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하였다.
B.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 등 국가의 중요 정책을 협의하였다.
G.  중추원은 풍기 단속과 감찰을 맡았다.
M.  서경하고 간쟁하는 제도는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B:도병마사는 성종 때 양계의 병마사를 중앙에서 통솔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변경 국방 문제를 의논하는 임시 회의 기구였으나, 충렬왕 5년에 도평의사사로 바뀌면서 그 기능이 확대되고 재추(宰樞)의 수도 확대되었으며, 삼사도 포함되었고, 국가 최고 기관이 되어 군사 문제뿐 아니라 국정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되었다. 중서 문하성의 고관인 재신(宰臣) 5명과 중추원의 고관인 추신(樞臣) 7명으로 구성되는 합좌 회의 기관으로, 고려 말에는 도당(都堂)이라 불리었다.
A:고려의 삼사는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며, 조선의 삼사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으로 언론과 감찰․간쟁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G:중추원은 2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왕명의 출납과 군사 기밀 및 왕실 호위를 담당하였다. 풍기 단속과 감찰을 맡았던 기관은 어사대로 중서 문하성의 3품 이하인 낭사와 함께 서경의 권한을 가졌다.
M:서경․간쟁 제도는 왕권을 견제․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문15】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통해 주장한 내용과 거리가 먼 것은?
A. 유교 정치 이념의 채택
B. 왕의 전제권 확대
G. 지방 통치 제도의 정비
M. 대간 제도 실시

A․G․M:고려 성종은 광종의 왕권 강화와 최승로의 시무책에 의해 유교적 성격의 중앙․지방 국가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문벌 귀족 사회가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최승로는 유교 정치 사상에 입각하여 정치 질서,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으로 시무 28조를 왕에게 올렸는데, 그 대부분이 채택,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왕권의 전제화가 규제되고, 행정 기능이 강화된 것은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時務28條):최승로(927~989)는 신라에서 귀부한 6두품 출신의 문하 시중으로, 그가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 28조의 주요 내용은 ①국방 문제로서 변방을 굳게 지킬 것, ②호족 처우 문제로서 노비 안검법의 폐지, ③외관의 파견과 제도의 개혁 및 중국 문화의 수입에 관한 것, ④불교 행사의 제한 등이다. 특히, 불교 행사에 관계된 20조에 의하면 ‘불교는 수신(修身)의 본이요, 유교는 이국(理國)의 본인데 현실을 무시하고 어찌 불교 행사를 일삼겠는가. 불교 행사는 제한하고 팔관회는 폐지해야 한다’고 하여 성종의 유교 정치 이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의 시대 정신과 후세 정치 이념 수립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내용은 당시 사회 문제와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설득력을 가졌고, 고려 시대 정치․사회 제도 정비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문16】  신라 중대의 정치․경제․사회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A.  상대등의 세력이 약화되고 집사부의 기능을 크게 강화하였다.
B.  유교의 정치 이념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G.  식읍과 녹읍 대신에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M.  6두품 지식인들은 전제 왕권에 대항하였다.

M:신라 중대에는 6두품 귀족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은 진골 귀족에 대항하여 왕권과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6두품 귀족은 신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또는 종교적 식견에 의하여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고, 실제로 집사부 시랑 등의 관직을 맡으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신라 하대에 6두품 귀족은 중앙 권력에서 점차 배제되어 호족과 연결되었으며, 교종의 권위에 도전한 선종의 등장에 주된 역할을 하여 고려 왕조 건설에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문17】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 운동과 거리가 먼 것은?
A. 방곡령 시행
B. 회사령 반포
G. 농광 회사의 설립
M. 국채 보상 운동

B.회사령 반포:일제의 식민지 산업 침탈 정책의 일환이다. 우리의 산업 경제권은 금융 조합, 농공 은행 등을 통해 통제되었고, 허가제인 회사령(1910)에 의해 민족 기업의 성장이 억압되었다. 즉, 한국에서의 기업의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하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건을 위배한 기업체는 총독이 해체․폐쇄하는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A․G․M: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여 여러 측면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방곡령의 시행,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 농광 회사의 설립, 보안회 등의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문18】  다음 각 시대의 설명 중 틀린 것은?
A.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덧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B.  신석기 시대에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평등한 공동체 사회를 이루었다.
G.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집단 취락 생활을 하였다.
M.  철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A:신석기 시대에 처음 토기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는데 덧무늬 토기, 이른 민무늬 토기 등은 초기 신석기인들이 빗살무늬 토기에 앞서 제작․사용하던 토기이다.

【문19】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가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은?
A. 유수원
B. 이익
G. 홍대용
M. 박지원

B.이익:중농적 실학자(경세 치용 학파)이다. 이익은 한전론의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과거를 폐지하고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시종 합일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라가 빈곤하고 농촌이 피폐한 원인으로서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사치와 미신 숭배, 승려, 게으름 등을 나라의 좀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고리대와 화폐의 폐단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고, 환곡 제도 대신에 사창 제도를 실시하고자 주장하였다.

A.유수원:중상적 실학자(이용 후생 학파)이다. 유수원은 농업의 전문화와 상업화, 기술의 혁신을 통해 생산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조정하에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 농, 공, 상의 직업적 평등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상공업을 진흥시키는 구체적 방안으로서 상인간의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와 상인이 생산자를 고용하여 생산과 판매를 주관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대상인이 지역 사회의 개발에 참여하여 학교 건립, 교량 건설, 방위 시설 구축 등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G.홍대용:중상적 실학자(이용 후생 학파)이다. 그는 「임하경륜」에서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하여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의 혁신과 신분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는 지구의 1일 1주 회전설(지전설)을 내세워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였다.

M.박지원:중상적 실학자(이용 후생 학파)이다. 그는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에서 농사 기술을 밝히고, 영농 방법의 개선과 상업적 농업의 장려, 농기구 개량, 관개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즉,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1.중농적 실학자:유형원, 이익, 정약용, 박세당, 홍만선, 서유구 등
  2.중상적 실학자: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문20】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근대 지향적 움직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A.  영농 기술의 개발과 경영의 합리화
B.  봉건적 신분 구조의 고정화
G.  실학, 천주교, 동학의 발전
M.  독점적 도매 상인의 출현

조선 후기 사회의 근대 지향적 움직임

1.경제적:영농 기술의 개발과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농업 생산력이 급증하여 사회 변동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상공업에 있어서도 영리성이 제고되어 도고(都賈)라고 불리는 독점적 도매 상인도 나타나고 있었다.

2.사회적:부의 축적에 따른 신분 상승, 그리고 정쟁의 결과와 농민의 분화로 인한 신분의 변동이 심해졌고, 봉건적 신분 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서얼, 노비도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습적이고 폐쇄적인 신분제는 점차 그 의미를 잃어 갔다.

3.사상적:새로운 사회 변동에 직면하여 지배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실학이 연구되어 사회 개혁과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천주교가 전래되어 평등 사회와 개인의 자유를 내세우고 전통 사회의 질서와 가치 규범에 도전하였으며, 민족 종교로서 동학이 창시되어 농민층을 중심으로 현실 개혁의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4.정치적:정치면에 있어서는 여러 면에서 나타난 근대 지향적인 움직임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단을 크게 노출한 붕당 정치는 세도 정치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행정 기강과 수취 체제의 문란으로 농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그 동안 의식이 향상되어 온 농민들은 민란의 형태로 불만을 폭발시킴으로써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는 더 이상의 존속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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