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1일에 시행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보기>의 불상이 만들어진 시대의 문화재가 아닌 것은?
ㆍ광주 춘궁리 철불
ㆍ안동 이천동 석불
ㆍ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①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② 예산 수덕사 대웅전
③ 여주 고달사지승탑
④ 경주 배리석불입상
⑤ 수원 관음 보살도


보기의 광주 춘불리 철불, 안동 이천동 석불,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모두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특히 고려 초기에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 중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은 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불상이다.
→ 다각다층탑이 발달한 고려석탑은 개성 불일사 5층석탑,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 유명하다.
건축에서는 주심포식 건물이 발달하였으며 예산 수덕사 대웅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등이 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과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 대표적이 승탑이며, 고려 후기에는 왕실과 권문세족의 구불적 요구에 따라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불도, 지장보살도,관음보살도가 많다.
→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 백제의 서산마애삼존불, 신라의 경주 배리석불입상(약 7세기로 추정)이 대표적인 불상이다.

2. 다음 중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아닌 것은?
① 친일세력 및 민족 반역자 처벌 조례를 만들것
② 2주일 이내에 미ㆍ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할 것
③ 미ㆍ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
④ 민주주의 원칙아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⑤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최고 5년간 신탁통치를 할 것


① 친일 세력 처벌 조례를 만드는 내용은 좌우합작 7원칙에 있다.

※ 좌우합작 7원칙(1846.10)
(1)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해 좌우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 발표
(3) 몰수․유조건몰수․체감매상 등으로 농민에게 토지 무상분여 및 중요산업 국유화
(4) 친일파․민족반역자 처리문제는 장차 구성될 입법기구에서 처리할 것
(5)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제지하도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의 구성방법 및 운영 등은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 적극 실행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3. 다음 중 조선 숙종 때의 사건이 아닌 것은?
① 경신대출척사건
② 갑술환국
③ 신임옥사
④ 정유독대
⑤ 기사환국


신임옥사는 신임사화라고도 하며, 조선 경종 원년(1721)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이다. 노론 사대신(四大臣)의 주장으로, 왕의 동생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고 정무를 대신하게 하자, 소론이 불가함을 상소하고, 이들 사대신이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하여 사대신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① 경신대출척사건(1680. 숙종 8년) : 숙종이 즉위하여 남인을 등용하자 남인이 병권을 강화한다. 이로 인해 수세에 몰린 서인이 남이의 영수 허적이 신앙옹립을 꿈꾼다는 역모사건을 고발함에 E라 남인을 숙청, 다시 서인이 재집권하는 사건.
⑤ 기사환국(1689. 숙종 15년) : 장희빈 소생의 세자 균을 둘러싸고 이에 반대한 서인의 핵심 측근 세력들이 축출되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었던 사건.
② 갑술환국(1694. 숙종 20년) : 말년에 기사환국 때 폐위된 민비(인현왕후)를 복위하고 민비폐위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던 장희빈이 사사(賜死)받고 같이 공모하였던 남인들이 대거 몰락한 사건.(이로 인해 남인이 영구적으로 몰락하였다.)
④ 정유독대 : 왕위계승에 관해 숙종과 노론의 이이명이 한 독대.

4. 다음 <보기>의 내용을 순서대로 바르게 배열한 것은?
㉠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행하였다.
㉡ 외교와 재정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었다.
㉢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 조선 고등 관리의 임명과 해임을 일본 통감의 동의를 얻게 하였다.
① ㉠-㉡-㉢-㉣
② ㉡-㉠-㉢-㉣
③ ㉡-㉢-㉠-㉣
④ ㉢-㉠-㉡-㉣
⑤ ㉢-㉡-㉠-㉣


㉠ 살수대첩(1905.11),
㉡ 제1차 한일협약(1904.8)
㉢ 한일의정서(1904.2),
㉣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1907)

5. 다음 <보기>의 내용과 관계있는 서적으로 바르게 묶은 것은?
역관으로 10여 차례나 중국을 왕래했던 오경석이 들어온 책으로 세계정세와 문물의 변화를 국내에 전했다.
① 우서, 열하일기
② 북학의, 열하일기
③ 열하일기, 조선책략
④ 영환지략, 해국도지
⑤ 조선책략, 해국도지


오경석이 청으로부터 가져온 역사․지리지는 위원의 해국도지, 서계여의 영환지략, 윌리암마틴의 만국공법이다. 유수원의 우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는 북학사상과 관련된 서적이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1880년대 주일청국공사관인 황준헌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위한 조선의 책략을 제시한 것이다.

6. 다음 <보기>의 내용을 시대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 살수대첩
㉡ 백제멸망
㉢ 나ㆍ당전쟁
㉣ 고구려멸망
㉤ 안시성싸움
① ㉠-㉡-㉢-㉣-㉤
② ㉠-㉤-㉡-㉣-㉢
③ ㉡-㉢-㉣-㉤-㉠
④ ㉢-㉣-㉤-㉠-㉡
⑤ ㉣-㉤-㉠-㉢-㉡


㉠ 살수대첩(612,고구려 영양왕) → ㉤ 안시성 싸움(645, 고구려 보장왕) → ㉡ 백제멸망(660,백제 의자왕) → ㉣ 고구려멸망(668, 고구려 보장왕) → ㉢ 나·당전쟁(676,신라 문무왕때 매소성전투와 기벌포전투)

7. 다음 <보기>의 지역과 관련이 있는 것은?
우리민족이 이 지역에 19세기 후반 이주. 일제는 독립군기지를 없앤다는 구실로 마을을 불태우고 학살 만행을 자행했다.
① 성명회 조직
② 서전서숙 설립
③ 신한촌 건립
④ 대한국민의회 조직
⑤ 대한인국민회 조직


북간도(만주)지역을 말한다.
간도참변(경신참변, 1920) : 일본군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대패한 뒤 간도지방의 한인촌을 습격하여 3~4개월 동안에 걸쳐 한인을 무차별적으로 보복 살해하였다.
서전서숙(瑞甸書熟)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정순만(鄭淳萬)․김우용(金禹鏞)․박정서(朴禎瑞)․황달영(黃達永)․홍창섭 등이 간도(間島)에 있는 한국인 자제에게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
→ ① 성명회, ③ 신한촌, ④ 대한국민회의, ⑤ 대한인국민회는 연해주와 관련된다.

1920년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경신참변 또는 경신간도 학살사건이라고도 한다. 3 ·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여러번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일제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일제는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조작할 음모를 하였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馬賊)을 사주하여 훈춘현[琿春縣]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이 사전에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 속 또는 중·소 국경지대로 이동해 버림으로써 일본군의 독립군 섬멸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특히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이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작전을 전개하였다. 3~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국인 마을들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옌지현[延吉縣] 이란거우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이 몰살을 당하고 마을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 간 간도일대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3,469명에 이른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숫자와 3~4개월에 걸쳐 학살된 수를 합하면 피해자는 적어도 수만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8. 다음 중 1965년 6·3사태의 주된 이유는?
① 일본 투기성 자본의 국내 유입이 증가하기 때문에
② 일본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증가하기 때문에
③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죄나 배상대신 차관을 얻는데 급급한 굴욕적인 한·일 회담 때문에
④ 일본 오하라 외상의 한국에 대한 비하 발언 때문에
⑤ 일본과 미국에 대한 무역적자 때문에


6․3사태 :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는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하여 학생시위는 다시 일어났고,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 한일 국교 정상화와 6-3사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필요한 자금조달문제를 외자도입의 확대로 해결하기 위해 한일회담을 적극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의 입장에서도 축적된 자본을 수출하고 자국의 산업구조를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한일 국교정상화가 불가피했다. 미국도 달러 위기로 인해 자국의 세계경제 지배력이 동요하는 상황에서 일본을 이용해 동아시아 일대를 자본주의체제로 묶어두기 위해 이를 지원했다. 1961년 10월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은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협정내용도 지나치게 굴욕적이었다. 일본은 회담 전과정을 통해서 한 적이 없었으며, 협정내용에서도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일협정은 한일 양국 사이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기본조약,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한일 재산 및 청구권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크게 네 가지 협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각 협정의 내용 역시 일본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주권국가로서의 위신을 상실한 면이 많았다. 기본조약에서는 일본의 과거 조선지배가 합리화되었고 어업문제에서는 한국인의 어민의 입장이 무시되었다. 또 청구권 문제는 명칭 자체부터 한국민족에 대한 배상의 성격이 아니라 독립축하금이라는 형식으로 8억달러(유상5억, 무상3억)를 받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9. 다음 중 발해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당의 3성6부 제도를 수용하였으나 독자적인 방법으로 개편하여 사용하였다.
② 당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③ 전략적 요충지에 5경을 두었고,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었다.
④ 최대 영토는 북으로는 흑룡강에서 송화강, 남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형성하였다.
⑤ 국립대학인 주자감을 설치하였고 불교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발해는 인안(무왕), 대흥(문왕), 건흥(선왕)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10. 다음 중 고려시대 유학의 발달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최충이 세운 9재학당은 사학의 효시가 되었다.
② 광종은 최승로를 등용해 숭유정책을 실시하였다.
③ 숙종은 국학에 일종의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④ 예종은 국자감에 서적포를 두어 도서를 출판하게 되었다.
⑤ 성종은 개경에 경사 6학의 제도를 만들었다.


② 최승로는 성종 때의 재상이었다.
③ 예종 때 국학에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설치하고 7재를 두었다.
④ 숙종 때 두었던 출판부로 국립대학 국자감 안에 서적포를 설치하고, 비서성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책판(冊板)을 이곳에 옮겨 널리 인쇄․보급하게 되었다.
⑤ 문종(文宗) 때가 되면, 국자감 안에는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問學),율학(律學),산학(算學),서학(書學)의 경사6학(京師六學)이 설치되었다.

11. 다음 부여에 대한 서술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기원 후 3세기경의 부여는 사방 2천리의 면적에 8만호의 인구를 갖고 있었다.
② 전쟁이 일어나면 호민과 하호가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③ 위치는 송화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농업과 목축이 주된 산업이었다.
④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절도범에는 12배의 배상을 하도록 하였다.
⑤ 해마다 12월이 되면 영고라는 제천의식을 벌이고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만약 외적이 침입하면, 이때 하호는 병사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고 물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2. 다음 내용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은?
ㄱ. 고구려의 평양천도단행
ㄴ. 고구려의 율령반포
ㄷ. 6좌평 제도와 16관등제
ㄹ. 백제의 동진에서 불교수용
① ㄷ - ㄹ - ㄴ - ㄱ
② ㄷ - ㄴ - ㄹ - ㄱ
③ ㄹ - ㄷ - ㄴ - ㄱ
④ ㄹ - ㄷ - ㄱ - ㄴ
⑤ ㄴ - ㄱ - ㄹ - ㄷ


㉢ : 247년,
㉡ : 373년(소수림왕),
㉣ : 384년(침류왕),
㉠ : 427년(장수왕)

13. 사림에 대한 설명이 아닌 것은?
① 향촌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힌 사람들이다.
②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③ 주로 언관직에 종사하면서 훈구세력을 비판하였다.
④ 연산군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위해 사림을 등용하였다.
⑤ 김종직과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다.


사림은 주로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통해 실시된 현량과에서의 추천을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다.

14. 조선시대 양반과 평민의 경제생활이 아닌 것은?
① 양반은 노비의 수를 늘리기 위해 자신의 노비를 양인남녀와 혼인시켰다
② 지주인 양반들도 향약을 시행하여 농촌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③ 농민은 자연재해, 고리대, 세금부담 등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④ 양반의 경제기반은 과전, 녹봉, 자신 소유 토지와 노비 등이었다.
⑤ 양반은 자기소유의 토지를 모두 농민들에게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양반들은 자기토지의 소유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키거나, 농민들에게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모두 병작반수의 형태로만 경작은 한 것은 아니다.

15. 다음 글이 나타내는 의미를 통해 해석한 시대적 상황으로 맞는 것은?
이 섬의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 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
①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② 지방에서는 과도한 세금수탈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③ 진골들은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사병을 키웠다.
④ 오랜 평화기간으로 귀족들은 사치, 향략 생활에 빠져들었다.
⑤ 6두품이 등용되어 왕의 조언을 맡았다.


만파식적 :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東海)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거동(擧動)하였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국보로 삼았는데, 효소왕(孝昭王) 때 분실하였다가 우연한 기적으로 다시 찾게 된 후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고쳤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왕실의 안녕과 평화를 상징한다. 김흠돌 모역사건을 통해 대대적인 숙청이 행해 졌었던 신문왕 초기를 고려해 볼 때 왕권의 전제화를 위해 6두품을 등용해서 왕에게 조언하게 했다는 해석이 옳다.

16. 조선후기 농업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소작료도 수확량의 반을 내는 방식에서 일정액수만 내게되는 도조법이 출현하였다.
② 모내기법은 잡초를 따로 제거할 수고를 덜어주었다.
③ 논에서의 보리농사는 소작료의 수취대상이었므로 지주가 보리농사를 강요하였다.
④ 광작농업으로 농민의 소득증대결과 농민의 일부는 부농으로 성장하였다.
⑤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은 농촌을 떠나야했다.


보리는 수취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다.

※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재배가 확대되었고, 더구나 논에서의 보리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농사를 선호했다.
농민들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들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했다. 지주들은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해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광작농업으로 농가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17. 고려 말 원 간섭기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해동청(매)을 징발하기 위하여 순마소를 설치하였다.
② 세자를 북경에다 잡아놓고 돌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③ 충선왕은 개경에 만권당을 설치하였다.
④ 응방은 내정간섭기구였다.
⑤ 권문세족은 도병마사를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하였다.


① 순마소 : 고려의 무신정권이 대몽항쟁이 끝나 개성으로 환도한 다음 치안을 담당할 기구로서 설치함.
③ 만권당 :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세운 독서당(讀書堂).
④ 응방의 제도는 몽골이 고려를 복속하게 한 뒤에 몽골에서 들어와 그들이 조공품(朝貢品)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사냥매)을 잡고 길러서 몽골에 보내기 위해 설치하였다.
⑤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를 장악하여 권력을 독점한다.

18. 서울시 공무원이 되면 급료를 받는데 A군은 옛 자료를 찾아보았다. 옛날 관리들의 토지분급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식읍은 일반 관리에게 지급하였다
② 과전법은 관품과 인품을 따져서 지급하였다.
③ 관수관급제는 국가의 토지지배력을 강화하였다.
④ 전시과는 전지만을 지급하였다.
⑤ 직전법은 전·현직관료 모두에게 지급하였다.


① 식읍은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왕족 ·공신(功臣) ·봉작자 등에게 준 일정한 지역.
신라는 내항자 ·전공자(戰功者) ·귀족에게 식읍을 주었고, 이들은 구지배지(舊支配地)를 식읍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으며, 이 경제력을 배경으로 통일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말기에는 반국가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의 식읍은 수조권(收租權)뿐만 아니라 지배권까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식읍을 받은 것은 왕자를 비롯한 왕족이었으며, 한 왕대에 10여 명내지 수십 명에 이르는 왕족이 식읍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식읍제도는 조선에는 계승되지 않았다.
② 시정전시과에 해당한다.
④ 전시과는 수조권만은 지급한 것에 불과했다.
⑤ 직전법으 세조 12년에 토지분급지의 절대부족을 감안하여 토지분급수혜자를 줄여 현직
관료에게만 지급하였다.

19. 다음 중 붕당정치전개과정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대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② 북인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하였다.
③ 현종 때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④ 숙종 때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⑤ 영조는 세력균형을 위해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계열을 등용하였다.


⑤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는 스스로 세력이 커진 노론과 영조의 탕평책에 불만을 품고 이인좌의 난, 나주 괘서사건 등을 벌인다. 이후 소론은 그 세력이 상당히 약해지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엔 절대적으로 노론 중심으로 되어 버린다.

20. 아래 지문사건의 원인이 된 사건은?
두 나라 상인들이 쌍방에서 이미 개항한 항구에 가서 무역을 할 때 만일 법을 절대로 준수한다면 땅을 세내고 방을 세내며 집을 지을 수 있게 승인하며, 모든 토산물과 규정에 금지되지 않은 물건은 다 팔 수 있도록 승인한다.
① 갑신정변
② 을미사변
③ 임오군란
④ 갑오개혁
⑤ 동학농민운동


‘상민수륙통상장정’의 내용이다.
1882년(고종 19) 8월 조선과 청(淸)나라가 맺은 두 나라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으로 임오군란 이후 우리는 일본과 청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하였고, 청나라와는 ‘상민수륙통상장정’이, 일본과는 ‘제물로 조약’이 체결되게 된다.




전체정답

12345678910
11121314151617181920

댓글 쓰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