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8일에 시행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에서 고려 후기에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경우를 모두 고르면?
 (가) 전쟁에 나아가 공을 세운다.
 (나) 족보를 매수하여 위조한다.
 (다) 몽골 귀족과 혼인한다.
 (라) 공명첩을 발급 받는다.
① (가), (나)
② (가), (다)
③ (나), (다)
④ (나), (라)
⑤ (다), (라)


정답 ②: 족보위조나 공명첩 발급은 조선후기의 경우이다.

해설 :
● 고려 시대 무신 집권기 이후로는 하층 신분에서 신분 상승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 역관, 향리, 평민, 부곡민, 노비, 환관 중에서 전공을 세우거나 몽고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몽고어에 능숙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조선 후기 부를 축적한 농민들이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또는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는 납속책과 공명첩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시키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 공명첩 [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 국가의 재정이 궁핍할 때 국고(國庫)를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중앙의 관원이 이것을 가지고 전국을 돌면서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어 명목상의 관직을 주었다. ≒공명고신·공명고신첩·공명장.

2. 고려 광종~성종대에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은?
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② 조계종을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려고 하였다.
③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④ 전시과를 실시하였다.
⑤ 12목을 설치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정답 ②: 조계종은 무신정권기이다.

해설 : 조계종은 무신정권기 보조국사 지눌이 불교계 정화운동인 결사운동을 일으키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 광종 :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 경종 :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다.
● 성종 :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3. 행사가 준비되어 진행된 과정, 업무의 분장, 동원된 인원, 물자 및 비품의 조달과 배정, 경비의 수입과 지출, 건물 및 비품의 설계 및 제작, 담당 관리와 동원된 인물, 행사 유공자에 대한 포상 등 관계된 사실 모두를 상세히 수록하는 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① 의궤
② 등록
③ 실록
④ 시정기
⑤ 사초


정답 ①

해설 :
● 의궤(儀軌)란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준비과정·절차·진행·논상 등의 내용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1860년대 이전의 의궤 중에서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던 많은 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하였다.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의궤가 2007년에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 등록(謄錄) : 각 관청의 업무일지
● 실록 : 한 국왕이 죽으면 다음 국왕 때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사관들이 국왕 앞에서 기록한 사초(사관이 매일 기록한 원고), 각 관청의 문서들을 모아 만든 시정기(조선시대 역사의 자료로서 사관이 기록한 자료) 등을 종합, 정리하여 실록을 편년체로 편찬하였다.

4. 다음 중 성왕때 일어난 일을 고르면?
① 사택지적비
② 신라와 관산성 전투
③ 고흥 「서기」 편찬
④ 익산 미륵사 설립
⑤ 칠지도


정답 ②: 사택지적비(의자왕), 고흥의 서기(근초고왕), 미륵사(무왕), 칠지도(근초고왕)

해설 :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 사택지적비(부여 박물관 소장) : 백제 의자왕 시기 상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절을 짓고 세운 비이다.
●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 미륵사는 중앙에 거대한 목탑과 동서에 석탑을 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7세기에 무왕이 추진한 백제의 중흥을 반영하고 있다.
●  4세기 후반에 백제(근초고왕)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든 우수한 제품이며, 거기에는 금으로 상감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백제의 제철 기술이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5.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난 순서대로 엮은 것은?
 ㄱ. 최익현은 개항반대론, 왜양일체론을 주장하였다. 
 ㄴ. 이항로, 기정진은 통상반대론,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다.
 ㄷ. 위정척사운동은 항일의병으로 계승되었다.
 ㄹ. 이만손은 영남만인소에서 개화에 반대하였다.
① ㄱ - ㄴ - ㄷ - ㄹ
② ㄴ -ㄱ - ㄹ - ㄷ
③ ㄱ - ㄹ - ㄴ - ㄷ
④ ㄹ - ㄷ - ㄴ -ㄱ
⑤ ㄹ - ㄷ - ㄴ - ㄱ


정답  ②: ㄱ은 1870년대 ㄴ은 1860년대  ㄷ은 1890년대 이후 ㄹ은 1880년대이다.

해설 : 위정척사란 성리학을 유일한 정(正)학으로 보고 양명학을 비롯한 불교·도교·서학 등 모든 다른 사상과 학문을 이단적인 사(邪)학이라 규정하여, 정통적인 정학인 성리학은 지키고 외래적인 사학은 물리친다는 뜻이다. 위정척사를 주장한 이항로·기정진·이만손·홍재학·김평묵·최익현·유인석 등의 유학자들을 위정척사파라 칭했다

6. 다음 중 각 나라별로 옳게 연결 된 것끼리 묶인 것은?
 (가)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있다.
 (나) 중요한 일은 제가회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다)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다.
 (라)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견지 작은 것은 읍차, 부례가 있었다.
 ㄱ. (가) 왕이 죽으면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
 ㄴ. (나) 여자가 어릴 때 남자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한다.
 ㄷ. (다)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ㄹ. (라)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도가 있었다.
① ㄱ, ㄴ
② ㄱ, ㄴ, ㄷ
③ ㄱ, ㄷ, ㄹ
④ ㄱ, ㄴ, ㄷ, ㄹ


정답 ③:  ㄴ은 옥저의 민며느리제에 대한 것이다. (가)부여, 순장 (나)고구려, (다) 동예, 책화 (라) 삼한이다.

해설 : (나)는 고구려, ㄴ은 옥저의 민며느리제에 대한 설명이다.
● (가), ㄱ : 부여에 대한 설명이다. ㄱ은 순장의 풍습이다.
● (나) : 고구려에 대한 설명이다.
● ㄴ : ㄴ은 옥저의 민며느리제에 대한 설명이다. 고구려는 데릴사위제이다.
● (다), ㄷ : (다)는 옥저, 동예의 군장이고, ㄷ은 동예의 책화에 대한 설명이다.
● (라), ㄹ : 삼한에 대한 설명이다.

7. 다음에 제시된 세력에 대해  틀리게 서술한 것은?
 (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으로, 조선 초기에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나) 15세기중반 이후 중소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① (가)는 중앙 집권에 기여하였다.
② (가)성리학이외의 학문에 포용적이었다.
③ (나)는 향촌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④ (가)와 (나)의 대립으로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정답 ④: 예송논쟁은 서인과 남인의 논쟁이다.

해설 : (가)는 훈구파, (나)는 사림파에 대한 설명이다. 훈구와 사림의 대결은 사화(士林들이 禍를 당해서 ‘士禍’라고 한다. )로 나타났으며, 예송논쟁은 사림 정치 시기의 서인과 남인의 논쟁이다.

8. 조선후기에 실시된 수취체제에 관해 옳은 것은?
① 대동법의 실시 후 물품의 구매가 증가하여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② 영정법은 1결당 2두를 징수하였다. 
③ 대동법은 1결당 14두를 받았다.
④ 균역법은 농민에게 1결당 군포 12필을 징수하였다. 



정답 ①: 영정법 4두, 대동법 12두, 균역법 군포 1필이다.

해설 : 영정법 토지 1결당 미곡 4두, 대동법은 토지 1결당 미곡 12두(처음에는 16두), 균역법은 양인장정 1인당 군포 1필이다.

9. 고려전기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부석사 무량수전은 다포식 건물이다.
② 승려의 사리를 보관하는 승탑으로 석종형 승탑이 만들어졌다.
③ 경기도 광주에서 상감청자가 발달하였다.
④ 관촉사 석조미륵보살과 같은 거대한 불상이 지어졌다.
⑤ 조맹부체인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정답 ④: ①은 주심포양식, ②는 고려후기 ③상감청자는 강진, 부안이 유명하고 경기도 광주는 조선의 자기로 유명하다. ⑤의 송설체는 고려후기이다.

해설 :
● 고려시대 주심포식 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가장 오래 된 건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 고려시대 다포식 건물 : 고려 후기에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여 조선 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 다포식 건물로 유명하다.
● 승탑 : 신라하대 이후에 ‘팔각원당형’이, 고려시대 후기 이후 석탑형 승탑, 석종형 승탑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 후기엔 간단한 석종형 승탑이 유행했다.
● 고려의 청자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이 생산되고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서 구워졌는데, 전라도 강진과 부안이 유명하였다. 특히, 강진에서는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어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  조선 시대 분청사기와 옹기그릇은 전국의 자기소와 도기소에서 만들어져 관수용이나 민수용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 분원에서 생산하는 자기의 품질이 우수하였다.
● 고려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과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어 시대적 특징을 이루었다. 그리고 논산의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나 안동의 이천동 석불처럼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잘 드러난 거대한 불상들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 서예는 고려 전기에는 구양순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탄연의 글씨가 특히 뛰어났다. 후기에는 송설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뛰어났다.

10. 다음 중 삼국시대 농업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지 않은 것은?
① 농민은 자기 소유의 땅을 경작하거나 귀족의 땅을 소작하였다.
② 거름을 주는 기술이 발달하여 휴경지가 줄어들었다.
③ 6C 무렵부터 우경이 시작되었다.




정답 ②: 거름 주는 기술은 고려시대부터이다. 

해설 :
● 삼국시대 : 농민들의 토지는 대체로 척박한 토지가 많았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 동안 묵혀 두어야 하였다.
● 고려시대 : 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수리 시설의 발달 외에도 호미와 보습 등의 농기구와 종자도 개량되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었다.

11. 다음 중 고려시대 정치체제에 대하여 옳게 설명한 것은?
① 중추원이 최고의 정치기관이다.
② 고려의 삼사는 왕명출납과 군사기밀을 담당하였다.
③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회의하여 결정하는 독자적 기구였다.
④ 중정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한다.
⑤ 000는 ~ 문하시중을 임명하였다.


정답 ③: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만의 독자적인 기구이다.

해설 :
●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을 맡았다.
● 고려의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정대는 발해의 감찰기구였다.
●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12. 다음의 괄호 안에 시기에 있었던 일은?
모스크바 3상 회의-1차 미소공동위원회-(   )-2차 미소공동위원회-대한민국건립 
① 제주도 3.4사건
② 신탁통치반대운동의 범국민적 통합단체 발족
③ 유엔한국임시위원단파견
④ 김구의 남북협상
⑤ 김규식, 여운형 좌우합작운동


정답 ⑤: 좌우합작운동은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차 미소공동위 결렬후에 이루어졌다.

해설 :
● 1945년 12월 : 모스크바 3상회의
● 1946년 :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운동 가열
제 1차 미·소 공동 위원회(46.3) ⇒조선 정판사 위폐사건(46. 5)⇒이승만의 정읍발언(46. 6. 3)⇒좌우 합작 위원회(46. 7. 25)⇒공산당 신전술(46. 7. 26)⇒9월 총파업(46. 9)⇒10월 대구 사건(46. 10. 1)
● 1947년
트루먼 독트린(47. 3)⇒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1947. 5) 결렬 ⇒미국 : 한국문제 국제연합 이관(47. 9)⇒유엔총회의 결의(47. 11. 14)⇒소련의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입북 거절
● 1948년
UN 소총회(2. 26) : 가능한 지역(남한)에서의 단독 선거 결의⇒ 제주 4·3 항쟁 시작(4. 3)⇒ 5·10 총선거

13.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조선의 양반만 법제적으로 과거에 응시가 가능하다.
②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 정치적으로는 관료이다.
③ 일반 농민을 백정이라 불렀다.
④ 상인은 양인보다 상위계층으로 생각했다.



정답 ②: 법제적으로 양인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고, 상인은 양인보다 천시되었고, 도살업자를 백정이라 한다.

해설 :
●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고려시대의 일반 농민을 백정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백정은 도살업, 유기제조업, 육류판매업을 담당하는 천민이었다.
● 조선시대 평민, 양인으로도 불리는 상민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 수공업자, 상인을 말한다. 조선은 농본억상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보다 아래에 위치하였다.

14. 삼국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삼국은 행정과 군사가 이원화되어 별도의 지휘관 파견을 파견하였다.
② 삼국시대는 신분에 의한 관직진출에 제한이 있었다.





정답 ①: 삼국은 행정과 군사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지방관이 곧 군사지휘관이었다.

해설 :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5. 밑줄 친 부분과 유사한 기능을 담당했던 고려시대의 사회 제도는?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시행되었던 추곡 수매제도는 농민에게서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일정량의 쌀을 사들이는 제도이다.
그동안 쌀값안정과 쌀 수급을 조절하는 데 기여해 왔지만… ○○일보
① 의창
② 상평창
③ 혜민국
④ 제위보
⑤ 흑창


정답 ②: 상평창은 개경, 서경, 12목에 설치하여 미곡가격의 안정을 도모한 기구이다.

해설  :
● 고려의 상평창 :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는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의창 : 평시에 곡물을 비치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진대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 동·서 대비원, 혜민국 : 가난한 백성이 의료 혜택을 받도록 개경에 동ㆍ서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 진료 및 빈민 구휼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혜민국을 두어 의약을 전담케 하였다.
● 제위보 :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하였다.
● 흑창(태조 왕건) :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하여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 주고 추수 후에 갚게 했던 빈민 구제 기구이다. 986년(성종 5)에 의창으로 바뀌었다.

16. 밑줄 친 나라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요즘에는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는 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나라와는 외규장각에 있던 도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① 제너셜 셔먼호를 격퇴하였다.
②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졌다.
③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④ 강화도에서 한성근과 양헌수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격퇴하였다.
⑤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정답 ④: 프랑스는 병인양요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갔다. 병인양요때 한성근과 양헌수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격퇴하였다.

해설 : 프랑스는 1866년 병인양요 시기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갔다. 1860년대 이전의 의궤 중에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던 많은 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한 것이다.

17. 1920년대의 민족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의열단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테러리스트집단이었다.
② 신간회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참여하였다.
③ 임시정부내의 노선갈등은 국민대표회의에서 갈등을 완전히 해소했다.
④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는 국민부로 통합되었다.
⑤ 실력양성론자들은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하였다.


정답 ③: 임성의 노선갈등은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론자, 개조론자, 현상유지파로 나뉘어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해설 : 1919년 3·1 운동 이후 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건, 이동휘의 모스크바 자금 유용 문제, 적극적인 무장투쟁노선의 주장 등 상해 임시정부내의 노선갈등(이승만-외교론, 박용만-무력투쟁, 안창호-실력양성운동, 이동휘-소련과 연대 투쟁)이 심해지자, 이승만의 불신임과 독립운동 전체 방향 전환 문제를 놓고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 현상유지파로 엇갈려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는 상해를 떠나버림으로써 임정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는데, 현상유지파는 1925년 이승만을 해임시킨 다음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18. 다음 중 설명이 옳은 것은?
(가) 과전법 (나)직전법 (다)관수관급제 
① (가) 관리가 죽은 후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② (가)에서는 경기이외의 토지도 지급대상이었다. 
③ (나)는 관료에게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다.
④ (나)는 현직관료에게만 소유권을 주었다.
⑤ (다)로 국가의 토지지배권이 약화되었다.


정답 ①: 과전법은 전현직관리에게 지급하였으며 사망시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직전법은 현직관료에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관수관습제 실시를 계기로 국가의 토지지배권이 강화되었다.

해설 :
●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 전지와 시지를 지급한 것은 고려의 전시과이고, 조선시대의 과전법하에서는 전지만 지급하였다.
● 15세기 후반 세조 때에는 과전법을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성종 때 관수관급제 실시 이후 양반 관료들이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19. 다음과 같은 시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은?
․장용영 설치
․규장각
․초계문신제
․대전통편 편찬
① 5군영의 완성 
② 왕권의 강화
③ 사상들이 활동하기가 편해졌다.




정답 ①: 정조때의 사실이다. 5군영의 완성은 숙종때 이루어졌다. ③의 신해통공으로 정조때 사상들의 어느정도 자유로운 활동이 이루어졌다.

해설 : 주어진 자료는 모두 정조 때의 사실이다.
● 5군영은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숙종 때 금위영을 끝으로 완성되었다.

20. 구본신참을 표방한 광무개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국민의 여론을 받아들여 의회를 설립하였다.
② 지계를 발급하였다.
③ 식산흥업정책으로 상공업을 장려하였다.
④ 철도학교, 상공학교 등 각종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⑤ 도시의 근대화를 위해 전차 등을 부설하였다.


정답 ①: 광무개혁은 황제권을 강화시켰다.

해설 :
● 아관파천 후 1년 만인 189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친 다음,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독립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시정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전제 황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어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였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도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 대한제국은 독립협회가 제기한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구상하기도 하였으나, 왕정을 폐기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보수 세력의 모함으로 고종은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협회도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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