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1일에 시행한 서울시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 중 로마제국이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된 시기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①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군대를 예성강 일대에서 물리쳤다.
② 고구려 소수림왕이 태학을 설립했다.
③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파견했다.
④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거란족의 일파를 정복했다.
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정답] ④

[해설] 동로마(비잔틴)⋅서로마 제국의 분열은 395년의 일이다.
근초고왕(346~375) ⋅왕 24년(369) : 예성강(황해도) 일대에서 5만의 고구려 군대를 물리침
→ 황해도 일대 대방(帶方) 고지의 획득을 두고 백제와 고구려가 영토쟁탈전을 벌여 백제가 크게 승리한 전투.
소수림왕(371~384) ⋅왕 2년(372) : 불교도입과 더불어 태학을 설립하고 다음해에는 율령을 반포하여 내치를 정비해 나갔다.
내물왕(356~402) ⋅왕 26년(381) : 전진에 고구려와 더불어 사신을 파견
광개토대왕(391~413) ⋅왕 1년(391) : 거란 정벌
※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왕 5년(396: 비류정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나제동맹(433) 5c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그에 따른 남하정책 이후의 일이다.

2. 고구려의 혼인 풍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형사취수제가 행하여졌다.
② 조혼이 행하여졌다.
③ 서옥제가 있었다.
④ 평민은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혼인했다.
⑤ 남자집에서 신부집에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정답] ②

[해설] 상류층에서는 정식적인 중매혼 형태가 일반적인 것이었을 것으로 보나, 서민층에서는 자유로운 결혼이 이뤄졌던 것으로 본다. 자유로운 교재에서는 특별한 재물이 없이 결혼이 성사되었던 것으로 본다(신라의 경우에도 살림의 정도에 따라 오직 술과 밥을 해서 나누어 먹었을 뿐이라 한다).

다만, 삼국지의 기록과 수서의 기록이 달라 고구려의 결혼 방식이 항시 일관되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는 계층간의 차이이거나 혹은 시기상의 차이일 것으로 보고 있다(삼국지는 3c후반에 써진 것이고, 수서는 7c초반에 써진 것이다.)

조혼은 원나라 간섭기 고려에서 나타난 풍습이다.

[참고]
※ 고구려의 혼인풍습 관련 사료
<사료 1> 혼인을 할 때 구두로 미리 약속이 되면 여자의 집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 한다. 해가 저물면 남자(신랑)가 여자(신부)의 집 밖에서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여자와 함께 잠을 잘 수 있도록 청한다. 이렇게 세 차례 행한 후 여자의 부모가 받아들이면 그제서야 서옥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이때 남자가 가져온 돈과 폐백[錢帛]은 서옥 곁에 둔다. 그곳에 살다가 아이를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
<사료 2>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흉노의 풍습과 같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
<사료 3>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그것으로 결정하였으며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와 술만 보내면 그만이었고 재물로 결혼을 하는 예절은 없었다. 혹 재물을 받는 경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부끄러운 짓으로 여기고 딸을 노비로 파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수서> 열전 고려
※ 일부일처제의 문제
대체로 일부일처제가 행해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나, 상류층에서는 다처 내지는 축첩이 (제법 널리) 행해졌을 것으로 본다.

3.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고조선조(왕검조선)에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그의 제자들은 ‘述而不作’의 원칙하에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역사를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본문에서는 3가지 역사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다음 중 고조선조에서 인용한 기록물들로 옳은 것은?
① 사기(史記), 한서(漢書), 위서(魏書)
②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③ 삼국지(三國志), 고기(古記), 당서(唐書)
④ 위서(魏書), 고기(古記), 당서(唐書)
⑤ 고기(古記), 당서(唐書), 수서(隨書)


[정답] ④

[해설] 《위서》, 《고기》, 《당서》 등이 등장한다.

[참고]
※ 《삼국유사》 ‘고조선’ 관련 사료
단군조선 <사료 1>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고(高; 요임금-정종의 휘인 요(堯)를 피하고자 고라 표현한 것)와 같은 시대이다.”

<사료 2>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 ”(단군신화 사료)
기자조선 <사료 3 : 기자조선>
당(≪구당서≫) 의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이 3군(郡)으로 나누었으니, 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통전(通典)≫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註) ≪한서(漢書)≫에는 곧 진(眞)(番)⋅임(臨)(屯)⋅낙(樂)(浪)⋅현(玄)(菟)의 4군(四郡)인데, 여기서는 3군(三郡)이라 하며 또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 위만조선
(고조선 X)
<사료 1>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른다. … 연 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亡命)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

※ 고조선 관련한 중국측 사료
《관자》 ⋅ 고조선 관련 최초 기록 → 적어도 BC 7c에는 고조선이 존재했음을 보여줌
<사료 1> “해내(海內)에 귀중한 예물 7가지가 있는데 … 조선의 문피(文皮: 표범가죽)가 그 한가지다.”
《산해경》 <사료 2>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해(海)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전국책》 <사료 3>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으며 …
→ 사료2`3은 BC 4c 고조선의 위치가 연의 동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지》 <사료 4> 《위략》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쇠망하여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고 동쪽 땅을 경략하려 하자,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또한 왕을 자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역으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려 했다.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언하자 그만 두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자 연나라도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조선의 자손들은 점점 교만해져갔다.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리의 땅을 차지하였다. 만번한을 경계로 이르게 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쇠약해져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사기》 <사료 5>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으로 연왕을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사료 6>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 위만)도 망명하였다. …
<사료 7> 조선왕 만(滿: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장새(障塞)를 쌓았다.
<사기> 열전 조선
《한서》
지리지
<사료 8> 8조법금 내용
기타


4. 다음은 고구려가 발전해 가면서 일어난 일들이다. 순서대로 나열한 것은?
(가) 후연을 격파하다.
(나) 낙랑과 대방을 병합하다.
(다) 진대법을 실시하다.
(라) 태학을 설립하다.
① (가) - (다) - (나) - (라)
② (나) - (다) - (라) - (가)
③ (나) - (가) - (다) - (라)
④ (다) - (나) - (라) - (가)
⑤ (다) - (라) - (가) - (나)


[정답] ④

[해설] 진대법 실시(2c 고국천왕) → 낙랑과 대방 병합(4c초 미천왕: 한4군 완전축출) → 태학 설립(4c 후반 소수림왕) → 후연 격파(5c 초반 광개토 대왕)


5. 신라에서는 왕의 칭호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이는 신라 사회의 특수한 사정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정치적 군장과 제사장의 분리, 3성의 교대, 김씨의 왕위 세습권 독점, 부자상속제의 확립과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왕의 칭호가 변화한 것이다. 신라에서 왕의 칭호가 변화한 과정을 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거서간 – 이사금 – 마립간 – 차차웅 - 왕
② 이사금 – 거서간 – 마립간 – 차차웅 - 왕
③ 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 왕
④ 차차웅 – 이사금 – 거서간 – 마립간 - 왕
⑤ 이사금 – 차차웅 - 거서간 – 마립간 - 왕


[정답] ③

[해설] 이 문제는 단순하게 출제되었는데, 다음을 대비해서는 ‘마립간 시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하면 좋겠다.

[참고] 삼국사의 시기구분
역사에서 시기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현재 신라사는 김부식의 ‘상대-중대-하대’ 구분법이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삼국 초기사를 부각시키려는 시도와 맞물려 신라 초기사에 대한 시기구분이 시도되고 있으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신라사의 새로운 시기구분은 위에서 언급된 왕호를 가지고 구분하려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 중 ‘마립간 시기’(김씨 왕위 독점기)라는 것이 특히 부각이 되고 있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이사금 시기의 특징(연맹체 단계: 박석김 왕위 교체기), 거서간(군장)⋅차차웅 시기의 특징도 간단히 알아두는 것이 좋다.


6. 다음 중 고려의 통치체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중앙의 최고 관서는 중서문하성인데,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했다.
② 고려의 삼사는 송과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관한 회계만 맡았다.
③ 어사대의 관원은 왕명에 대한 봉박권과 관리 임명에 대한 서경권을 갖고 있었다.
④ 전국을 5도와 양계로 나누고, 5도에는 상설행정기관을 두고 안찰사를 파견했다.
⑤ 중앙군은 국왕 친위부대인 2군과 수도경비와 국경방어를 담당한 6위로 구성되었다,


[정답] ④

[해설] 고려 안찰사는 경직이다. 그래서 따로이 치소를 두지 않고 순찰직으로 6개월간 도내를 순찰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안찰사 연구는 아직도 맹아 상태이다. 그런고로 이에 대한 견해도 사실 이견이 있기는 하다).

7.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국가의정통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다음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화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를 통한 독립의 성취에 중점을 두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 각각 위원부를 두었다.

③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④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육군무관학교, 비행사양성소, 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독립군을 후원하였다.

⑤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두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하였다.


[정답] ②

[해설] 파리외교부와 구미위원부가 설치되었는데, 나중에는 구미위원부로 외교권능이 통합되었다. 파리 외의 유럽국에 외교위원부가 따로 설치된 것은 아니고(외교연락원이 파견되기는 하였다), 구미위원부에서 나중에는 주미⋅주유럽 외교사무를 주관하였다.


8.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는?
①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②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③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④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⑤ 창덕궁 주합루(宙合樓)


[정답] ①

[해설] 중명전이 복원되면서 출제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중명전이 복원되면서 중명전의 역사가 최근 논의되었다. 대체로 을사조약과 그 이후  고종의 정치활동은 이 곳에서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맞겠다. 2007년 헤이그 밀사사건 100주기 이후 헤이그밀사사건과 그를 둘러싼 전후 상황에 대한 연구가 제법 축적이 되었다. 한동안 다소나마 시즌을 맞을 문제들이다.

[참고]
※ 중명전
중명전은 최근에 복원되어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록 덕수궁 전체에서 보면 핵심건물은 아닐 수 있지만, 대한제국 말기의 중요한 일들이 다 이곳에서 이뤄졌다는 점 때문에 최근 관심을 받고 있다. 건물 비중상 70% 이상의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는데 서울시 7급에서 출제되었다. 사실상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먼저 출제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한검에서는 출제되지 않고 서울시 시험에서 출제되었다.

9. 다음의 편지가 쓰여진 시점에 진행되고 있던 일들을 모두 고른 것은?
 … 저는 서울특별시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서 ……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3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
(가) 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여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나) 울산 등의 큰 공장에서 대규모 노동쟁의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다) 이농이 대규모로 진행되면서 도시 빈민들의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라) 유신체제가 출범하여 긴급조치가 연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었다.
① (가), (나)
② (가), (다)
③ (가), (라)
④ (나), (다)
⑤ (다), (라)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사료는 전태일 분신 바로 전 해인 1969년 12월 19일에 쓰여진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라는 글이다.

(가) 베트남 파병(1965~1973), (다)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대거 유입과 농촌 피폐화(3⋅4공화국 산업화 시기의 특징) // (라) 긴급조치 발동(1974~5), (나) 울산 대규모 노동쟁의(1987; 6월항쟁 이후).

[참고]
※ 대규모 노동쟁의
박정희 시기 노동3권 부정, 전두환 정부의 노동 탄압에 억눌려 있다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후 대규모 노동쟁의(울산지역의 노동쟁의가 선도함)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10. 조선은 유교 이념의 확립을 목표로 하여 교육에 만전을 기하였다. 다음 중 조선의 교육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기숙사인 명륜당에서 생활했다.
② 서울에는 네 군데의 부학(部學), 즉 동학, 서학, 남학, 북학을 세웠다.
③ 왕세자는 성균관에서 입학식을 치르고 궁 안의 존경각에서 교육을 받았다.
④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국비로 가르쳤다.
⑤ 기술 교육은 잡학(雜學)이라 불렸고, 중앙 관청인 예조에서 총괄하여 담당했다.


[정답] ④

[해설] ① 명륜당은 강의실이다. 기숙사는 양재(兩齋: 동재, 서재)이다. ③ 존경각은 성균관에 있는 도서관이다. ② 4부학당은 애초 5부학당을 예정했으나, 북부는 끝내 설치되지 못하고 중⋅동⋅서⋅남 4부만 설립되어 4부학당으로 정비되었다. ⑤ 기술교육(잡학교육)은 중앙에서는 해당관청에서 지방에서는 지방관부에서 주관하였다.

※ 조선의 교육제도
A. 관학
- 성균관
⋅ 명륜당 : 강의실, 과장(科場)
⋅ 비천당 : 제2 과거 시험장(科場)
⋅ 존경각 : 도서관
⋅ 양재(동재, 서재) : 기숙사
⋅ 문묘 : 대성전(공자 사당), 양무(동무, 서무: 중국과 한국의 선현 사당)

- 4부 학당
⋅ 서울 부중에 학교를 설치한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제도
⋅ 애초 5부학당을 예정했으나, 중·동·서·남 4부만 설립되고, 북부학당은 끝내 설립되지 못함
⋅ 문묘 X

-향교
⋅ 향교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처음 설치(실시)되었으나,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된 것은 조선 이후의 일이다.
⋅ 향교는 국비로 운영 : 이에 국가에서 토지와 서적 등을 내려 보냈다. 때로는 교보(校保), 식리전(殖利錢) 등을 통해 재정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 구조 : 성균관과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은 성균관은 명륜당(강의실)이 문묘 뒤에 있으나, 향교나 서원은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교육 공간 뒤(안쪽)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잡학
⋅ 유학, 무학 외의 8학을 일컬어 잡학이라 한다.
⋅ 잡학(기술학)은 해당관청(중앙)과 지방관아(지방)에서 교육하였다.

B.사학
-서원
⋅ 사족 중심의 교육기관 (→ 서원만을 거치고도 과거시험을 보는 것이 허용되었다.)
⋅ 사족들
교육 : 향교보다 서원 선호 → 향교는 서원들의 교육기관화 함
(→ ∴ 향교 교육의 내용이 과거보다는 유교적 교화에 초점이 맞추어짐)
향사 : 향교에도 적극 참여
 ※ 청금록 : 사족들은 향안과 더불어 청금록(향교, 서원의 사족 학생명부)에는 반드시 등재하고자 하였다.

-서당
⋅ 초등교육기관

11.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과 국학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용했다.
② 조선어연구회는 한글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한글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③ 사회경제사가들은 역사발전의 보편성에 입각해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했다.
④ 1920년대에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⑤ 1920년대 이후 야학이 민족교육에 이바지했지만, 서당은 별다른 역할을 못했다.


[정답] ⑤

[해설] 1920년대에는 야학과 서당(개량서당)이 민족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 ① 3⋅1운동이후 ‘문화정치’기에는 기본권이 제한적으로 인정되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이 만든 조선어 신문이 나오고(조선일보, 동아일보; 1920년), 각종의 집회가 허용되었으며, 조선민족의 대표적인 단체(신간회)도 만들어졌다. ② 1920년대에는 조선어 연구활동도 행해지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주시경의 제자들이 만든 조선어연구회이다. 이들은 뒤에 이름이 바뀌는 조선어학회와 달리 <한글> 잡지 발행, ‘가갸날’(한글날) 제정 등 외부활동 중심의 많은 활동을 전개한다. ④ 1920년대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일제의 관립대학 설립(경성제국대학)으로 실패하고 만다.

[참고] ※ 1920년대 야학/서당
서당
(개량서당 등장)
서당은 3⋅1운동 이후에는 개량서당이 등장하여 한학 외에 신교육을 가미하여 공립학교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과 민족교육을 해나갔다.
야학 야학은 생활이 어려운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 자제 등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와 우리 말 교육을 하는 등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교육을 행하였다. 이들은 노동자⋅농민 등의 성인들에게도 교육을 실시하여 1920년대 노동자⋅농민(소작쟁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데도 기여하였다. 다만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움을 겪었다.
※ 조선어 연구운동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조선어연구회 조직(1921)
(→ 주시경 제자들이 조직)
· ‘가갸날’(한글날) 제정
· 《한글》 잡지 발행
⋅ ⇨ 조선어학회(1931)
(최현배, 이윤재)

· <한글 맞춤법 통일안> 등 제정
⋅ ⇨ 조선어학회 해산(1942)

· <우리말큰사전> 발간시도 →실패
(해방 후 한글학회에서 간행)
※ 근대 사학사
※ 식민사관
 · 타율성론 : 반도사관, 만선사관, 임나일본부론  ⇨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대개 비판
 · 정체성론 : 조선은 ‘고대’ 수준의 발달단계에 머무름(조선 ‘중세’ 부재론)  ⇨ 사회경제사학자들이 비판
민족주의 사학 ⋅ 일제의 타율성론 비판  → 민족의 자주성이 강조된 고대사를 중시하게 됨
⋅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이 처한 현실을 극복해 나가고자 함
→ 정신이 강조됨(이른바 ‘유심사관’)
→ 특수성이 지나치게 강조됨(보편적 사관으로는 곤란: 이론이라기보다는 운동의 성격 강함)
→ 저항(투쟁)을 강조하여 발전사관에 대해서는 미약
→ 사회경제사학자들에 의해 비판 받음
⋅ 신채호, 박은식
실증주의 사학 ⋅ 문헌고증에 따른 과학적이고·객관적인 역사학 추구 : 역사의 객관성 주장(정치성 탈피)
 → 일제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이 돼버림(일제의 학문적 도구가 됨)
 → ‘역사학을 위한 역사학(학문을 위한 학문)’이라는 비판 받음
⋅ 이병도, 이상백, 김상기
사회경제사학 ⋅ 일제의 정체성론 비판 : 한국도 세계사적인 발전법칙에 따라 발전해왔음을 입증 시도
⋅ 한국에 보편적인 역사학 이론 도입 : 마르크스 역사발전 5단계설(유물사관) 도입
→ 한국의 역사학을 보편적인 틀로 설명 : 세계적인 보편성 확립에 기여
→ 계급[보편성]을 중시하여 민족이 처한 현실[특수성] 인식에 대해서는 부족
→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비판 받음
⋅ 백남운, 이청원, 전석담, 김석형, 박시형
신민족주의 사학 ⋅ 계급개념과 민족개념을 절충시킴 → 이를 바탕으로 국제적 수준의 협력방안을 모색
(유물사관의 계급투쟁적 성격은 벗어나고자 하는 것임)
⋅ 안재홍, 손진태, 이인영, 홍이섭


12. 다음 중 1945년 12월에 열렸던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아닌 것은?
①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
② 임시 민주 정부 수립을 위해 UN의 협조를 받는다.
③ 임시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한다.
④ 미⋅소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가 협의하여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든다.
⑤ 2주일 이내에 미⋅소 양군 대표회의를 소집한다.


[정답] ②

[해설]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 한반도 문제를 UN에 이관하는 것은 1947년 미국의 정책이 대소협조책(국제주의; internationalism)을 포기하고 봉쇄정책(냉전의 시작 혹은 국가주의(nationalism))으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고려한국사> 근현대사 p549)

[참고] ※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미국⋅소련안
미국안 신탁통치 주장 : 신탁통치에 대한 허용 여부를 지속적으로 타전(전쟁 전에 열강의 확답을 받지 못해 종전 후인 모스크바 3상회의까지 끌고 온 것임)
소련안 임시정부안 → 이를 위해 미소공동위 설치 → 조선의 제정당⋅사회단체 포함
(※ 결국은 제정당⋅사회단체의 참여 문제 때문에 미소공위가 결렬됨)

13. 일제가 1909년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간도에 대한 관리권을 청에 넘겨준 대가로 무엇을 획득했는가?
① 백두산 삼림 채벌권
② 송화강 유역 개발권
③ 여순–대련항 조차권
④ 길장선 철도 부설권
⑤ 안봉선 철도 부설권


[정답] ⑤

[해설]
안동(安東)이라는 뜻은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말처럼 ‘동방을 경략한다’는 뜻이 있다. 압록강 건너의 안동은 한반도로 진입하는 기지역할을 하는 곳이다. 안동-봉천선은 한반도의 철도와 만주의 철도(남만선)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또한 신의주의 압록강 철교는 경의선과 이 안봉선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 압록강 철교를 ‘대륙침략의 교두보’라고 한다).

길장선(길림⋅장춘선)은 남만철도로서 러일전쟁 이후에 이미 일본이 부설권을 획득한 철도이다. 간도협약 제6조는 이를 북간도와 연결하여 한반도 회령과 연결하는 권한을 얻고자 명시한 것이다.

[참고] 간도에 관한 청.일 협약
제1조 청·일 양국정부는 도문강을 청·일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원지방에 있어서는 정계비(定界碑)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써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성명(聲明)한다.

제2조  청국정부는 위 각지를 외국인의 거주 및 무역을 위하여 개방하도록 하고 일본정부는 이곳에 영사관 또는 분관을 설치할 것이다.

제3조  청국정부는 종래와 같이 도문강 이후의 간지(墾地)에 있어서 한국민 주거를 승인한다.

제4조  도문강 이북지방의 잡거지구역내(雜居地區域內) 간지(墾地) 거주의 한국민은 법권(法權)에 복종하며 청국지방관의 관할재판에 귀부(歸附)한다.  …

제5조  도문강 이북 잡거구역 내에 있어서의 한국민 소유의 상지(上地) 가옥은 청국정부가 청국인민의 재산과 같이 보호하여야 한다.  …

제6조  청국정부는 장래 길장철도(吉長鐵道)를 연길(延吉) 남경(南境)에 연장하여 한국 회령(會寧)에서 한국 철도와 연결하도록 하며 그의 일체 변법(辨法)은 길장철도(吉長鐵道)와 일률로 하여야 한다. …

제7조  본 조약은 조인후 직시(直時) 효력을 발생하며 통감부파출소 및 문무(文武)의 각원(各員)은 가능한 한 속히 철퇴(撤退)를 개시하며 2개월 이내에 완료한다.  일본국 정부는 2개월 이내에 제2조 신약(新約)의 통상지(通商地)에 영사관을 개설한다.
우증거(右證據)로써 하명(下命)은 각기(各其)의 본국정부로부터 상당한 위임을 받고 일본문(日本文) 급(及) 한문(漢文)으로써 작성한 각 2통의 본협약에 기명조인(記名調印)한다.
명치(明治) 42년 9월4일
선통(宣統) 원년(元年) 7월 20일 북경(北京)에서
대일본국 특명전권공사 伊集院彦吉
대청국흠명외무부상서회판대신(大淸國欽命外務部尙書會辯大臣)  양돈언(梁敦彦)

<동삼성오안에 관한 일청협약>
(위와 같은 간도협약에서 일본이 간도영유권을 포기한 대가로 획득한 주요 이권)
(1) 노일전쟁(露日戰爭)중에 군용철도로 부설한 안봉선(安奉線)을 본철도로 개축한다.
(2) 만철병행선(滿鐵幷行線)인 신민둔(新民屯)·법고문(法庫門)의 철도부설에 대해서 일본과 상의한다.
(3) 대석교(大石橋)·영구간(營口間)의 지선(支線)을 일본이 부설하고 그 지선(支線)의 말단(末端)을 영구(營口)로 연장한다.
(4) 무순(撫順)·연대(煙臺)의 탄광채굴권을 인정한다.
(5) 봉안철도(奉安鐵道) 연선(沿線) 및 남만주철도(南滿州鐵道) 간선(幹線) 연선(沿線)의 광무(鑛務)는 일청합변(日淸合辯)으로 한다.
(6) 경봉철도(京奉鐵道)를 봉천(奉天) 성근(城根)까지 연장한다 라는 내용을 들 수 있다


14. 1898년 조직된 찬양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서울의 북촌에 사는 양반층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②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는 ‘여성 통문’을 발표하였다.
③ 여성 교육을 위해 여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재정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④ 여성 계몽을 위한 정기적인 연설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⑤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 운동을 전개한 여성 단체이다.


[정답] ③

[해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활동이 한창이던 1898년에 북촌의 양반층 부인들이 주도가 되어 여학교 설립과 계몽활동을 목표로 찬양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주도의 여권단체).

이들은 <독립신문>, <황성신문>에 ‘여권통문’을 발표하여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주장하고 이내 궁궐 앞까지 가서 여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려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이에 1899년 순성여학교(최초의 여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재정문제로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찬양회가 해체되면서 곧이어 폐교되었다.

[참고] ※ 찬양회
설립 ⋅ 1898년 북촌의 양반층 부인들 주도로 결성
→ 개화파들의 여권인식 성장과 <독립신문> 계몽운동의 영향
⋅ 의의 : 여성에 의한 최초의 여성 운동단체
→ 여학교 설립과 여성 계몽운동 추진
활동 ⋅ <독립신문>, <황성신문>에 ‘여권통문’을 발표
→ 남성과 동등한 교육권, 직업권, 정치참여권 주장
→ 황현 <매천야록> :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남녀동권을 제창한 일”
⋅ 대궐 앞에서 여학교 설립 청원 상소문 고종에게 제출(여성들이 올린 최초의 집단 상소문)
→ 순성여학교 설립(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여자 사립, 1899.2)
⋅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활동에도 참여
해체 ⋅ 관립학교의 설립에는 실패하였다.
cf. 관립학교 설립 : 1908년 한성고등여학교(경기여고 전신)
⋅ 재정악화로 찬양회 해체, 순성여학교도 곧 폐교


15. 다음은 남북한 사이에서 체결된 중요한 문서들 중 핵심적인 부분이다.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은?
(가)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나)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라)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치,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
① (가) - (나) - (다) - (라)
② (가) - (나) - (라) - (다)
③ (가) - (다) - (나) - (라)
④ (나) - (다) - (가) - (라)
⑤ (나) - (가) - (라) - (다)


[정답] ②

[해설] (가) 7⋅4 남북공동성명(1972.7.4.) → (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1989, 노태우) → (라)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1991.12, 노태우) → (다) 6⋅15 공동선언(2000) (<고려한국사> 근현대사 pp645, 674-5, 683; 수업자료)


16. 조선 전기에는 역사, 법전, 지도와 지리지, 예서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편찬 사업들을 수행하였다. 조선 전기 편찬 사업의 주요 성과를 설명한 것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경국대전은 세종 때 법전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하였다.
② 1402년 태종 때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세계 지도이다.
③ 세종 때에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기록한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④ 성종 때 완성한 『국조오례의』의 오례는 가례, 길례, 흉례, 군례, 빈례이다.
⑤ 당시까지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이 성종 때 완성되었다.


[정답] ①

[해설] 세조때 편찬(호전, 형전 완성)이 시작되어 예종대를 거쳐 성종대 완성 반포되었다.

[참고] 각 시기 편찬사업을 보는 방법은 고대-고려-조선이 다르다. 고려는 역사편찬물 위주이고, 조선은 역사, 법전, 지도/지리지, 의례서, 왕실편찬물 등 다양하다. 한 가지 틀로 정리하는 방법을 익혀두면 비교적 편리하다.

17. 고려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혁신 정치를 추진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겼고, 서경 세력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 칭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이 사건을 두고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무엇인가?
① 이자겸의 난
② 만적의 난
③ 묘청의 난
④ 정중부의 난
⑤ 강조의 난


[정답] ③

[해설] 인종대가 요즘 고려 중대 왕대사에서는 시즌이라고 했다. 올해 서울시 9급과 7급에서 모두 출제되었다. 물론 어렵지는 않게 출제되었다.

18. 다음 중 고려시기의 가족제도와 혼인풍습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고려 초에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행해졌는데, 중기 이후 이러한 풍습은 사라졌다.
②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했지만,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였다.
③ 사위가 처가살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외손자는 음서의 혜택이 없었다.
④ 여성의 재가는 자유롭게 이루어졌지만, 그 자녀는 사회 진출에 차별을 받았다.
⑤ 대체로 여자가 남자보다 일찍 혼인했고,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정답] ⑤

[해설]
“가족제도와 여성의 지위”라는 제목으로 늘 수업을 한다. 이는 두 개의 범주를 나누어 어느 범주에 속하는 지만 잘 기억하면 된다고 했다.

① <충선왕의 복위교서>가 자주 출제되는데 이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하나가 왕실 동성혼(근친혼) 문제이고, 또 하나가 당시 ‘권문세족’의 실태이다.

[참고]
※ 고려의 ‘가족제도 및 여성의 지위’

A. 호적
⋅ 호적기재 :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연령순 기재)  ≠ 남녀순
→ 여자가 남자보다 앞에 기재될 수 있었다.
⋅ 호주 가능(여성)
※ 조선전기의 족보 : 자손보 성격(외손의 가계까지 기록, 만성보)  ≠ 씨족보

B. 관혼상제
- 결혼
⋅ 일부일처제 원칙 / ※ 왕실 : 근친혼, 동성혼 유행(고대의 전통)
⋅ 솔서혼(서류부가, 남귀여가: 고구려의 전통을 이음) : 남자가 장가를 듦 ≠ 친영제
⋅ 재혼자유(자식도 차별 안받음) : 이혼시 재산분할(즉, 결혼후도 경제력 보유)
※ 서얼(첩의 자식)을 특별히 차별하지 않았다.

- 상속
⋅ 재산상속균등(자녀균분상속) ≠ 남녀(장자)차등상속
※ 상속재산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 노비

- 제사
⋅ 제사봉사에 차별 X(윤회봉사, 비용분담) : 남녀 모두 가능
→ 여자의 계사(繼嗣)를 인정(양녀가 있었음)  → ∴ 제사위해 반드시 양자들이지는 X


C. 친가와 처가의 차이
 ▶ 친가와 처가(외가)의 차이가 크지 X
⋅ 호적 : 사위, 외손자까지 기록
⋅ 음서의 혜택 : 외손자, 사위에게까지 미침
⋅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고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음
→ 딸이나 사위가 처가부모 봉양하는 경우가 많았음 ≠ 이성불양
⋅ 사위가 처가의 부모제사를 모시기도 함

19. 고려 후기 공민왕은 고려시대 가장 개혁적 성향을 띤 왕이었다.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수행했던 역사적인 배경과 개혁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원나라가 남쪽에서 일어난 명나라에 쫓기는 국제 정세를 활용하였다.
② 즉위 직후 몽고풍의 의복과 변발을 폐지하고, 기철(奇轍) 형제 등을 숙청하였다.
③ 원나라의 직속령이었던 영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④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⑤ 성균관을 부흥시켜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였다.


[정답] ④

[해설] 전민변정도감은 전(田)과 민(民)을 원래의 위치대로 되돌리고자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즉 권문세족에 의해 탈점된 토지(田)와 백성(民) 들을 국가의 양민과 토지의 위치로 복원시켜 국가의 권력을 강화하고 또 국가재정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권문세족의 지위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성균관 부흥의 의미는 제법 자주 출제되는 것이니 잘 알아두어야 한다. 쌍성총관부의 공략의 의미는 자주적인 영토회복 뿐만 아니라 이성계 등장의 배경이 되는 것이니 역시 잘 알아두어야 한다.

20. 일제시기 독립운동단체와 애국지사의 활동 내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신간회 :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단체로 자치론을 주장했다.
② 대한 독립군 :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③ 나석주 :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다.
④ 조선 혁명군 :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⑤ 의열단 : 중국 공산당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했다.


[정답] ④, ②

[해설] 복수정답이다.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의 만주사가 최근 시즌이라고 했다(예전에 1920년대 초반의 만주사가 시즌였던 것과는 달라졌다).

②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등이 참여한 독립군의 연합전투였다.

① ‘기회주의자’(자치론자, 타협론자; 민족주의 우파)를 배격하고 자치론을 배격하였다.

③ 나석주는 식산은행과 동척에 투탄하였다. 둘 다 조선 침략의 첨병인 기구들이다. 나석주의 고향이 황해도 재령의 동척 농장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면 이해가 쉽다.

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군 정부와 함께 활동했다. 중국⋅조선공산당 세력이 활동한 곳은 화북지역과 만주지역이다.

[참고] ※ 만주 독립운동사(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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