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0일에 시행한 기상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은 ○○지역 문화재 발굴단장의 발표문과 지층도이다. (나) 지층에서 발굴할 수 있는 유물로 잘못된 것은?
“○○지역의 문화재를 발굴한 결과 우측 지층도 (가)층에서는 반달 돌칼과 미송리식 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다)층에서는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개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
|
② 가락바퀴
③ 덧무늬 토기
④ 민무늬 토기
정답: ④
해설:【난이도 下: 테마6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비교】
(가)는 반달 돌칼과 미송리식 토기가 출토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 (다)에서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도구인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개가 출토되었으므로 (나)가 신석기 시대라는 것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① 뼈바늘 - 신석기 어로용,
② 가락바퀴 - 신석기 직조용,
③ 덧무늬 토기 - 신석기 전기 토기
④ 민무늬 토기 - 청동기 시대 대표적 토기이다.
해설
선사시대의 유물에 대한 이해를 묻고 있습니다. (가)층에서 반달 돌칼과 미송리식 토기가 발굴되었다는 사실에서 청동기 시대임을 확인 할 수 있고, (다)층에서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개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에서 구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층은 신석기 시대이므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아닌 것을 고르면 되는 문제입니다. 신석기 시대는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시대이므로 식량 저장을 위한 토기가 제작되었고, 토기가 출토되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토기의 종류로 이른 민무의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문 토기(압인문 토기), 빗살무늬 토기가 있으며, 이중 빗살무늬 토기가 가장 대표적입니다.(토기와 관련해서는 사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도록 하면 더 좋습니다.)
또한 신석기 시대는 원시적인 수공업이 행해진 시기로 가락바퀴와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신석기 시대에서 기억해 두면 좋은 것은 움집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움집의 형태는 원형이고, 화덕이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고, 씨족 공동체로 생활하였으며, 족외혼을 통해 부족을 형성하는 평등사회였다는 사실과 애니미즘, 토테미즘, 자연신 숭배, 샤머니즘 등의 신앙이 나타났다는 정도가 있습니다.
(신앙은 정착 생활 이후에 나타난 현상으로 기억하면 좋습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자연에 대한 숭배사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답풀이
④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입니다.
정답: ④
해설:【난이도 下: 테마6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비교】
(가)는 반달 돌칼과 미송리식 토기가 출토되었으므로 청동기 시대 (다)에서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 도구인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개가 출토되었으므로 (나)가 신석기 시대라는 것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① 뼈바늘 - 신석기 어로용,
② 가락바퀴 - 신석기 직조용,
③ 덧무늬 토기 - 신석기 전기 토기
④ 민무늬 토기 - 청동기 시대 대표적 토기이다.
해설
선사시대의 유물에 대한 이해를 묻고 있습니다. (가)층에서 반달 돌칼과 미송리식 토기가 발굴되었다는 사실에서 청동기 시대임을 확인 할 수 있고, (다)층에서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개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에서 구석기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층은 신석기 시대이므로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 아닌 것을 고르면 되는 문제입니다. 신석기 시대는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시대이므로 식량 저장을 위한 토기가 제작되었고, 토기가 출토되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토기의 종류로 이른 민무의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문 토기(압인문 토기), 빗살무늬 토기가 있으며, 이중 빗살무늬 토기가 가장 대표적입니다.(토기와 관련해서는 사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도록 하면 더 좋습니다.)
또한 신석기 시대는 원시적인 수공업이 행해진 시기로 가락바퀴와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신석기 시대에서 기억해 두면 좋은 것은 움집에서 생활을 하였으며, 움집의 형태는 원형이고, 화덕이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고, 씨족 공동체로 생활하였으며, 족외혼을 통해 부족을 형성하는 평등사회였다는 사실과 애니미즘, 토테미즘, 자연신 숭배, 샤머니즘 등의 신앙이 나타났다는 정도가 있습니다.
(신앙은 정착 생활 이후에 나타난 현상으로 기억하면 좋습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자연에 대한 숭배사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답풀이
④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입니다.
정답: ④
2. 다음은 8조법의 일부이다. 이를 토대로 당시 사회의 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을 보기에서 고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를 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여자는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한서> |
<보기>
㉠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였다.㉡ 형벌과 노비가 발생하였다. ㉢ 가부장적 사회의 특성이 있었다. ㉣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
② ㉠, ㉢
③ ㉡, ㉢
④ ㉡, ㉣
정답: ③
해설:【난이도 下: 테마8 고조선의 흥망성쇠】
위 상자는 고조선의 8조 금법(출전: 한서지리지)에 관한 내용이다.
내용은 첫째,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
셋째,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외에 금법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부인의 정조를 강조하는 내용도 담겨있어서 가부장적 사회임을 엿볼 수 있다.
㉠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중시하였기 때문에 살인을 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남의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담겨있다.
해설
고조선의 8조법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을 묻고 있습니다. 이 8조법은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실려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고조선 사회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고조선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인명과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보호한 사회, ⓑ가부장 가족제도가 존재한 사회, ⓒ형벌과 노비제도가 존재한 사회, ⓓ범죄를 수치로 여기는 사회(제시된 자료에는 없지만 원래 사료에는 대문이 없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범죄를 수치로 여겼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정절을 숭상한 사회 이상 5가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제시된 자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내용은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를 받고자 하면 50만전을 내야한다.’의 구절을 통해 ⓒ의 형벌과 노비제도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자는 모두 정조를 지킨다’는 구절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의 특성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오답풀이
㉠의 내용은 제일 첫 줄에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인다는 구절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청동기 사회에는 토지에서의 생산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토지보다 인간의 노동력을 더욱 중시하는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중시하였던 것입니다.
㉣은 도둑질 한 자는 노비로 삼고, 죄를 면하기 위해서는 50만전을 내야한다는 구절을 통해서 사유재산재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 이전의 신석기 시대의 평등한 사회에서 빈부의 차이와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는 사회로 변하게 되면서 사유재산제도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답: ③
해설:【난이도 下: 테마8 고조선의 흥망성쇠】
위 상자는 고조선의 8조 금법(출전: 한서지리지)에 관한 내용이다.
내용은 첫째,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
셋째,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외에 금법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부인의 정조를 강조하는 내용도 담겨있어서 가부장적 사회임을 엿볼 수 있다.
㉠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중시하였기 때문에 살인을 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남의 재산을 도둑질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담겨있다.
해설
고조선의 8조법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을 묻고 있습니다. 이 8조법은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실려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해 고조선 사회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고조선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인명과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보호한 사회, ⓑ가부장 가족제도가 존재한 사회, ⓒ형벌과 노비제도가 존재한 사회, ⓓ범죄를 수치로 여기는 사회(제시된 자료에는 없지만 원래 사료에는 대문이 없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범죄를 수치로 여겼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정절을 숭상한 사회 이상 5가지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제시된 자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내용은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를 받고자 하면 50만전을 내야한다.’의 구절을 통해 ⓒ의 형벌과 노비제도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자는 모두 정조를 지킨다’는 구절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의 특성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오답풀이
㉠의 내용은 제일 첫 줄에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인다는 구절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청동기 사회에는 토지에서의 생산력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토지보다 인간의 노동력을 더욱 중시하는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중시하였던 것입니다.
㉣은 도둑질 한 자는 노비로 삼고, 죄를 면하기 위해서는 50만전을 내야한다는 구절을 통해서 사유재산재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 이전의 신석기 시대의 평등한 사회에서 빈부의 차이와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는 사회로 변하게 되면서 사유재산제도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답: ③
3. 고대 국가들의 사회 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① 고구려 - 혼인 풍속으로 형사취수제와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② 백제 - 상무적 기풍이 있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③ 신라 - 개인의 많은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화백제도가 있었다.
④ 가야 -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고, 철을 산둥과 규슈지방으로 수출하였다.
정답: ②
해설:【난이도 中: 테마9 초기국가들의 생활상】함정이 있는 문제다.
② 상무적 기풍은 언뜻 고구려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부여족 계통인 고구려와 백제 모두 상무적 기풍을 지니고 있다.
① 고구려 - 혼인 풍속으로 형사취수제와 데릴사위제가 있었다.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사회 모습이었다.
③ 신라 - 개인의 많은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화백제도는 신라 귀족들의 만장일치 합의체 정치체제였다.
④ 변한, 가야 -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고, 철을 낙랑, 대방, 왜의 규슈지방으로 수출하였다. 산둥지방에 수출한 자료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설
고대 각 국가별로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모습을 비교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유형은 자주 출제될 수 있으니 자세히 알아두어 헷갈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 두고 있으며, 고구려만큼 상무적 기풍 가지고 있으며, 말타기, 활쏘기 등을 좋아하고 즐겼습니다.
주로 상무적기풍과 말타기를 즐겼다하면 고구려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백제 역시 상무적 기풍을 띠었다는 것을 잘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오답풀이
① 고구려는 혼인풍속으로 형사취수제가 있었지만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혼인풍속이다.
③ 신라는 골품제를 통해 개인의 많은 활동 범위를 제한하였으며, 화백제도는 상대등을 주재로 하는 귀족들의 “합의체 회의”이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제로 결정하며, 국가의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신라인들이 신령스럽다고 여겼던 왕경(王京) 주위의 네 곳에 모여서 논의하였다고 한다.
④ 가야는 옛 변한지역(구야국)에서 성립되어, 벼농사 등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철을 낙랑, 대방, 왜의 규슈지방 으로 수출하였으나, 중국의 산둥지방에는 수출하지 않았다.
정답: ②
해설:【난이도 中: 테마9 초기국가들의 생활상】함정이 있는 문제다.
② 상무적 기풍은 언뜻 고구려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부여족 계통인 고구려와 백제 모두 상무적 기풍을 지니고 있다.
① 고구려 - 혼인 풍속으로 형사취수제와 데릴사위제가 있었다.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사회 모습이었다.
③ 신라 - 개인의 많은 활동 범위를 제한하는 골품제도가 있었다. 화백제도는 신라 귀족들의 만장일치 합의체 정치체제였다.
④ 변한, 가야 - 농경문화가 발달하였고, 철을 낙랑, 대방, 왜의 규슈지방으로 수출하였다. 산둥지방에 수출한 자료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설
고대 각 국가별로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모습을 비교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유형은 자주 출제될 수 있으니 자세히 알아두어 헷갈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자신들의 뿌리를 부여에 두고 있으며, 고구려만큼 상무적 기풍 가지고 있으며, 말타기, 활쏘기 등을 좋아하고 즐겼습니다.
주로 상무적기풍과 말타기를 즐겼다하면 고구려를 생각하기 쉽겠지만 백제 역시 상무적 기풍을 띠었다는 것을 잘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오답풀이
① 고구려는 혼인풍속으로 형사취수제가 있었지만 민며느리제는 옥저의 혼인풍속이다.
③ 신라는 골품제를 통해 개인의 많은 활동 범위를 제한하였으며, 화백제도는 상대등을 주재로 하는 귀족들의 “합의체 회의”이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제로 결정하며, 국가의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신라인들이 신령스럽다고 여겼던 왕경(王京) 주위의 네 곳에 모여서 논의하였다고 한다.
④ 가야는 옛 변한지역(구야국)에서 성립되어, 벼농사 등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철을 낙랑, 대방, 왜의 규슈지방 으로 수출하였으나, 중국의 산둥지방에는 수출하지 않았다.
정답: ②
4. 조선 사회에서 강조된 성리학적 명분론에 대한 설명으로 잘못된 것은?
① 경제적으로 지주전호제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② 사회적으로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와 가족 제도에 응용되었다.
③ 대외관계는 존화양이 사상으로 17세기에 친명배금 정책을 수립하였다.
④ 사상적으로 국초부터 성리학 이외의 사상과 학문 등은 철저히 배격하였다.
정답: ④
해설: 【난이도 下: 테마58 유학과 성리학】
성리학적 명분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이외의 사상과 학문 등은 철저히 배격한 것은 맞지만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 형성된 것이고 조선 초기(국초)에는 여러 사상에 대하여 포용적이었다.
해설
조선시대에서 양반들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지방자치”의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경제적인 부분에선 지주-전호제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지주들은 전호에게 소작을 주어 거기서 생산되는 양의 절반을 취하는 “병작반수제”로 지주들에게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16세기 이후 토지 소유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대되어갔다. 18세기 이후에는 사회 저변의 다양한 변화와 함께 지주와 전호의 객체도 변화되어가며, 병작반수제에서 “도조법” 이라는 소작료액을 미리 협정하고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바뀌어갔다. …①
성리학은 “이”와“기”를 구분하여 “이”가 본원적인 것, “기”가 본원적인 “이”가 다양하게 발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성리학적 원리를 사회적으로 적용하여 양반중심의 지배질서를 구축하고, 가족제도에도 적용하여 “가부장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②
성리학은 명분을 중시하고, 중화와 양이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17세기 인조반정 이후 이들은 이전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철저히 부정하고 성리학적 명분을 언급하며,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를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 이후 정묘, 병자호란을 야기시켰다.…③
오답풀이
④조선사회에서 성리학과 이외의 사상적 흐름이 초기의 모습과 후기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정비와 그 기반을 닦아야 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으며, 배척하진 않았다. 성리학 이외의 학문적 사상들이 사문난적으로 배척당하는 시기는 조선후기에 성리학이 교조적으로 변하게 되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정답: ④
해설: 【난이도 下: 테마58 유학과 성리학】
성리학적 명분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이외의 사상과 학문 등은 철저히 배격한 것은 맞지만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 형성된 것이고 조선 초기(국초)에는 여러 사상에 대하여 포용적이었다.
해설
조선시대에서 양반들은 성리학적 입장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기반으로 “지방자치”의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경제적인 부분에선 지주-전호제를 관철시키려 하였다. 지주들은 전호에게 소작을 주어 거기서 생산되는 양의 절반을 취하는 “병작반수제”로 지주들에게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16세기 이후 토지 소유권이 강화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확대되어갔다. 18세기 이후에는 사회 저변의 다양한 변화와 함께 지주와 전호의 객체도 변화되어가며, 병작반수제에서 “도조법” 이라는 소작료액을 미리 협정하고 매년의 수확량에 관계없이 일정의 소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으로 바뀌어갔다. …①
성리학은 “이”와“기”를 구분하여 “이”가 본원적인 것, “기”가 본원적인 “이”가 다양하게 발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성리학적 원리를 사회적으로 적용하여 양반중심의 지배질서를 구축하고, 가족제도에도 적용하여 “가부장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②
성리학은 명분을 중시하고, 중화와 양이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17세기 인조반정 이후 이들은 이전의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철저히 부정하고 성리학적 명분을 언급하며,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를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 이후 정묘, 병자호란을 야기시켰다.…③
오답풀이
④조선사회에서 성리학과 이외의 사상적 흐름이 초기의 모습과 후기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정비와 그 기반을 닦아야 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으며, 배척하진 않았다. 성리학 이외의 학문적 사상들이 사문난적으로 배척당하는 시기는 조선후기에 성리학이 교조적으로 변하게 되는 시기와 관련이 있다.
정답: ④
5.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한 정치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
② 권문세족과 대립하면서 고려 말 개혁을 추구하였다.
③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④ 지방의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중앙 정부와 대립하였다.
정답: ③
해설:【난이도 下: 테마85 4대 사화】
상자 안은 사림파의 태두인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설명이다.
관학파(훈구파)가 중앙정계의 기득권 세력이라면 사림파는 향촌의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었다.
①, ④ 신라 하대의 지방 호족사회
② 여말 신진사대부
해설
제시된 자료의 내용은 조광조의 개혁의 내용이고 위와 같은 정책을 추진한 세력은 조광조 중심의 사림세력입니다. 중종반정 이후에 정계에 다시 진출한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훈신들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향촌을 안정시키기 위해 향약을 보급하고,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들은 유교윤리에 위배된다고 하여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중종반정 공신의 위훈을 삭제할 것을 건의하다 훈신들의 반격으로 인해 기묘사화로 몰락하게 됩니다.
문제에서는 사림에 대해서 묻고 있는데, 사림은 고려 말 역성혁명을 반대한 신진사대부의 계열로 이들은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성종대에 이르러 중앙 정계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합니다. 훈척의 비리행위를 비판하면서 성장하던 사림은 4차례의 사화를 통해서 그 세력이 위축되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하여 선조 대에 이르면 정계의 주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오답풀이
①, ④ 신라 말~고려 초의 호족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고려 말 신진사대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답: ③
해설:【난이도 下: 테마85 4대 사화】
상자 안은 사림파의 태두인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설명이다.
관학파(훈구파)가 중앙정계의 기득권 세력이라면 사림파는 향촌의 향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었다.
①, ④ 신라 하대의 지방 호족사회
② 여말 신진사대부
해설
제시된 자료의 내용은 조광조의 개혁의 내용이고 위와 같은 정책을 추진한 세력은 조광조 중심의 사림세력입니다. 중종반정 이후에 정계에 다시 진출한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훈신들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합니다. 이들은 향촌을 안정시키기 위해 향약을 보급하고,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들은 유교윤리에 위배된다고 하여 소격서를 폐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중종반정 공신의 위훈을 삭제할 것을 건의하다 훈신들의 반격으로 인해 기묘사화로 몰락하게 됩니다.
문제에서는 사림에 대해서 묻고 있는데, 사림은 고려 말 역성혁명을 반대한 신진사대부의 계열로 이들은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성종대에 이르러 중앙 정계로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합니다. 훈척의 비리행위를 비판하면서 성장하던 사림은 4차례의 사화를 통해서 그 세력이 위축되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하여 선조 대에 이르면 정계의 주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오답풀이
①, ④ 신라 말~고려 초의 호족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고려 말 신진사대부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답: ③
6. 조선 전기의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① 시전상인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 받았다.
②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2년3작의 윤작법이 보급되었다.
③ 상인들의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④ 장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상공업 발달로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정답: ①
해설:【난이도 下: 테마78-82 조선시대 경제】
시전상인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으로 6의전 등이 있다. 17세기에는 이러한 독점 판매권이 금난전권으로 제도화되었다.
② 고려말이다. 만약 2년3작의 윤작법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하면 조선 초기가 될 수 있다.
③, ④ 조선 후기
해설
이 문제는 전기와 후기의 경제를 비교하여 알아둬야 하는데, 조선 전기 “특권상인”이라 하여 육의전, 시전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에 일정부분 세금을 내는 대신 특정 물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私商(사상)들이 함부로 자신들의 물품을 팔 수 없도록 하는 “금난전권”을 가지며 특권을 누렸다.
오답풀이
②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의 일반화와 2년3작의 윤작법 보급은 고려후기의 시기로 봐야한다. 참고로 소를 이용한 농법인 우경의 시작은 502년(지증왕3)에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③ 상인들의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는 조선후기의 사실이다.
④ 장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상공업 발달로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사실이다.
정답: ①
해설:【난이도 下: 테마78-82 조선시대 경제】
시전상인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으로 6의전 등이 있다. 17세기에는 이러한 독점 판매권이 금난전권으로 제도화되었다.
② 고려말이다. 만약 2년3작의 윤작법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하면 조선 초기가 될 수 있다.
③, ④ 조선 후기
해설
이 문제는 전기와 후기의 경제를 비교하여 알아둬야 하는데, 조선 전기 “특권상인”이라 하여 육의전, 시전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에 일정부분 세금을 내는 대신 특정 물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私商(사상)들이 함부로 자신들의 물품을 팔 수 없도록 하는 “금난전권”을 가지며 특권을 누렸다.
오답풀이
②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의 일반화와 2년3작의 윤작법 보급은 고려후기의 시기로 봐야한다. 참고로 소를 이용한 농법인 우경의 시작은 502년(지증왕3)에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③ 상인들의 자금과 원료를 미리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선대제는 조선후기의 사실이다.
④ 장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상공업 발달로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사실이다.
정답: ①
7. 다음과 같이 조선 후기 통치 체제의 변화를 추진한 목적으로 바른 것은?
* 정치구조 -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 군사제도 - 5군영 편성 및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 * 수취체제 -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이 실시되었다. |
② 백성들의 여론 정치를 활성화 시키고자 하였다.
③ 왕권과 신권의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④ 양반 중심 체제의 확립과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정답: ④
해설:【난이도 下: 테마69 조선시대 중앙관제와 관품】
정치-군사-사회신분-수취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근간은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①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면 탕평책 등을 언급하여야 한다.
② 백성들의 여론 정치를 활성화 시키고자 한다면 순문제도, 서경제도, 상소제도, 구언제도 등에 대하여 서술하여야 한다.
③ 왕권과 신권의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제도는 의정부 서사제가 있다.
해설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가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에서의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의 운영이 양반중심체제로 흐르는 것을 반영한다. 즉. 조선후기 비변사가 군사적, 경제적 문제 등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전반적으로 도맡아서 처리하자 의정부와 6조는 유명무실해졌고, 비변사를 장악한 일부 세력들이 국가의 권력을 독차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5군영을 통하여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적 방비를 강화하며, 속오군체제를 통해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기 까지 군사훈련을 받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다.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은 각기 조세, 공납,군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온 제도였다. 이를 통해 당시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해져가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오답풀이
① 붕당정치의 폐단극복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비변사의 강화로 인한 폐단이 더욱 심해져, 조선후기 세도정치기 때 비변사를 통한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영,정조 시기의 탕평정책, 붕당의 뿌리인 서원의 정리, 이조전랑의 권한 약화 등을 들 수 있겠다.
② 백성들의 여론을 정치에 활성화 시키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백성들이 신문고, 상언, 격쟁 등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당한 억울한 일들을 고하였는데, 이러한 신문고, 격쟁, 상언 등은 제약이 있어서 백성들이 자주 활용하진 않았다.
③ 왕권과 신권의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는 “의정부 서사제”를 들 수 있겠다. 이는 6조 직계제와는 반대의 성격으로 6조직계제가 왕권강화를 위한 제도였다면, 의정부 서사제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한 제도였다.
정답: ④
해설:【난이도 下: 테마69 조선시대 중앙관제와 관품】
정치-군사-사회신분-수취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근간은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①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면 탕평책 등을 언급하여야 한다.
② 백성들의 여론 정치를 활성화 시키고자 한다면 순문제도, 서경제도, 상소제도, 구언제도 등에 대하여 서술하여야 한다.
③ 왕권과 신권의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제도는 의정부 서사제가 있다.
해설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가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의정부와 6조를 중심으로 하는 체제에서의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의 운영이 양반중심체제로 흐르는 것을 반영한다. 즉. 조선후기 비변사가 군사적, 경제적 문제 등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전반적으로 도맡아서 처리하자 의정부와 6조는 유명무실해졌고, 비변사를 장악한 일부 세력들이 국가의 권력을 독차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5군영을 통하여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적 방비를 강화하며, 속오군체제를 통해 양반부터 천민에 이르기 까지 군사훈련을 받도록 함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다.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은 각기 조세, 공납,군역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온 제도였다. 이를 통해 당시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해져가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오답풀이
① 붕당정치의 폐단극복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비변사의 강화로 인한 폐단이 더욱 심해져, 조선후기 세도정치기 때 비변사를 통한 폐해가 나타나기도 한다.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영,정조 시기의 탕평정책, 붕당의 뿌리인 서원의 정리, 이조전랑의 권한 약화 등을 들 수 있겠다.
② 백성들의 여론을 정치에 활성화 시키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백성들이 신문고, 상언, 격쟁 등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당한 억울한 일들을 고하였는데, 이러한 신문고, 격쟁, 상언 등은 제약이 있어서 백성들이 자주 활용하진 않았다.
③ 왕권과 신권의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는 “의정부 서사제”를 들 수 있겠다. 이는 6조 직계제와는 반대의 성격으로 6조직계제가 왕권강화를 위한 제도였다면, 의정부 서사제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위한 제도였다.
정답: ④
8. 다음은 울산지역의 신분비율의 변화를 나타낸 표이다.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배경으로 바른 것은? (단위 : %)
시기 | 양반 호 | 상민 호 | 노비 호 |
1729 | 26.29 | 59.78 | 13.93 |
1765 | 40.98 | 57.01 | 2.01 |
1804 | 53.47 | 45.61 | 0.92 |
1867 | 65.48 | 33.96 | 0.56 |
② 소학과 주자가례의 확대 보급
③ 붕당의 일당전제화로 양반 몰락
④ 관권의 강화로 수령과 향리 세력 강화
정답: ①
해설:【난이도 下: 테마71 조선시대 향촌】
상자 안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양반 인구는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감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이유는 상민과 노비가 신분을 상승시켰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들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을까? 신분을 사거나(납속책, 공명첩)이나 전공, 신분 속임(족보 위조) 등이었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② 소학과 주자가례의 확대 보급은 신분 변동과 관계없고 오히려 양반 중심의 신분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③ 붕당의 일당전제화로 양반이 몰락하더라도 몰락양반이 되는 것이지 양반이 몰락한다고 상민이나 노비 신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④ 관권의 강화로 수령과 향리 세력 강화는 조선 후기에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이는 신분 변동의 배경이 아니라 결과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해설
임진왜란이후 정부의 재정 확보 정책으로 실시된 공명첩과 납속책은 점차 널리 확산되어갔다. 납속책은 조선시대 군량(軍糧) 등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거나 또는 흉년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백성에게서 곡물과 돈을 받고 국가가 납속에 응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한 정책으로 납속은 조선 전기부터 있었지만 대상은 노비에게만 국한되었고, 그 액수도 후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액수였고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는 못하였다. 납속이 제도화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모으는 과정에서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궁궐 ·성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재정과 물량을 확보하려고 계속 실시하였다. 공명첩은 1677년(숙종 3) 이후 시행되었던 진휼책(賑恤策)으로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관청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받고 부유층에게 관직을 팔 때 관직명 ·성명을 기입하는 란을 비워놓아 거기에 사람의 이름을 적게하는, 일종의 매관직첩(賣官職帖)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하였다.
오답풀이
② 소학과 주자가례의 확대는 신분제의 변동과 상관이 없다. 소학과 주자가례는 성리학의 수용과 보급에 관련된 책으로 오히려 성리학적인 신분제강화와 관련이 있었으면 있었지 신분제의 변동과는 관련이 없다.
③ 붕당의 일당전제화로 인한 양반의 몰락은 위의 표에 나타난 시기와 관련된 내용인지는 몰라도 전반적인 보기의 내용과는 연관이 없다. 양반의 몰락과 상민, 노비의 호가 줄어드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
④ 관권의 강화로 수령과 향리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이 위의 표에 나타난 현상의 배경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강화된 수령과 향리의 세력이 부농출신으로 “양반”이 된 신향세력과 결합되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정답: ①
해설:【난이도 下: 테마71 조선시대 향촌】
상자 안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양반 인구는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감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이유는 상민과 노비가 신분을 상승시켰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들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을까? 신분을 사거나(납속책, 공명첩)이나 전공, 신분 속임(족보 위조) 등이었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② 소학과 주자가례의 확대 보급은 신분 변동과 관계없고 오히려 양반 중심의 신분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③ 붕당의 일당전제화로 양반이 몰락하더라도 몰락양반이 되는 것이지 양반이 몰락한다고 상민이나 노비 신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④ 관권의 강화로 수령과 향리 세력 강화는 조선 후기에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이는 신분 변동의 배경이 아니라 결과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해설
임진왜란이후 정부의 재정 확보 정책으로 실시된 공명첩과 납속책은 점차 널리 확산되어갔다. 납속책은 조선시대 군량(軍糧) 등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거나 또는 흉년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백성에게서 곡물과 돈을 받고 국가가 납속에 응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한 정책으로 납속은 조선 전기부터 있었지만 대상은 노비에게만 국한되었고, 그 액수도 후기에 비해 상당히 많은 액수였고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는 못하였다. 납속이 제도화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군량미를 모으는 과정에서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궁궐 ·성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재정과 물량을 확보하려고 계속 실시하였다. 공명첩은 1677년(숙종 3) 이후 시행되었던 진휼책(賑恤策)으로 나라의 재정이 곤란할 때, 관청에서 돈이나 곡식 등을 받고 부유층에게 관직을 팔 때 관직명 ·성명을 기입하는 란을 비워놓아 거기에 사람의 이름을 적게하는, 일종의 매관직첩(賣官職帖)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하였다.
오답풀이
② 소학과 주자가례의 확대는 신분제의 변동과 상관이 없다. 소학과 주자가례는 성리학의 수용과 보급에 관련된 책으로 오히려 성리학적인 신분제강화와 관련이 있었으면 있었지 신분제의 변동과는 관련이 없다.
③ 붕당의 일당전제화로 인한 양반의 몰락은 위의 표에 나타난 시기와 관련된 내용인지는 몰라도 전반적인 보기의 내용과는 연관이 없다. 양반의 몰락과 상민, 노비의 호가 줄어드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
④ 관권의 강화로 수령과 향리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이 위의 표에 나타난 현상의 배경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강화된 수령과 향리의 세력이 부농출신으로 “양반”이 된 신향세력과 결합되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정답: ①
9. 다음은 어느 관청에 대한 설명이다. 이와 관련된 학문과 관계가 없는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천문·역수·측후·각루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천변지이를 관측하여 기록하고, 역서를 편찬하며,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고 시간을 관장하던 곳이었다. |
① | |
② | |
③ | |
④ |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下: 테마102 조선시대 과학기술】
위 상자 안의 내용은 천문 관측 기구로서 관상감에 대한 설명이다.
이 문제는 너무 유치하다. 보기들의 사진만 보더라도 금방 정답을 찾아낼 수 있다.
① 청동기 시대의 거울이고
② 신라의 관측기구인 첨성대이며
③ 고려시대 개경에 있었던 관측기구인 첨성대이고
④ 조선시대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관상감에 대한 설명입니다. 관상감은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로서 이 문제에서는 각각의 제시된 그림이 어떤 것인지 정확이 알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②은 신라시대의 첨성대,
③은 고려시대의 첨성대,
④은 조선의 혼천의입니다.
이의 ②,③,④ 모두 천문관측기구로써 문제에서 묻는 천문관측과 관계없는 자료는 ①이 해당합니다.
오답풀이
①은 청동기 시대후기부터 초기 철시시대의 잔무늬 거울로 이것의 다른 이름은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입니다. 이것은 청동기 전기에 사용되었던 거친무늬 거울에 비해 무늬가 다양하고 섬세해졌기 때문에 잔무늬 거울이라고 합니다.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下: 테마102 조선시대 과학기술】
위 상자 안의 내용은 천문 관측 기구로서 관상감에 대한 설명이다.
이 문제는 너무 유치하다. 보기들의 사진만 보더라도 금방 정답을 찾아낼 수 있다.
① 청동기 시대의 거울이고
② 신라의 관측기구인 첨성대이며
③ 고려시대 개경에 있었던 관측기구인 첨성대이고
④ 조선시대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관상감에 대한 설명입니다. 관상감은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로서 이 문제에서는 각각의 제시된 그림이 어떤 것인지 정확이 알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②은 신라시대의 첨성대,
③은 고려시대의 첨성대,
④은 조선의 혼천의입니다.
이의 ②,③,④ 모두 천문관측기구로써 문제에서 묻는 천문관측과 관계없는 자료는 ①이 해당합니다.
오답풀이
①은 청동기 시대후기부터 초기 철시시대의 잔무늬 거울로 이것의 다른 이름은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입니다. 이것은 청동기 전기에 사용되었던 거친무늬 거울에 비해 무늬가 다양하고 섬세해졌기 때문에 잔무늬 거울이라고 합니다.
정답: ①
10. 다음 자료는 2011년 한국으로 귀환된 조선 왕실 의궤와 이를 위해 노력하신 분이다. 이런 사실이 발생되게 된 배경을 보기에서 모두 고르면?
<보기>
㉠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분전하였다.㉡ 사건 직후 척화비 비문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외규장각의 문화재와 서적, 병기 등을 약탈해갔다. ㉣ 어재연의 수비대가 광성보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
② ㉠ ㉢
③ ㉠ ㉡ ㉢
④ ㉠ ㉡ ㉢ ㉣
정답: ③
해설:【난이도 中: 테마114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치】:
시사성 있는 문제로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간 고서(좌측 사진)들을 반환하는데 큰 역할을 한 박병선 박사(우측 사진)에 관련된 문제이다. 병인양요의 배경은 당시 조선정부의 쇄국정책 때문이다.
㉠, ㉡, ㉢은 병인양요(프랑스)와 관련이 깊은 설명이다. 이러한 병인양요와 프랑스의 고서 약탈, 사건 직후 척화비 설치 등의 일련의 과정을 알게 된 박병선 박사는 이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약탈된 도서에 대한 반환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은 신미양요(미국)와 직결된 설명이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프랑스가 병인양요 당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의 의궤와 이 도서의 환수에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박병선 박사의 사진입니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있던 조선왕실 의궤는 병인박해(1866.1)로 인해 발생한 병인양요(1866.8) 당시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에서 근무하면서 발견하게 되면서 반환 요청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993년 TGV 철도수주를 위해 방한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정부간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2010년 11월 G20정상회담에서 5년마다 갱신하여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되어 2011년에 일부가 환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프랑스<르몽드>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전까지 영구 대여를 요청했으나 이명박대통령이 제한된 기간만 갱신 대여하는 쪽으로 양보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이것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에 약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병인양요와 관련된 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로 인해 당시 청에 주둔하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한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가 분전하였습니다.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 군대는 강화읍을 점령하고 병기 및 서적을 약탈(…㉢)하였는데 이 당시 외규장각 도서에 보관중이던 많은 도서가 불타거나 약탈당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척화비’를 만들게 되는데, 척화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여기서 우리는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내용을 통하여 ㉡의 내용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오답풀이
㉣의 어재연은 신미양요 당시의 장수로 어재연의 ‘수(帥)’자기가 미군에 빼앗겼다는 사실만 기억한다면 쉽게 걸러낼 수 있습니다.
정답: ③
해설:【난이도 中: 테마114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정치】:
시사성 있는 문제로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간 고서(좌측 사진)들을 반환하는데 큰 역할을 한 박병선 박사(우측 사진)에 관련된 문제이다. 병인양요의 배경은 당시 조선정부의 쇄국정책 때문이다.
㉠, ㉡, ㉢은 병인양요(프랑스)와 관련이 깊은 설명이다. 이러한 병인양요와 프랑스의 고서 약탈, 사건 직후 척화비 설치 등의 일련의 과정을 알게 된 박병선 박사는 이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약탈된 도서에 대한 반환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은 신미양요(미국)와 직결된 설명이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프랑스가 병인양요 당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의 의궤와 이 도서의 환수에 가장 큰 공을 세우신 박병선 박사의 사진입니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있던 조선왕실 의궤는 병인박해(1866.1)로 인해 발생한 병인양요(1866.8) 당시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에서 근무하면서 발견하게 되면서 반환 요청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993년 TGV 철도수주를 위해 방한한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정부간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2010년 11월 G20정상회담에서 5년마다 갱신하여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되어 2011년에 일부가 환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프랑스<르몽드>지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전까지 영구 대여를 요청했으나 이명박대통령이 제한된 기간만 갱신 대여하는 쪽으로 양보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제에서는 이것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에 약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병인양요와 관련된 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로 인해 당시 청에 주둔하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한 사건으로 조선에서는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가 분전하였습니다.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 군대는 강화읍을 점령하고 병기 및 서적을 약탈(…㉢)하였는데 이 당시 외규장각 도서에 보관중이던 많은 도서가 불타거나 약탈당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척화비’를 만들게 되는데, 척화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여기서 우리는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내용을 통하여 ㉡의 내용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오답풀이
㉣의 어재연은 신미양요 당시의 장수로 어재연의 ‘수(帥)’자기가 미군에 빼앗겼다는 사실만 기억한다면 쉽게 걸러낼 수 있습니다.
정답: ③
11. 다음은 남북한 정부 당사자 간에 공식 합의된 최초의 문서 내용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
② 남북 화해와 상호 불가침의 기본 지침을 정하고 남북교류와 협력 방안을 담았다.
③ 남북한은 서로 내정을 간섭하지 않으며, 호혜 평등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로 하였다.
④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로 신뢰를 도모하였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下: 테마180 통일을 위한 노력】
1991년 12월에 있었던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내용이다. 제1장 남북화해, 제2장 남북불가침, 제3장 남북교류와 협력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① 7·4 남북 공동성명
③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
④ 2000년 6·15 공동선언의 내용이다.
해설
위의 내용은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상호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기본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 이다. 1992년 2월 18~21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기본합의서에 양측 수석대표가 서명함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는 공식적으로 발효되었으며, 당해에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에도 합의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정부 당국자가 처음으로 공식 합의한 문서로 남북한의 정치적, 법적 관계를 규정하는 틀이자, 남북교류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잡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오답풀이
① “자주적 통일과 평화적 통일, 민족적 대단결 도모” 는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통일의 3대 기본 원칙이었다. 1972년 7월4일 남북한 당국이 국토 분단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으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함. 남북한의 대표들은 남북한의 통일과 평화 유지, 교류 및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주한미군문제, 군비축소 문제등 본질적인 문제에서 의견이 어긋나 회담이 깨지고 말았다.
③ 1973년 6월23일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내용으로 한 평화통일 외교 정책을 선언하였다. 총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남북한은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및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고,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
④ 2000년 6월13일~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하여 합의,발표한 “남북공동선언” 의 내용이다. 여기서 남과 북은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해 나가자고 하였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下: 테마180 통일을 위한 노력】
1991년 12월에 있었던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내용이다. 제1장 남북화해, 제2장 남북불가침, 제3장 남북교류와 협력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① 7·4 남북 공동성명
③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
④ 2000년 6·15 공동선언의 내용이다.
해설
위의 내용은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상호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기본 문서인 “남북기본합의서” 이다. 1992년 2월 18~21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기본합의서에 양측 수석대표가 서명함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는 공식적으로 발효되었으며, 당해에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선언에도 합의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한 정부 당국자가 처음으로 공식 합의한 문서로 남북한의 정치적, 법적 관계를 규정하는 틀이자, 남북교류가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을 잡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오답풀이
① “자주적 통일과 평화적 통일, 민족적 대단결 도모” 는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통일의 3대 기본 원칙이었다. 1972년 7월4일 남북한 당국이 국토 분단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으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함. 남북한의 대표들은 남북한의 통일과 평화 유지, 교류 및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주한미군문제, 군비축소 문제등 본질적인 문제에서 의견이 어긋나 회담이 깨지고 말았다.
③ 1973년 6월23일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과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을 내용으로 한 평화통일 외교 정책을 선언하였다. 총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남북한은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및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고, 호혜평등(互惠平等)의 원칙 아래 모든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
④ 2000년 6월13일~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하여 합의,발표한 “남북공동선언” 의 내용이다. 여기서 남과 북은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해 나가자고 하였다.
정답: ②
12. 1980년대 경제 상황의 설명으로 바른 것은?
① 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3저 호황’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② 소비재 중심인 제분, 제당, 면방직 등의 삼백 산업이 발달하였다.
③ 우루과이 라운드의 타결로 쌀 시장과 서비스 시장을 개방하였다.
④ 마산과 익산을 수출자유무역지역으로 선정하여 외자를 유치하였다.
정답: ①
해설:【난이도 中: 테마176 제5공화국】
1980년대의 경제 상황을 물었으므로 1980년 집권한 전두환 정부의 특징에 대해서 찾으면 될 것이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으로 경제성장을 이끈 전두환 정부는 연 평균 12%가 넘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①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
③ 1986년 우루과이에서 첫 회담이 시작되어 19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이 결과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하였다.
④ 1970년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 때 시작된 자유수출무역지구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1979년에 일어난 제2차 석유파동은 전두환 정부가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등의 산업구조조정으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꿀수 있게 되었다. 이 기회는 1986년부터 시작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이어졌다. (1986년~88년까지). 3저호황은 해외원유·외자·수출에 크게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계속해온 한국으로서는 의외의 호기였으며, 이를 통해 86년 이래 3년 동안 연 10% 이상의 고도성장이 지속되었고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게 되었다.
오답풀이
② 소비재 중심인 삼백산업이 발달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때로 한국전쟁이후~1958년때까지의 모습이다. 전쟁후 복구작업은 대부분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미국의 원조는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가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삼백산업은 1950년대 한국 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산업으로 제품이 흰색을 띠는 3가지 밀가루(제분),설탕(제당)·면직물(면방직 공업)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1958년부터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원조가 감소하자 원조는 차관형태로 바뀌기 시작하여 결국 이는 국내 경기의 불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③ 우루과이 라운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제8차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1986년 9월 우루과이에서 첫 회합이 열린 이래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1993년 12월에 타결되었고, 1995년부터 발효되었다. 이로인해 세계무역기구인 WTO가 설립되었다.(1995년)
④ 수출자유무역지역이란, 방책에 의하여 일반 관세 지역에서 분리된 항구의 일정 지역으로서 선박이 관세 수속을 거치지 않고 입항, 화물을 양육, 환적할 수 있으며 세관의 수속 없이 화물을 장치(藏置), 재포장 및 가공하여 재수출할 수 있는 지역을 뜻한다. 마산은 1970년 1월 1일에 착공하여 1971년 3월 12일에, 익산(그 당시는 이리)은 1974년 12월에 착공하여 1993년 10월 17일에 각각 완공하였다. 즉 1970년대의 모습이다.
정답: ①
해설:【난이도 中: 테마176 제5공화국】
1980년대의 경제 상황을 물었으므로 1980년 집권한 전두환 정부의 특징에 대해서 찾으면 될 것이다.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으로 경제성장을 이끈 전두환 정부는 연 평균 12%가 넘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①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
③ 1986년 우루과이에서 첫 회담이 시작되어 19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이 결과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하였다.
④ 1970년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 때 시작된 자유수출무역지구에 대한 설명이다.
해설
1979년에 일어난 제2차 석유파동은 전두환 정부가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등의 산업구조조정으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꿀수 있게 되었다. 이 기회는 1986년부터 시작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의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이어졌다. (1986년~88년까지). 3저호황은 해외원유·외자·수출에 크게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계속해온 한국으로서는 의외의 호기였으며, 이를 통해 86년 이래 3년 동안 연 10% 이상의 고도성장이 지속되었고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게 되었다.
오답풀이
② 소비재 중심인 삼백산업이 발달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기때로 한국전쟁이후~1958년때까지의 모습이다. 전쟁후 복구작업은 대부분이 미국의 원조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미국의 원조는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가 미국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삼백산업은 1950년대 한국 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던 산업으로 제품이 흰색을 띠는 3가지 밀가루(제분),설탕(제당)·면직물(면방직 공업)을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1958년부터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원조가 감소하자 원조는 차관형태로 바뀌기 시작하여 결국 이는 국내 경기의 불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③ 우루과이 라운드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의 제8차 다자간 무역협상으로 1986년 9월 우루과이에서 첫 회합이 열린 이래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 1993년 12월에 타결되었고, 1995년부터 발효되었다. 이로인해 세계무역기구인 WTO가 설립되었다.(1995년)
④ 수출자유무역지역이란, 방책에 의하여 일반 관세 지역에서 분리된 항구의 일정 지역으로서 선박이 관세 수속을 거치지 않고 입항, 화물을 양육, 환적할 수 있으며 세관의 수속 없이 화물을 장치(藏置), 재포장 및 가공하여 재수출할 수 있는 지역을 뜻한다. 마산은 1970년 1월 1일에 착공하여 1971년 3월 12일에, 익산(그 당시는 이리)은 1974년 12월에 착공하여 1993년 10월 17일에 각각 완공하였다. 즉 1970년대의 모습이다.
정답: ①
13. 다음 남북국 시대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을 바르게 묶은 것은?
㉠ 독서삼품과는 골품 위주의 관리 등용을 지양하려는 것이었다. ㉡ 발해는 외교문서에서 발해를 고려로, 발해왕을 고려왕이라 칭하였다. ㉢ 신라는 통일 이후 상대등의 권한이 약화되고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 발해의 수도 이동은 당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 신라의 9서당은 징병에 의해 조직된 국왕에 직속된 특수부대였다. |
② ㉡㉢㉣
③ ㉡㉢㉣㉤
④ ㉠㉡㉢㉣㉤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中: 테마17-20 남북국 시대】
㉣ 발해의 수도 이동은 총 4회로서 그 때마다 정치, 군사 상 다른 이유를 가지고 이동한 것이지 4회의 이동이 모두 당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지문을 읽어봐도 직관적으로 옳은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9서당은 중앙군으로서 징병이 아닌 모병에 의한 특수군으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설
이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부터 살펴보면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4년(788)에 설치된 제도로 관리의 선발과 함께 신문왕 2년(682)에 설치되었던 국학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독서삼품과는 국학의 졸업시험으로 이 제도를 통해 형성된 관료층은 6두품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이전의 골품제 위주의 관리 등용을 지양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묻는 것으로 발해는 스스로 고려국이라 자칭하기도 하였고, 무왕 때 일본에 보낸 국서(727)에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제의합니다. 이 외에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발해 지배층의 다수가 고구려인이라는 것과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 문화와 비슷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문화의 예로는 온돌, 무덤의 모줄임양식 등이 있습니다.
㉢에서 상대등은 화백회의의 주재자로서 귀족을 대표하고, 시중은 집사부의 장관으로 신라의 통일 이후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시중의 권한도 같이 강화 되었습니다. 통일기에는 전제왕권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화백회의의 권한 역시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오답풀이
㉣ - 발해는 총 4번 수도를 옮긴다. ①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742), ②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755), ③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758), ④동경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793)이다. 발해의 수도 이동에는 정치, 군사, 외교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①의 이동에서는 고조(대조영), 무왕 때의 무치시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고, ②당시 중국에서 발생한 안록산의 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③의 수도이동은 신라와의 군사, 정치적 대치 상황과 일본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한 조치로 생각되고 있다.
발해의 수도 이동 당시 당의 상황은 안록산의 난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이 팽창하던 시기라는 설명이 맞지 않다.
㉤ - 서당은 모병에 의해서 조직된 군대로 통일 전부터 있었는데, 신문왕 때 9서당으로 완성되었다. 이들은 왕경(경주)에 주둔하며 국왕에 직속된 특수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통일 이후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 등 피정복민까지도 포함하여 편성된다.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中: 테마17-20 남북국 시대】
㉣ 발해의 수도 이동은 총 4회로서 그 때마다 정치, 군사 상 다른 이유를 가지고 이동한 것이지 4회의 이동이 모두 당 세력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지문을 읽어봐도 직관적으로 옳은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9서당은 중앙군으로서 징병이 아닌 모병에 의한 특수군으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해설
이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먼저 ㉠부터 살펴보면 독서삼품과는 원성왕 4년(788)에 설치된 제도로 관리의 선발과 함께 신문왕 2년(682)에 설치되었던 국학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독서삼품과는 국학의 졸업시험으로 이 제도를 통해 형성된 관료층은 6두품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이전의 골품제 위주의 관리 등용을 지양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묻는 것으로 발해는 스스로 고려국이라 자칭하기도 하였고, 무왕 때 일본에 보낸 국서(727)에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제의합니다. 이 외에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발해 지배층의 다수가 고구려인이라는 것과 발해의 문화가 고구려 문화와 비슷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문화의 예로는 온돌, 무덤의 모줄임양식 등이 있습니다.
㉢에서 상대등은 화백회의의 주재자로서 귀족을 대표하고, 시중은 집사부의 장관으로 신라의 통일 이후의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시중의 권한도 같이 강화 되었습니다. 통일기에는 전제왕권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화백회의의 권한 역시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오답풀이
㉣ - 발해는 총 4번 수도를 옮긴다. ①동모산에서 중경 현덕부(742), ②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755), ③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758), ④동경 용원부에서 상경 용천부(793)이다. 발해의 수도 이동에는 정치, 군사, 외교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①의 이동에서는 고조(대조영), 무왕 때의 무치시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고, ②당시 중국에서 발생한 안록산의 난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③의 수도이동은 신라와의 군사, 정치적 대치 상황과 일본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한 조치로 생각되고 있다.
발해의 수도 이동 당시 당의 상황은 안록산의 난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이 팽창하던 시기라는 설명이 맞지 않다.
㉤ - 서당은 모병에 의해서 조직된 군대로 통일 전부터 있었는데, 신문왕 때 9서당으로 완성되었다. 이들은 왕경(경주)에 주둔하며 국왕에 직속된 특수부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통일 이후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 등 피정복민까지도 포함하여 편성된다.
정답: ①
14. 다음은 고려 전기의 연표이다. 각 시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바르게 모은 것은?
태조 | 성종 | 문종 | 숙종 | 의종 | ||||
(가) | (나) | (다) | (라) |
㉠ (가) : 전시과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 (나) : 압록강 입구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다. ㉢ (다) : 국학의 진흥을 위해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 (라) :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
② ㉡, ㉢
③ ㉢, ㉣
④ ㉠, ㉣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中: 테마38 고려초기 왕들의 업적】
고려시대 왕순서를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가)에 해당되는 군주로는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나)에 해당되는 군주로는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다)에 해당되는 군주로는 순종, 선종, 헌종
(라)에 해당하는 군주는 예종, 인종이 되겠다.
㉠ 전시과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 경종 - (가),
㉡ 압록강 입구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다. - 덕종에서 정종 - (나),
㉢ 국학의 진흥을 위해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 예종 - (라),
㉣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 충렬왕 - 위에 해당사항 없음.
해설
(가)시기는 태조~성종의 시기로 이 사이에 속한 왕은 혜종-광종-경종이 있습니다. ㉠의 전시과가 처음 제정 된 것은 경종 원년(976)의 사실입니다.
(나)의 성종~문종 사이에 속한 왕은 목종-현종-덕종-정종입니다. ㉡의 천리장성은 덕종 2년(1033)에 쌓기 시작하여 정종 10년(1044)에 완성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은 맞는 내용이 됩니다. 고려의 왕계와 각각의 사건이 어느 왕 시기에 일어난 것인지 알고 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다)의 문종~숙종 사이에 속한 왕은 순종-선종-헌종입니다.
(라)의 숙종~의종 사이에 속한 왕은 예종-인종입니다.
위의 왕계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태조-혜조-정종-광종-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의종입니다.
오답풀이
㉢양현고를 설치한 왕은 예종으로 예종 14년(1119)에 설치되었습니다.
예종은 (라)에 속해 있으므로 (다)가 아닌 (라)에 해당해야 맞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원 간섭기인 충렬왕 7년(1281)에 지어진 책으로 고려 전기의 사실이 아닙니다.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中: 테마38 고려초기 왕들의 업적】
고려시대 왕순서를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가)에 해당되는 군주로는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나)에 해당되는 군주로는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다)에 해당되는 군주로는 순종, 선종, 헌종
(라)에 해당하는 군주는 예종, 인종이 되겠다.
㉠ 전시과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 경종 - (가),
㉡ 압록강 입구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다. - 덕종에서 정종 - (나),
㉢ 국학의 진흥을 위해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 예종 - (라),
㉣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였다. - 충렬왕 - 위에 해당사항 없음.
해설
(가)시기는 태조~성종의 시기로 이 사이에 속한 왕은 혜종-광종-경종이 있습니다. ㉠의 전시과가 처음 제정 된 것은 경종 원년(976)의 사실입니다.
(나)의 성종~문종 사이에 속한 왕은 목종-현종-덕종-정종입니다. ㉡의 천리장성은 덕종 2년(1033)에 쌓기 시작하여 정종 10년(1044)에 완성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은 맞는 내용이 됩니다. 고려의 왕계와 각각의 사건이 어느 왕 시기에 일어난 것인지 알고 있다면 쉽게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다)의 문종~숙종 사이에 속한 왕은 순종-선종-헌종입니다.
(라)의 숙종~의종 사이에 속한 왕은 예종-인종입니다.
위의 왕계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태조-혜조-정종-광종-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의종입니다.
오답풀이
㉢양현고를 설치한 왕은 예종으로 예종 14년(1119)에 설치되었습니다.
예종은 (라)에 속해 있으므로 (다)가 아닌 (라)에 해당해야 맞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원 간섭기인 충렬왕 7년(1281)에 지어진 책으로 고려 전기의 사실이 아닙니다.
정답: ①
15. 고려 사회의 정치적 지배세력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논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로 옳지 않은 것은?
고려 지배세력의 근원은 나말여초에 대두한 호족이었다. 고려 초기 사회는 이들 세력의 연합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 정치형태는 호족연합정권이었다. 고려 중기 이후 유교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한 집권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지방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분화되었다. 그 중 일부는 향리층으로 고착화되었고, 중앙 관인화한 세력은 문벌귀족이 되어 고려 중기 이후 고려사회를 이끌어갔다. |
② 음서제는 서양 귀족사회의 습관제(襲官制)와 같이 법제적으로 귀족의 지위를 세습하는 제도였다.
③ 정치제도상 소수의 문벌 귀족이 재상이 되어 그들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다.
④ 귀족들은 왕실이나 유력가문과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가문을 유지하였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上: 테마36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화】
여말의 지방 호족세력은 일부 세력은 향리층으로 고착되었고 중앙 정계에서 권력을 획득한 문벌귀족은 정치적으로 재상 등 관직을 독점하고(③), 경제적으로는 공음전을 지급받아 그 지위를 유지하였으며(①), 사회적으로는 유력가문과 폐쇄적인 혼인(④)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귀족제의 제도적 보장책으로 5품 이상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진출을 보장하였던 음서제에 대해 서양 귀족사회의 습관제(襲官制)와는 다른 것으로, 이 제도는 고위관료에 대하여 단순히 초직(初職)만을 제수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고 해석하였다.
음직을 제수받은 관료는 그 이후 음서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인품에 의해 고관으로 진출하는 것을 보장받았다고 하였다. 결국 고려시대 음서제는 능력이 있거나 국가에 공이 있었던 고위관료에 대한 국가적 보은의 의미로서 그 자제들이 관직진출을 보장하기 위하여 초직을 제수하는 데 그쳤던 것이며, 서양의 귀족제와 같이 여러 대에 걸쳐 관직을 승계하는 제도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해설
위의 논지는 고려사회 “귀족제” 설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이 제시문에서는 고려중기 이후 귀족적 성격을 띠는 관인층의 특징을 설명하는 내용과 다른 점을 고르는 것이 “핵심포인트”이다. 공음전시는 문종때 5품이상의 관료에게 세습되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①
고려 중기에 정치제도상 소수의 문벌귀족이 재상이 되어 그들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는데....③ 고려후기로 들어가면 문벌귀족을 포함한 권문세족이 새로이 형성되어 문벌귀족의 자리를 메우게 된다.
또한 이들은 왕실이나 유력한 가문과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 서로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그들과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했는데, 이를 문벌귀족이라고 했던 것이다....④
즉 고려의 5품이상의 귀족적 성격을 갖는 관료들은 음서제와 공음전시과를 통하여 경제적,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답풀이
②는 음서제와 서양의 습관제를 같은 것으로 연결시킨 것에 대한 오류가 있다. 음서제는 고위관료에 대하여 단순히 초직만을 제수한 데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제 견해로는 이러한 학계에서 아직까지 논의되고 있는 견해를 문제화하기에는 부적절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上: 테마36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화】
여말의 지방 호족세력은 일부 세력은 향리층으로 고착되었고 중앙 정계에서 권력을 획득한 문벌귀족은 정치적으로 재상 등 관직을 독점하고(③), 경제적으로는 공음전을 지급받아 그 지위를 유지하였으며(①), 사회적으로는 유력가문과 폐쇄적인 혼인(④)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였다.
귀족제의 제도적 보장책으로 5품 이상 관료의 자손에게 관직진출을 보장하였던 음서제에 대해 서양 귀족사회의 습관제(襲官制)와는 다른 것으로, 이 제도는 고위관료에 대하여 단순히 초직(初職)만을 제수한 데 불과한 것이었다고 해석하였다.
음직을 제수받은 관료는 그 이후 음서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인품에 의해 고관으로 진출하는 것을 보장받았다고 하였다. 결국 고려시대 음서제는 능력이 있거나 국가에 공이 있었던 고위관료에 대한 국가적 보은의 의미로서 그 자제들이 관직진출을 보장하기 위하여 초직을 제수하는 데 그쳤던 것이며, 서양의 귀족제와 같이 여러 대에 걸쳐 관직을 승계하는 제도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해설
위의 논지는 고려사회 “귀족제” 설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이 제시문에서는 고려중기 이후 귀족적 성격을 띠는 관인층의 특징을 설명하는 내용과 다른 점을 고르는 것이 “핵심포인트”이다. 공음전시는 문종때 5품이상의 관료에게 세습되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으며...①
고려 중기에 정치제도상 소수의 문벌귀족이 재상이 되어 그들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는데....③ 고려후기로 들어가면 문벌귀족을 포함한 권문세족이 새로이 형성되어 문벌귀족의 자리를 메우게 된다.
또한 이들은 왕실이나 유력한 가문과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 서로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그들과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했는데, 이를 문벌귀족이라고 했던 것이다....④
즉 고려의 5품이상의 귀족적 성격을 갖는 관료들은 음서제와 공음전시과를 통하여 경제적,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답풀이
②는 음서제와 서양의 습관제를 같은 것으로 연결시킨 것에 대한 오류가 있다. 음서제는 고위관료에 대하여 단순히 초직만을 제수한 데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제 견해로는 이러한 학계에서 아직까지 논의되고 있는 견해를 문제화하기에는 부적절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답: ②
16. 다음 밑줄 친 ㉠ ㉡ ㉢에 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상민 사이에 있는 중간계층을 중인이라 하였다. 중인에는 ㉠ 좁은 의미의 중인과 ㉡ 넓은 의미의 중인이 있었다. 한편 ㉢ 양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대우를 받았다. |
② 중앙 관청의 서리는 ㉡에 해당되었다.
③ ㉠㉡에게는 문과 응시가 금지되었으나 ㉢에게는 허용되었다.
④ ㉡㉢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청요직에도 오를 수 있었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上: 테마73 조선시대 신분제도】
㉠ 좁은 의미의 중인은 기술관(역관, 의관, 산관 등 잡과 시험에 합격한 관리)을 의미하며 ㉡ 넓은 의미의 중인은 좁은 의미의 중인을 포함하고 그 이외에 서얼, 향리, 서리 등을 의미한다.
① 향리는 넓은 의미의 중인(㉡)에 해당된다.
② 서리는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행정실무나 잡무, 관료의 보조업무에 종사하던 품외(品外)의 직원을 말한다. 아전(衙前)이라고 하며 중앙관서의 아전을 경아전, 지방의 아전은 외아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외아전은 보통 향리라고 부르며 서리의 대표적인 존재는 중앙 관청에서 근무하는 경아전이다. 따라서 ㉡에 해당되었다.
③ 서얼도 문과 응시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④ ㉡은 청요직에 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서얼은 허통운동이 성공하여 1851년 신해허통조치로 청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해설
좁은 의미의 중인은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 의관, 율관, 산관, 화원 등의 기술관원을 총칭하며, 이들은 잡과 시험에 합격해서 선발된 기술관원입니다. 반면에 넓은 의미의 중인은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 중앙의 서리와 지방의 향리, 토관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말합니다.
오답풀이
① 에서 향리는 좁은 의미의 중인이 아닌 넓은 의미의 중인에 포함되기 때문에 옳지 않다.
③ 문과의 응시자격은 신분상 하자가 없으면 누구라도 응시가 가능하였다. 단, 천인과 공상인은 제외되었다.
④ 조선 후기에 청요직에 오를 수 있던 계층은 ㉢의 서얼 계층으로 서얼허통운동을 계기로 박제가, 이덕무 등이 정조 때 등용되었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上: 테마73 조선시대 신분제도】
㉠ 좁은 의미의 중인은 기술관(역관, 의관, 산관 등 잡과 시험에 합격한 관리)을 의미하며 ㉡ 넓은 의미의 중인은 좁은 의미의 중인을 포함하고 그 이외에 서얼, 향리, 서리 등을 의미한다.
① 향리는 넓은 의미의 중인(㉡)에 해당된다.
② 서리는 중앙과 지방관청에서 행정실무나 잡무, 관료의 보조업무에 종사하던 품외(品外)의 직원을 말한다. 아전(衙前)이라고 하며 중앙관서의 아전을 경아전, 지방의 아전은 외아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외아전은 보통 향리라고 부르며 서리의 대표적인 존재는 중앙 관청에서 근무하는 경아전이다. 따라서 ㉡에 해당되었다.
③ 서얼도 문과 응시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④ ㉡은 청요직에 오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서얼은 허통운동이 성공하여 1851년 신해허통조치로 청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해설
좁은 의미의 중인은 중앙의 여러 기술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역관, 의관, 율관, 산관, 화원 등의 기술관원을 총칭하며, 이들은 잡과 시험에 합격해서 선발된 기술관원입니다. 반면에 넓은 의미의 중인은 중앙의 기술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기술관, 그리고 서얼, 중앙의 서리와 지방의 향리, 토관 등 여러 계층을 포괄적으로 말합니다.
오답풀이
① 에서 향리는 좁은 의미의 중인이 아닌 넓은 의미의 중인에 포함되기 때문에 옳지 않다.
③ 문과의 응시자격은 신분상 하자가 없으면 누구라도 응시가 가능하였다. 단, 천인과 공상인은 제외되었다.
④ 조선 후기에 청요직에 오를 수 있던 계층은 ㉢의 서얼 계층으로 서얼허통운동을 계기로 박제가, 이덕무 등이 정조 때 등용되었다.
정답: ②
17. 조선시대에 다음 정책들이 추구한 목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풍흉에 따라 세액을 정하였다. ㉡ 사창제도를 실시하였다. ㉢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다. ㉣ 통공정책을 실시하였다. |
② ㉡은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③ ㉢은 이웃 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것이다.
④ ㉣은 국가의 재정확보를 위한 것이다.
정답: ③
해설: 【난이도 中: 테마75 조선시대 재정과 세법】
㉠ 세종 때의 공법 하의 수등이척법에 대한 설명이다.
㉡ 조선시대 의창제도를 민간에까지 확대한 것이 사창제도이다.
㉢ 오가작통법은 태종 때 민간에 대한 통제책이었다.
㉣ 조선 후기 정조 때의 금난전권 철폐인 신해통공을 말한다.
③ 이웃 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것은 향약제도이며 오가작통법은 다섯 가구를 묶어서 서로 감시 통제하게 한 제도로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였다.
해설
조선시대의 정책으로 ㉠은 공법에 대한 설명이다. 공법은 공평한 조세수취를 위해 연전분 6등, 연분 9등으로 수취를 한 것이다. 1446년 세종이 만든 것으로 당시 최대한 농민들의 생각을 물어서 그들의 요구를 반영한 세종의 애민사상을 엿볼수 있다. 연분 9등법은 당해 풍흉에 따라서 상상20두에서 하하 4두까지 정하였다. 연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에따라서 6등급으로 정한 것이다. 공법이전엔 조세수취를 위해 답험손실법을 마련하여 폐단이 있었는데 세종 때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이를 대신하였다.
㉡의 사창제는 흥선대원군이 환곡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민간에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조선사회의 제도였으며, 사(면)를 단위로 설치, 운영한다고 하여 “사창”이라고 했다. 이를 운영하는 것은 해당 면의 유림, 양반들이 주도하였다.
㉣은 신해통공으로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사상(私商)들에게도 부여한 것인데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특권을 회수하며 세금 확보를 통한 국가의 재정을 늘리려는 정책이었다.
오답풀이
㉢오가작통법은 호구를 밝히면서 범죄자의 색출, 조세징수, 부역의 동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이웃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제도는 ‘향약’을 들 수 있다.
정답: ③
해설: 【난이도 中: 테마75 조선시대 재정과 세법】
㉠ 세종 때의 공법 하의 수등이척법에 대한 설명이다.
㉡ 조선시대 의창제도를 민간에까지 확대한 것이 사창제도이다.
㉢ 오가작통법은 태종 때 민간에 대한 통제책이었다.
㉣ 조선 후기 정조 때의 금난전권 철폐인 신해통공을 말한다.
③ 이웃 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것은 향약제도이며 오가작통법은 다섯 가구를 묶어서 서로 감시 통제하게 한 제도로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제도였다.
해설
조선시대의 정책으로 ㉠은 공법에 대한 설명이다. 공법은 공평한 조세수취를 위해 연전분 6등, 연분 9등으로 수취를 한 것이다. 1446년 세종이 만든 것으로 당시 최대한 농민들의 생각을 물어서 그들의 요구를 반영한 세종의 애민사상을 엿볼수 있다. 연분 9등법은 당해 풍흉에 따라서 상상20두에서 하하 4두까지 정하였다. 연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에따라서 6등급으로 정한 것이다. 공법이전엔 조세수취를 위해 답험손실법을 마련하여 폐단이 있었는데 세종 때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이를 대신하였다.
㉡의 사창제는 흥선대원군이 환곡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민간에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조선사회의 제도였으며, 사(면)를 단위로 설치, 운영한다고 하여 “사창”이라고 했다. 이를 운영하는 것은 해당 면의 유림, 양반들이 주도하였다.
㉣은 신해통공으로 시전상인들의 특권을 사상(私商)들에게도 부여한 것인데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특권을 회수하며 세금 확보를 통한 국가의 재정을 늘리려는 정책이었다.
오답풀이
㉢오가작통법은 호구를 밝히면서 범죄자의 색출, 조세징수, 부역의 동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이웃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제도는 ‘향약’을 들 수 있다.
정답: ③
18.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진 정치 세력의 개혁정책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은 도(道)이고, 자주 변화하여 고정될 수 없는 것은 기(器)이다. 삼강, 오상(五常)과 효제충신을 도라 한다. 요순, 주공의 도는 해와 별처럼 빛나서 비록 오랑캐 지방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다. 무엇을 기라 하는가? 예악(禮樂), 형정(刑政), 복식(服飾), 기용(器用)을 기라 한다. … 진실로 때에 맞고 백성에 이롭다면 비록 오랑캐 법일지라도 행할 수 있다. |
② 전근대적인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려 하였다.
③ 서구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산업을 육성하려 하였다.
④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下: 테마117 개화사상】
상자 안의 사료는 [신기선전집]에 수록된 곽기락의 상소이다. 비록 곽기락은 양반 출신이지만 개화사상가의 모토인 ‘동도서기론’을 주장하였다. 즉, 양반 중심의 신분적 지배체제는 유지하되 발달된 서양의 과학기술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③). 이는 중국의 중체서용이나 일본의 화혼양재와 맥을 같이 한다(①). 동학 농민운동 당시 제기된 개혁안은 당시의 집권자인 개화사상가에 의하여 일부 수용되었다(④).
해설
제시문은 동도서기론에 대한 설명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개화를 추진했던 세력은 온건개화파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로 시행된 개혁은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을 들 수 있다. 온건개화파는 중국의 양무운동을 모방하는 형식의 개혁을 추진하였고, 이에 반해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추구하였다.
오답풀이
②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동학농민운동을 제외한 다른 개혁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한 주장이 나타나지 않아 다른 개혁운동과 동학농민운동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정답: ②
해설: 【난이도 下: 테마117 개화사상】
상자 안의 사료는 [신기선전집]에 수록된 곽기락의 상소이다. 비록 곽기락은 양반 출신이지만 개화사상가의 모토인 ‘동도서기론’을 주장하였다. 즉, 양반 중심의 신분적 지배체제는 유지하되 발달된 서양의 과학기술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③). 이는 중국의 중체서용이나 일본의 화혼양재와 맥을 같이 한다(①). 동학 농민운동 당시 제기된 개혁안은 당시의 집권자인 개화사상가에 의하여 일부 수용되었다(④).
해설
제시문은 동도서기론에 대한 설명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개화를 추진했던 세력은 온건개화파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로 시행된 개혁은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을 들 수 있다. 온건개화파는 중국의 양무운동을 모방하는 형식의 개혁을 추진하였고, 이에 반해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추구하였다.
오답풀이
②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설명이다. 동학농민운동을 제외한 다른 개혁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한 주장이 나타나지 않아 다른 개혁운동과 동학농민운동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정답: ②
19. 다음 ㉠과 ㉡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 청과 조선은 1712년 백두산에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양국의 경계를 정하였다. ㉡ 우산, 무릉 두 섬이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① 현재 중국은 ㉠의 토문강을 자신에 유리하게 쑹화강의 한 지류로 해석하고 있다. |
② ㉡의 우산, 무릉 두 섬의 존재를 통해 조선 전기에 울릉도와 독도의 관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1909년 일본은 ‘간도에 관한 청일협정’을 체결하여 간도영유권을 청에 넘겨 주었다.
④ 일본은 17세기 이래 독도가 일본 소유였다고 주장하면서 1905년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下】
㉠은 청과의 간도 귀속문제(출전: 백두산 정계비)이며 ㉡ 일본과의 독도 문제(출전: 세종실록지리지)로서 모두 영토 문제에 관한 시사성 문제이다.
① 현재 중국은 ㉠의 토문강을 자신에 유리하게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가 아니라 두만강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한 지류인 토문강이라고 해석한다.
해설
㉠은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고, ㉡은 독도에 대한 세종실록 지리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간도문제는 1712년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선을 정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후 1885년 87년 어윤중이 청과 정계비 문제를 회의 했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청과 간도협약을 맺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보장 받는 조건을 대가로 간도를 내어주었다.
오답풀이
①중국은 ㉠의 토문강을 두만강 상류의 석을수로 해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양측이 주장하는 토문강의 위치에 따라 간도의 귀속이 달라지기 때문에 첨예한 문제지만 1909년의 청과 일본과의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현재 중국에 귀속되고 있다.
정답: ①
해설: 【난이도 下】
㉠은 청과의 간도 귀속문제(출전: 백두산 정계비)이며 ㉡ 일본과의 독도 문제(출전: 세종실록지리지)로서 모두 영토 문제에 관한 시사성 문제이다.
① 현재 중국은 ㉠의 토문강을 자신에 유리하게 쑹화강(송화강)의 한 지류가 아니라 두만강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한 지류인 토문강이라고 해석한다.
해설
㉠은 백두산 정계비의 내용이고, ㉡은 독도에 대한 세종실록 지리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간도문제는 1712년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선을 정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후 1885년 87년 어윤중이 청과 정계비 문제를 회의 했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청과 간도협약을 맺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보장 받는 조건을 대가로 간도를 내어주었다.
오답풀이
①중국은 ㉠의 토문강을 두만강 상류의 석을수로 해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상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양측이 주장하는 토문강의 위치에 따라 간도의 귀속이 달라지기 때문에 첨예한 문제지만 1909년의 청과 일본과의 간도협약으로 간도는 현재 중국에 귀속되고 있다.
정답: ①
20.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정치지도자의 활동을 바르게 모은 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의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 마음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도선도 철폐될 수 있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
㉠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이북에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 좌우연합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 모스크가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
② ㉡, ㉢
③ ㉢, ㉣
④ ㉠, ㉣
정답: ④
해설:【난이도 中: 테마160 김구와 이승만】
상자 안의 내용은 김구가 1948년 2월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의 내용이다. 김구는 1945년 11월 입국한 뒤 1945년 12월 있었던 모스크가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 4월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 김구도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반대하였지만 단지 선거에 불참하였지 공산당(남로당)처럼 반대 투쟁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 좌우연합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년 8월)를 조직한 인물은 여운형이다.
해설
위의 지문은 김구가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을때의 내용이다. 이는 1948년 2월 다시 열린 유엔 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김구는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이북에 남북협상을 제안하며, 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8년 4월19일~23일가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규식과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그는 1945년 12월 달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며, 이승만, 우익계열들과 같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오답풀이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한 것은 당시 제주도에 있던 남로당 제주도당 세력으로 이는 곧, “제주 4.3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을 기해서 제주도 전역에 걸쳐 남조선 노동당 계열의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대폭동이었다. 김구,김규식등은 5.10총선거에 반대하여 참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좌우연합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사람은 중도좌파인 여운형이었다. 조선준비위원회는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이다.
정답:④
해설:【난이도 中: 테마160 김구와 이승만】
상자 안의 내용은 김구가 1948년 2월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의 내용이다. 김구는 1945년 11월 입국한 뒤 1945년 12월 있었던 모스크가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반탁운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 4월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
㉡ 김구도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반대하였지만 단지 선거에 불참하였지 공산당(남로당)처럼 반대 투쟁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 좌우연합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년 8월)를 조직한 인물은 여운형이다.
해설
위의 지문은 김구가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을때의 내용이다. 이는 1948년 2월 다시 열린 유엔 소총회에서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김구는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이북에 남북협상을 제안하며, 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1948년 4월19일~23일가지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규식과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그는 1945년 12월 달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며, 이승만, 우익계열들과 같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오답풀이
㉡정부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한 것은 당시 제주도에 있던 남로당 제주도당 세력으로 이는 곧, “제주 4.3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을 기해서 제주도 전역에 걸쳐 남조선 노동당 계열의 좌익분자들이 일으킨 대폭동이었다. 김구,김규식등은 5.10총선거에 반대하여 참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좌우연합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사람은 중도좌파인 여운형이었다. 조선준비위원회는 194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이다.
정답: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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