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9일에 시행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과 같은 상황이 나타난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니, 창고가 텅 비고 나라의 쓰임이 궁핍해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였지만,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이에 원종, 애노 등이 상주에서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①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이 많이 만들어졌다.
②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이 만들어졌다.
③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塔碑)가 유행하였다.
④ 불국토의 이상을 조화롭고 균형있게 표현한 불국사가 건립되었다.
⑤ 정진과 사색하는 모습의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정답) ③

해설)
지문은 신라말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료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수록되어 있다.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지문을 통해 시대상을 유추한 후 보기에 접근해야 한다. 보기는 문화파트로 출제되었다.

③ 신라 말기에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탑비가 유행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승탑과 승려의 일대기를 비에 새겨 세운 탑비는 세련되고 균형감이 뛰어나 이 시기 조형 미술을 대표한다. 이런 승탑과 탑비는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 역량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① 돌무지덧널무덤은 5-6c에 신라에서 주로 만든 무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②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한 설명이다. 통일 신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달에 따라 대량으로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목판 인쇄술과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는 제지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한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쓰여진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을 만큼 품질이 뛰어나다. 이러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의 발달은 통일 신라의 기록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④ 불국사는 신라 중대의 사원이다. 불국사는 불국토의 이상을 조화와 균형 감각으로 표현한 사원이다. 정문 돌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직선과 곡선을 조화시켰으며, 세속과 이상 세계를 구분 짓는 축대는 자연의 선에 인공적으로 맞추어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키고 있다. 복잡하고 단순한 좌우 누각의 비대칭은 간소하고 날씬한 석가탑, 복잡하고 화려한 다보탑과 어울려 세련된 균형감을 살리고 있다.

⑤ 미륵보살은 미래에 부처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로 정해져 있는 보살이다. 지금은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진과 사색에 매진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 반가 사유상은 이런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미륵반가 사유상은 신라 상대에 만들어졌다.


1번. 정답 ③
신라하대 진성여왕때 조세독촉사건에 대한 사료이다. 진성여왕때 중앙으로 세금납부가 이루어지지 않자 왕이 사신을 보내 독촉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발생한 난이 상주(사벌주)의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③ 신라하대에는 선종이 호족과 결탁하여 유행하였다. 선종은 참선과 수행을 강조하여, 조형예술이 쇠퇴하고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부도)와 탑비가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쌍봉사 철감선사탑(팔각원당형)이다.

①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은 신라 상대 마립간시기(4세기 말 ~ 6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신라의 무덤이다.

②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751년(경덕왕 10) 무렵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권자본(木板卷子本)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이다. 1966년 경주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하여 해체했을 때 발견, 함께 발견된 유물들과 함께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④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2. 다음 글을 올린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말년에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니 우둔한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광종(光宗)이 항상 공검절약(恭儉節約)을 생각하고 정사를 처음같이 부지런히 하였다면 어찌 그 녹과 수명이 길지 못하여 겨우 향년 50에 그쳤겠습니까?
① 지방관 파견을 건의하였다.
② 독자적인 연호(年號) 사용을 건의하였다.
③ 도읍(都邑)을 옮겨서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고 하였다.
④ 실천적 기능을 중시하는 신유학을 수용하였다.
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안 10여 조를 제시하였다.


정답) ①

해설)
글을 올린 사람은 최승로이다. 그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서 유교 사상에 입각한 28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중 22조가 전해진다. 문제의 사료는 최승로의 <5조정적평>이다.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① 성종은 먼저 지방관을 파견하고(최승로의 시무 28조의 건의로 파견한 것)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 하였다. 또한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다.
(최승로의 지방관 파견 관련 사료 :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일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으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되는 일과 손해되는 일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통일한 후에 군현에 수령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임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워 시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청컨대 외관을 두소서. 비록 한꺼번에 다 보낼 수는 없더라도 먼저 10여 곳의 주현에 1명의 외관을 두고, 그 아래에 각각 2~3명의 관원을 두어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맡기소서. <고려사절요>)

② 성종은 6두품출신의 유학자로 유교사상에 입각했기에 독자적 연호사용을 건의하지 않았다.

③ 도읍을 옮겨 혁신적인 정치를 주장한 것은 고려시대 대표적으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들 수 있다. 최승로는 천도를 주장한 적이 없다.

④ 실천적 기능을 중시하는 신유학은 고려 말 유입된 성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리학은 최승로와 관련이 없다.

⑤ 신라 진성여왕 때의 최치원 <시무 10조>에 관한 내용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894년에 시무10조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2번. 정답 ①

지문은 최승로가 성종이전의 5명의 임금(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을 평가한 5조정적평이다. 5조정적평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전제정치를 비판하였다.

① 최승로는 시무28조에서 지방관 파견을 건의하였다.(청컨대 외관을 두소서. 비록 한 번에 다 보낼 수 없다 하더라도 먼저 10여 곳의 주현에 한 관청을 두고..) 이에 따라 처음으로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② 최승로는 독자적인 연호 사용을 건의하지 않았다.

③ 도읍을 옮겨서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했던 인물은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였다.

④ 고려 말 충렬왕때 안향에 의해 수입된 성리학(신유학)은, 신진사대부층이 수용하여 사상적기반으로 채택하여, 권문세족과 연결된 불교에 대항토록 하였다.

⑤ 최승로는 시무28조, 최치원이 신라 하대 진성여왕때 시무책 10여조를 올렸다.


3. 다음 상소문이 제기된 시기의 사건으로 가장 근접한 것은?
1. 국왕은 참위설을 믿어 새로 지은 궁궐에 들지 않고 있는데, 길일을 택하여 들어갈 것.

2. 근래 관제에 어긋나게 많은 관직을 제수해 녹봉이 부족하게 됐으니 원제도에 따라 관리의 수를 줄일 것.

3. 근래 벼슬아치들이 공⋅사전을 빼앗아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국가의 수입이 줄고 군사가 부족하게 되었으니, 토지대장에 따라 원주인에게 돌려줄 것.

4. 세금을 거두는데 향리의 횡포와 권세가의 거듭되는 징수로 백성의 생활이 곤란하니 유능한 수령을 파견하여 금지케 할 것.

5. 근래 각 지역의 관리들이 공물 진상을 구실로 약탈 행위를 일삼고 사취하기도 하니 공물 진상을 금할 것. …(하략)…
① 12목을 설치하였다.
② 동명왕편이 지어졌다.
③ 전국을 5도와 양계로 구획하였다.
④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실시하였다.
⑤ 향⋅부곡⋅소를 일반 행정구역으로 바꾸었다.


정답) ②

해설)
상소문은 무신정권 최충헌의 <봉사10조> 이다. 최충헌의 봉사 10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최충헌의 봉사 10조
1. 새 궁궐로 옮길 것
2. 관원의 수를 줄일 것
3. 농민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돌려 줄 것
4. 선량한 관리를 임명할 것
5. 지방관의 공물 진상을 금할 것
6. 승려의 고리대업을 금할 것
7.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8.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9. 함부로 사찰을 건립하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할 것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② 고려 후기에는 민족적 자주 의식을 바탕으로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는 무신정변 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몽골 침략의 위기를 겪은 후에 나타난 변화였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역사서로는 해동고승전,동명왕편,삼국유사,제왕운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① 고려 성종에 대한 설명이다. 983년 성종은 전국에 12목을 설치했다.

③ 현종 시기에 고려 지방제도의 기본 구조가 마련되었는데, 1012년에 절도사혁파. 5도호 75안무사 설치, 1018, 4도호 8목 56지주군사 28진장 20현령을 설치한다. 그리고 예종 시기, 전국 5도에 안찰사를 파견함으로써 5도가 완성된다. 양계는 군사상의 이유(거란과의 전쟁 때문) 성종 때 병마사가 파견되고, 현종 시기, 양계 병마사 확립, 그리고 병마사가 행정 기능 또한 수행하게 된다. 양계는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가장 속현이 적다.

④ 태조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제도를 활용하였다.

⑤ 향 부곡 소를 일반 행정구역으로 재편한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이다. 조선은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하면서 향 부곡 소를 일반 행정에 편입시켰다.


3번. 정답 ②

위 사료는 무신집권기 최충헌이 명종에게 올렸던, <봉사 10조>의 내용이다. 이 문제는 무신집권기 시기문제로 볼 수 있다.

① 12목을 설치한 것은 성종때이다.

② 최씨정권은 문신들을 정계에 진출하게하여, 행정사무를 맡기고 통치에 활용하였다. 이때 등용된 인물이 이규보이다.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동명왕편이 기록되어 있다. 이규보가 26세 되던 해인 명종 23년(1193)에 지은 것으로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중심 소재로 하여 오언(五言)으로 읊은 운문체(韻文體)이다.

③ 현종 때 전국이 5도 양계 4도호부 8목으로 완성되었다.

④ 고려 태조때 호족을 통합하기 위해 사심관제와 기인제도를 실시하였다.

⑤ 고려 시대 특수행정 구역이었던 향⋅부곡⋅소는 공주명학소의 난 이후 폐지되기 시작하여, 조선초에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으로 바뀌었다.(태조)


4. 다음 중에서 고려 초기에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실시된 정책들을 모두 고르면?
가. 상수리 제도
나. 사심관 제도
다. 경재소 설치
라. 노비안검법
마. 기인 제도
① 가, 나
② 다, 라
③ 가, 다, 마
④ 나, 라, 마
⑤ 가, 나, 다, 라


정답) ④

해설)
나. 마 : 사심관과 기인 제도는 고려 태조때 실시한 호족 견제 장치이다.
○ 태조 18년 신라 왕 김부(경순왕)가 항복해 오니,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라 하였다. (김)부로 하여금 경주의 사심(事審)이 되어 부호장 이하의 (임명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이 이를 본받아 각기 자기 출신 지역의 사심이 되었다. 사심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

○ 건국 초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볼모로 삼고, 또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를 기인(其人)이라 한다. <고려사>

라. 956년(광종 7)에 실시한 노비안검법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 위한 법이다.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 더 안정되었다.

가. 통일신라 시대에는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상수리제도는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기인 제도로 이어졌다.

다. 조선시대 향촌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4번. 정답 ④

고려초기에 국왕들은 호족세력을 통제하고, 국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태조, 광종, 성종시기 정책들이 출제 포인트가 되었다.

(나) 사심관제도(태조) - 중앙의 고관을 출신지의 사심관으로 임명하고 중앙에 거주하면서 그 지방의 부호장 이하 관리의 임명권을 지니도록 하였다.

(라) 노비안검법(광종) - 본래 양인이었다가 노비로 된 자를 조사하여 다시 양인으로 해방시킨 것으로, 호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공민을 확대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마) 기인제도(태조) - 지방호족과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뽑아 중앙에 머무르게 하였다.

(가) 상수리 제도(통일신라) - 상수리 제도는 각 주의 지방 세력의 자제들 중 한 명을 뽑아 중앙에 볼모로 와 있게 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고려의 기인, 조선의 경저리 제도와 유사한 제도이다.

(다) 경재소 - 조선 전기에 지방의 유향소를 관할하기 위해 서울에 만들어진 기구. 고려 시대의 사심관을 이은 제도로 조선 태종 때에 처음 설치하였고, 세종 17년(1435)에 체제를 대폭 정비하였음


5. 고려의 토지 분급 제도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하여 세습을 허용하였다.
② 외역전은 관직을 얻지 못한 하급 관리 자제에게 지급하였다.
③ 구분전은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하였다.
④ 개정 전시과는 관직의 고하와 인품을 고려하여 지급하였다.
⑤ 내장전은 중앙과 지방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하였다.


정답) ①

해설) 고려시대 전시과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는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일찍이 태조 때에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토지였다. 경종 때에 공복 제도와 역분전 제도를 토대로 전시과 제도를 만들었다.

④ (시정전시과) 이 때는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기 때문에 운영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전시과를 개정하여 관직만을 고려하여 지급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지급량도 재조정하였다.(개정전시과)
그러나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문종 때에 현직 관료에게만 주도록 다시 조정하였다. (경정전시과)

① 관리에게 보수로 주던 과전과 달리 문벌 귀족의 세습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데,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음서제와 함에 귀족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었다.

② 한인전은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였다. 군인전은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③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내장전을 두었다.

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는 공해전을 지급하여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고, 사원에는 사원전을 지급하였다.


5번. 정답 ①

① 경정전시과때 제정된 공음전은, 5품이상 관리에게 지급되었으며, 영업전으로 세습이 가능하였다.

② 외역전은 향리에게 지급된 토지로, 영업전이다. 하급관리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자제에게 지급한 땅은 한인전이다.

③ 구분전은 하급관리나 군인들이 유가족에게 지급하여 생활대책을 제공하도록 한 것이다.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한 땅은 내장전이다.

④ 시정전시과에서 관직의 고하와 인품을 고려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 개정 전시과에서는 인품기준이 사라지고, 관직의 고하에서만 토지를 지급하였다.

⑤ 중앙과 지방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급한 토지는 공해전이다.


6. 선사시대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구석기 시대에는 뗀석기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찍개, 주먹도끼 등과 같이 하나의 도구를 여러 용도로 사용했으나 점차 자르개, 밀개, 찌르개 등 쓰임새가 정해진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②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돌을 갈아 다양한 모양의 간석기를 만들고, 조리나 식량 저장에 사용할 수 있는 토기를 만들었다.

③ 신석기인들부터는 도구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을 이용하고, 언어를 구사하였다.

④ 청동기 시대에는 일부 지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는 등 농경이 더욱 발달하였다. 농경의 발달에 따라 토지와 생산물에 대한 사유재산 개념이 발생하여 빈부의 차가 생기고 계급이 분화되었다.

⑤ 청동 무기의 보급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계급 분화가 뚜렷해지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인 군장이 등장하였다.


정답) ③

해설)
신석기 시대 이전의 내용이다. 인류는 지혜가 발달하면서 불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어 음식을 익혀 먹었고. 빙하기에도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인류는 사냥과 채집을 통하여 식량을 조달하였고, 시체를 매장하는 풍습을 지니게 되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뼈 도구와 뗀석기를 가지고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처음에는 찍개 같은 도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차츰 뗀석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용도가 뚜렷한 작은 석기들을 만들게 되었다. 이 가운데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등은 사냥 도구이고 긁개, 밀개 등은 대표적인 조리 도구이다.


6번. 정답 ③

③ 구석기인들도 도구인 뗀석기와 골각기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언어를 사용하였다.


7. 고조선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② 고조선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세력을 확대하면서 요령 지방까지 발전하였다.

③ 고조선은 기원전 2세기말 왕을 칭할 정도의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④ 위만조선은 발전된 철기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갔다.

⑤ 고조선의 경제적, 군사적 발전에 불안을 느낀 한 문제는 대규모의 침략을 감행하였다.


정답) ④

해설)
①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단군 왕검이 건국하였다.(B.C. 2333) 단군 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삼국사기에는 고조선 관련 기록이 없다. 

②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③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④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게 되자 유이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 위만은 무리 1000여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선진적인 철기 문화를 소유한 집단의 이주)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B.C. 19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한과 대립하였다.

⑤ 이에 불안을 느낀 한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B.C.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였다.


7번. 정답 ④

① <삼국사기>에는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기록이 없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통해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을 기록하였다.

② 고조선의 영역에 대한 논쟁중 <이동설>이 다수설이다. 이동설의 내용은 고조선이 요서, 요동중심의 요령을 중심으로 성장하다, 한반도내 대동강유역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③ BC. 4세기 전에 연과 함께 왕을 칭하였다.

④ 위만조선은 중국에서 이주한 집단으로, 선진 철기문화를 수용 하여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⑤ 한문제가 아니라 무제가 침략하여,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BC. 108)


8. 고조선의 멸망을 전후하여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건국한 여러 나라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부여는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② 함경도 및 동해안 지역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위치하여 부여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③ 고구려는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 지방에 자리 잡고 활발한 정복전쟁을 통해 한의 군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④ 남부 지방에 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들을 합쳐 삼한이라 한다.

⑤ 변한은 철을 많이 생산하여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으며, 철을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답) ②

해설)
②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아직 연맹 왕국의 단계X, 군장사회에 정체되었음 의미)

①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③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B.C.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약탈 정복 경제)

④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삼한이라 한다.

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곳곳에 저수지의 축조: 김제 벽골제, 상주 공검지)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덩이쇠의 모습)


8번. 정답 ②

②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압박으로 성장하지 못하다가 결국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의 척박한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을 약탈 하였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군장국가 단계에서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9. 고구려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소수림왕은 전진과 수교하여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고, 태학 설립, 불교 수용,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강화하였다.

② 광개토왕 때에는 후연, 거란 등을 격파하여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에서의 지배권을 확대하였으며,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

③ 광개토왕은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였다.

④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마한강 유역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

⑤ 5세기말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방과 요동을 포함한 만주땅을 차지하여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정답) ②

해설)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한 것은 장수왕이다.

②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장수왕의 남하 정책)④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① 고구려 소수림왕때에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을 통해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③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의 왜 격퇴는 사료로 자주 출제된다. 사료를 공부하는 것이 좋다.
(영락) 9년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하였다···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 영락9년: 399년



9번. 정답 ②

② 평양성으로 427년 수도를 천도한 것은 장수왕이다. 장수왕은 개로왕이 북위 효문제에게 국서를 보내어, 고구려 협공을 요구하자 475년 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개로왕을 아차산성에서 패사시켰다.


10. 영조와 정조 시대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영조가 시행한 탕평책은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다.

② 영조는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시대의 변화에 맞게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③ 정조는 왕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④ 정조는 수원 화성의 건설을 통해 개혁의 이상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⑤ 정조는 문물제도의 정비를 위하여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다.


정답) ⑤

해설)
⑤ 조선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지세,인물,풍속,산물,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충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때 편찬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① 영조는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다. 이에 정치 권력은 왕과 탕평파 대신 쪽으로 집중되었다.

② 영조의 속대전은 경국대전을 개정하여 만든 법전이다.
속오례의는 영조의 특명으로 이덕수, 유수원 등이 편찬한 예절서이다.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때 혜경궁 홍씨(한중록의 저자)의 아버지인 홍봉한이 지은 문물제도를
정리한 백과 사전이다.

③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됫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④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됫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화성 행차 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다.


10번. 정답 ⑤

⑤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초기의 지리서로 1481년(성종 12년)에 노사신·양성지 등이 모두 50권으로 편찬해 각 도의 역사·지리·지도·인물·시설 등을 기록했다.


11. 흥선대원군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②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였다.
③ 양반들의 근거지인 향교를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④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⑤ 상민들만 내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정답) ③

해설)
③ 향교가 아니고 서원에 대한 설명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의 전통 사회는 커다란 변화와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무능한 양반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략 세력이 밀려오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와 함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세도 가문의 인물들을 몰아내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였으며, ④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또,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600여 개소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 남긴 채 철폐, 정리하였다. 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①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②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⑤ 또한 흥선대원군은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호포제) 하여,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통상 수교 요구를 거절하는 한편,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받아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겪었지만, 강화도에서 이들을 격퇴하였다. 이후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11번. 정답 ③

③ 흥선대원군은 당쟁의 온상이며, 국가재정을 좀먹던 가장 폐가 많던 화양동 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600여 개소의 서원을 정리하고 도학과 정의에 뛰어난 인물을 봉사하는 47개소만 남겼다.


12. 대한제국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아관파천 이후 정부는 일본의 강요로 급진적으로 추진되었던 갑오개혁의 제도 개혁을 재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②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하였다.

③ 광무개혁은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황제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④ 1899년 제정된 대한국 국제는 대한제국이 만세불변의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⑤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일부 지역에서 양전 사업을 실시하였다.


정답) ④

해설)
④ 대한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황권을 명시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 만에 환궁한 후,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대한 제국을 수립하였다(1897).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 또,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대한 제국 정부가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토지를 조사하여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를 발급하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2번. 정답 ④

④ 고종은 아관(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황제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 1899년 8월 교정소라는 특별입법기구를 통해 9개조에 걸친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였는데, 제 2조에서 대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정치”로 규정하였다.


13. 밑줄 친 이 책은 무엇인가?
이 책은 세조 때에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서거정 등이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역사서이다.
① 동국통감
② 동국사략
③ 동사강목
④ 해동역사
⑤ 고려사절요


정답) ①

해설)
① 우리나라의 전체 역사를 편찬하려는 노력도 계속되어 성종 때에 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서거정 등이 편찬하였다.
동국통감의 편찬과정은 이렇다. 세조는 자주적 입장에서 고대사를 새롭게 재정리하여 '동국통감'이라는 통사의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신숙주·노사신 등은 작업을 계속하여 성종때에 삼국사절요를 완성한다. 성종 15년에 서거정 등이 삼국사 절요와 고려사 절요를 기초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한 것이다.
동국통감은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우리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② 동국샤략은 1403년(태종 3) 8월에 권근 등이 편찬한 사서와 16세기에 박상(朴祥)이 편찬한 동국샤략이 있다.

③ 안정복은 동사강목과 열조통기를 지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각각 서술하는데, 여기서 종래의 중국 중심의 역사파악을 탈피하고 한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웠다.

④ 한치윤은 우리나라 사서와 중국 일본 사서까지 섭렵하여 기전체의 해동역사를 저술하였다.

⑤ 태조 때, 정도전은 고려국사를 편찬하여 고려시대의 역사를 정리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려 하였다. 이후에도 고려 시대의 역사를 자주적 입장에서 재정리하는 작업은 계속되어 15세기 중엽에 기전체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13번. 정답 ①

① 1485년(성종 16)에 서거정 등이 왕명을 받고 신라 초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 세조때 편찬 사업이 시작되었다. 세조가 목표했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1476년에 완성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거의 짜여진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해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1474년에 영의정 신숙주가 편찬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신숙주가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죽음으로써 노사신이 주축이 되어 서거정·이파·김계창·최숙정 등의 도움을 얻어 완성하였다.


14.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명한 것이다. 다음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삼권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이다.
②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김구였다.
③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 연통제를 실시했다.
④ 사료편찬부에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하였다.
⑤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정답) ②

해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을 선포한 우리 민족은 좀 더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독립 전후의 국민 국가 건설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으로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 국내의 한성 정부, 중국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새 정부가 하나로 통합되어 상하이에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출범하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의 헌정 체제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였다. 이러한 헌정 체제는 5차에 걸친 개헌을 통하여 주석,부주석 체제로 개편되었다.

② 1919.9 대통령에는 이승만, 국무총리에는 이동휘로 대통령 국무총리 체제를 표방했다.

③ 초기의 임시 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좀 더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인 임무를 담당해 갔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으로서 군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다.
연통제란 임시 정부가 국내의 독립 운동을 지휘 감독하기 위하여 설치한 비밀 연락 조직으로 국내의 각 도.군.면에 독판. 군감.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④ 대한민국임시정부는 ⑤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고, 임시사과편수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을 간행하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서술하였는데 그는 민족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였다.


14번. 정답 ②

② 1919년 9월 출범한 단일 임정은 1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정부 조직은 명망 있는 인사들이 각료로 기용된 한성임시정부 조직을 계승했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왔으나, 그의 친미 일변도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일었다. 노령임시정부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에 반대해 총리직을 사임했고, 신채호등 민족주의자들도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은 운동노선을 통합하지도, 정부 조직을 정상화하지도 못했다. 그는 무책임하게도 김규식을 총리 서리에 임명한 뒤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15. 다음과 같은 원칙에 합의한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 친일파, 민족 반역자 처리 문제는 장차 구성될 입법 기구에서 처리할 것
①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②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③ 김구, 김규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하였다.
④ 미 군정의 반대와 탄압 속에서 활동하였다.
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반대하였다.


정답) ②

해설)
사료는 좌우합작운동 세력이 제시한 <좌우합작 7원칙>이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중단된 상황에서 분열된 좌우파를 합작 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 시킴으로써 ②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즉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것이다.

④ 미군정도 중도적인 좌우 세력을 결집하여 지지 기반을 넓히려고 한대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좌우익 진영 모두가 일단 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합작의 원칙을 둘러싸고 좌익측은 5원칙, 우익측은 8원칙을 내세우며 팽팽히 맞섰다. 이때 양측은 신탁통치, 토지개혁, 반민족 행위자 처리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차이를 보였다. ③ 우익측은 대표한 김규식과 좌익측을 대표한 여운형은 양측의 주장을 절충하여 좌우합작 위원회 이름으로 합작 7원칙을 발표했으나, ① 양진영 모두 불만을 표시했다.


15번. 정답 ②

1947년 10월에 발표된 좌우합작 7원칙의 내용이다.

① 박헌영(조선공산당)등 좌익세력은 좌우합작운동을 반대하였다.

② 1946년 3~5월 개최되었던 1차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6월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세우는데 위기감이 들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통합된 정부를 구성하기 위하여 중도 좌파(여운형), 중도 우파(김규식과 안재홍)가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다.

③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이 주도하였다.

④ 미군정은 한반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였다.

⑤ 좌우합작운동 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안을 수용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주장하였으며, 한반도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16. 고려시대의 금속활자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금속활자는 한 번 만들면 여러 종류의 책을 쉽게 찍을 수 있었다.
② 고종 21년(1234)에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다.
③ 프랑스에 있는 『직지심체요절』은 청주 용두사에서 간행했다.
④ 공양왕은 서적원을 설치하여 활자의 주조와 인쇄를 맡게 했다.
⑤ 『직지심체요절』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시기가 앞선다.


정답) ③

해설)
③ 직지심체요절은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
신라 때부터 발달한 목판 인쇄술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대장경의 판목은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① 그러나 목판 인쇄술은 한 종류의 책을 다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여러 가지의 책을 소량으로 인쇄하는 데는 활판 인쇄술보다 못하였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활판 인쇄술의 개발에 힘을 기울였으며 후기에는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고려 시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것은 목판 인쇄술의 발달, 청동주조 기술의 발달, 인쇄에 적당한 잉크와 종이의 제조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는 이미 금속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었으리라고 추측되며, 몽고와 전쟁 중이던 ② 강화도 피난 시에는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12세기 인종 때 최윤의 등이 지은 의례서인데 강화도로 천도할 때 예관이 가지고 오지 못하여 최우가 보관하던 것을 강화도에서 금속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였다)을 인쇄하였다(1234), 이는 서양에서 금속 활자 인쇄가 시작된 것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③ 그 대신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1377)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 받고 있다.
④ 공양왕 4년(1392) 정월에 서적원이 생기고 금속 활자 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영과 승의 직책까지 마련되었다.


16번. 정답 ③

③ 직지심체요절은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서 우왕 3년(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으나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7. 고려의 대외 문물교류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고려와 가장 활발하게 교역을 한 나라는 거란이었다.
② 고려의 북진정책으로 인해 여진과의 교류는 없었다.
③ 대식국인으로 불린 아라비아 상인들은 주로 요를 거쳐 고려와 교역하였다.
④ 고려는 송으로부터 비단, 약재, 책, 악기 등을 수입하였다.
⑤ 대외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청해진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정답) ④

해설)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①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는 서해안의 해로를 통하여 송에서 ④ 왕실과 귀족의 수요품 비단, 약재, 책, 악기를 수입하는 대신에 종이,인삼 등 수공업품과 토산물을 수출하였다.

② 여진과도 교류했다. 거란과 여진은 은을 가지고 와서 농기구,식량 등과 바꾸어 갔다. 일본은 11세기 후반부터 내왕하면서 수은,황 등을 가지고 와 식량,인삼,서적 등과 바꾸어 갔다.

③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대식국인이라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에 직접 들어와서 수은, 향료, 산호 등을 팔았다. 이들을 통하여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번. 정답 ④

① 고려의 대외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대송무역이었다.

② 여진 등 북방민족과도 무역이 이루어 졌다.

③ 아라비아(대식국)상인과는 중국을 거쳐 무역(수은, 향료, 물감, 산호, 호박 등을 가져옴)을 했는데 이들의 왕래를 통해 고려(Corea)라는 이름이 서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④ 고려는 송의로부터 귀족의 사치품인 비단, 약재, 서적, 활자, 자기를 수입하고, 원료와 수공업품인 금, 은, 인삼, 종이, 먹, 나전칠기, 화문석을 수출하였다.

⑤ 청해진은 신라하대 장보고가 흥덕왕때 설치한 무역기지이다. 고려시대 국제 무역항은 수도근처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이다.


18. 조선 전기 왕의 정책과 관련된 설명이다. 다음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태조 때에는 정도전 등 공신들의 주도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
②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왕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③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왕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였다.
④ 세조는 즉위 후 단종 이후 재상에게 넘어간 정치 실권을 되찾기 위해 다시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⑤ 성종은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반포하였다,


정답) ③

해설)
③ 의정부 서사제란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들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세종은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① 건국 초에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왕권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한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조준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정도전의 정치 사상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②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도평의사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두면서 그 정치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정치 업무를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왕에게 올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게 하는 6조직계제를 채택하였다.

④ 세종 이후 병약한 문종이 일찍 죽고(29년 세자-8년 세종 섭정)39세) 나이 어린 단종(12세)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넘어갔다. 이에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직계제로 고쳤다. 또한 공신이나 언관들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집현전을 없애고, 경연도 열지 않았으며, 그동안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마무리하여 반포함으로써 이후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8번. 정답 ③

③ 세종은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였다. 모든 국무를 6조가 의정부를 통하여 왕에게 올리는 왕권견제제도이자 재상중심의 정치제도로, 왕권과 신권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19. 조선 전기 경제 정책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은 유교적 민본 정치의 핵심이 되는 민생 안정을 위하여 농본주의 정책을 펼쳤다.

② 조선 전기에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상공업 활동을 권장하여 사회발전을 꾀하였다.

③ 조선 초에는 국가 재정의 기반이 되는 수취 체제를 정비하여 양인으로부터 전세와 공납을 징수하고 역을 징발하였다.

④ 세종 때 전분 6등법, 연분 9등법을 실시하여 전조(田租)를 토지의 비옥도나 풍흉에 다라 차등 징수하였다.

⑤ 관리는 수조권을 가진 과전을 지급받았는데, 관리가 죽으면 반납해야 했다.


정답) ②

해설)
① 조선은 고려 말의 파탄된 국가 재정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위민, 애민을 중요하게 여기는 왕도 정치 사상에서 민생 안정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조선은 억상정책을 펼쳐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을 규제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 간의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③ 조선의 수취 제도는 토지에 부과되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되는 공납,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되는 군역과 요역 등이 있다. 이것은 국가 재정의 토대를 이루었다.

④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⑤ 고려 말에 만들어진 과전법은 국가의 재정 기반과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전직관리에게도 토지 지급)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흘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19번. 정답 ②

② 조선 전기 정부는 경제정책에 있어 중농억상 정책을 써서, 산업의 근본인 농업을 일차적으로 장려하고, 상업은 억제하려 하였다. 이는 상업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상업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20. 조선의 성리학에 대한 다음 설명 중 옳은 것은?
① 조선에 들어온 성리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를 강조하는 사상이다.

② 서원은 주세붕이 성리학을 도입한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③ 이이는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④ 이황은 이이에 비해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성격을 지녔다.

⑤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정답) ⑤ 

해설)
① 동학에 관한 설명이다.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주장을 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② 최초의 서원은 1543년 중종 2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모시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며, 이것이 뒤에 이 지방의 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주청에 의해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아 소위 사약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③ 이황에 대한 설명이다. 이황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④ 이이에 대한 설명이다.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의 저술에서 이이는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형성되고 그 뒤에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에 사림들이 중앙 정계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함에 따라 각 학파를 기반으로 하여 정파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광해군 때에 북인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동법의 시행과 은광 개발 등 적극적인 사회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으며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을 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이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한 결과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 각 학파들은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 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20번. 정답 ⑤

①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川)사상이다.

② 백운동 서원은 고려말 충렬왕때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③ 이이가 아니라 이황에 대한 설명이다.

④ 이황이 아니라 이이에 대한 설명이다. ⑤ 16세기 이황과 이이에 의해서 성리학의 연구가 심화 되면서 주리론, 주기론과 같은 학설이 성립되었고, 이들 성리학파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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