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9월 1일에 시행한 총무처(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고려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A. 고려 시대에는 봉작제가 존재했으나, 작위의 유무가 귀족 신분과 하층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지는 않았다.
B. 과거제는 능력별 관리 선발 제도로서 문벌 출신들의 신분 유지에는 장애 요인이 되었다.
G. 음서 출신들은 고위 관직에 진출하기 어려웠다.
M. 고려의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 등은 신분적 차등이 없어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교육하였다.
A:고려 시대에는 봉작제가 존재하였으나, 서양의 봉작제처럼 작위가 상속되지도 않았고, 작위 유무가 귀족 신분과 하층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되지도 않았다. 고려 봉작제의 대상이 된 왕족은 왕자, 부마, 왕비의 부(父)였다.
B․G:고려 시대에는 과거제를 통해서만 관리로 등용된 것이 아니라 음서라 하여 고관 자제는 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되는 제도가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이 음서제가 일반화되어 귀족의 자제들은 음서를 통해 관리로 임명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공신 및 5품 이상의 고위 관료 자손은 이에 의해 관직에 나아가고 승진에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 음서제는 고려 문벌 귀족 사회를 강화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M:고려 시대 국자감에서의 교육 분야는 국자학․태학․사문학 및 율학․서학․산학으로 구성되었다.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 자제에게 각각 입학 자격이 주어졌고 여기서는 모두 유학을 교육하였다. 이에 대해 율․서․산학 등의 잡학에는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이 입학하였다. 잡학에 대한 유학의 우위와 입학 자격의 신분에 따른 제한 규정은 고려의 유교적 귀족 사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B․G:고려 시대에는 과거제를 통해서만 관리로 등용된 것이 아니라 음서라 하여 고관 자제는 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되는 제도가 있었다. 고려 시대에는 이 음서제가 일반화되어 귀족의 자제들은 음서를 통해 관리로 임명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공신 및 5품 이상의 고위 관료 자손은 이에 의해 관직에 나아가고 승진에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 음서제는 고려 문벌 귀족 사회를 강화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M:고려 시대 국자감에서의 교육 분야는 국자학․태학․사문학 및 율학․서학․산학으로 구성되었다.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 자제에게 각각 입학 자격이 주어졌고 여기서는 모두 유학을 교육하였다. 이에 대해 율․서․산학 등의 잡학에는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이 입학하였다. 잡학에 대한 유학의 우위와 입학 자격의 신분에 따른 제한 규정은 고려의 유교적 귀족 사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삼국 시대 불교 신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A. 삼국 모두 불교를 처음 받아들이는 데 왕실이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B. 현세 구복적이기보다 내세적 성격이 강하였다.
G.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M.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종파는 계율종이었다.
B:삼국 시대 불교 신앙은 토착 신앙을 토대로 민간 신앙과 결합되어 내세적 성격보다는 현세 구복적 성격이 강하였다.
A:삼국에 있어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삼국의 왕실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한 이유는, 불교가 고대 국가 통치의 일원적인 사상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G:불교의 수용은 사상적 통일을 가져와 고대 국가 완성에 공헌하였으며 왕권의 신장과 사회의 지도 원리가 되었다. 삼국 시대에 호국 사상이 나타나 있는 인왕경이 널리 읽힌 것이나, 진흥왕 때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된 것, 백좌 강회가 열리게 된 것 등은 호국 불교의 성격을 반영해 준다.
M:삼국 시대에 가장 중요한 종파는 계율종이었다. 백제의 겸익이나 신라의 자장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며, 특히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의 불교를 총관하였다. 승려들이 지켜야 할 생활 기준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를 통한 인심의 통일이라는 정치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A:삼국에 있어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삼국의 왕실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한 이유는, 불교가 고대 국가 통치의 일원적인 사상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G:불교의 수용은 사상적 통일을 가져와 고대 국가 완성에 공헌하였으며 왕권의 신장과 사회의 지도 원리가 되었다. 삼국 시대에 호국 사상이 나타나 있는 인왕경이 널리 읽힌 것이나, 진흥왕 때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된 것, 백좌 강회가 열리게 된 것 등은 호국 불교의 성격을 반영해 준다.
M:삼국 시대에 가장 중요한 종파는 계율종이었다. 백제의 겸익이나 신라의 자장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며, 특히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의 불교를 총관하였다. 승려들이 지켜야 할 생활 기준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를 통한 인심의 통일이라는 정치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3. 조선 시대 국정 기록의 보존을 위한 노력과 관계가 적은 것은?
A. 사고(史庫)
B. 사초(史草)
G. 조선 왕조 실록(朝鮮王朝實錄)
M. 유향소(留鄕所)
M.유향소:조선 시대의 지방 자치 기관으로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고문 기관이었다.
※조선 왕조 실록
1.실록 편찬의 의의:한 왕대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실록 편찬은 국가의 큰 관심사였다. 실록은 태종 때 태조 실록이 편찬된 이래로 역대왕의 실록이 차례로 편찬되었는데, 날짜별로 그 날의 중요한 사건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어 조선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문화 수준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2.내용:태조(太祖)부터 철종(哲宗)까지 25대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編年體)로 쓴 책으로, 태종 13년(1413)에 하륜(河崙) 등에게 명하여 태조 실록을 처음으로 편찬한 이래 역대왕의 실록이 차례로 편찬되었다. 각 왕의 실록은 서울 춘추관․충주․성주․전주 등 4대 사고(四大史庫)에 비치했다.
3.편찬 방법:왕의 사후 춘추관 내에 실록청(實錄廳)을 두고 사관의 사초(史草)를 기준으로 하여 승정원 일기․의정부 등록․비변사 등록․일성록․시정기 등을 보조 자료로 하여 편찬하였다. 특히, 광해군과 연산군 때는 일기(日記)로 표시되었고, 일단 편찬된 실록을 때에 따라 수정(修正)․개수(改修)하는 경우가 있었다.
4.사고(史庫)의 정비:세종 때 4대 사고를 정비하여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만 존속하여 광해군 때 5대 사고에 보관하였고, 현재 전하는 것은 태백산 사고본과 정족산 사고본뿐이다.
※조선 왕조 실록
1.실록 편찬의 의의:한 왕대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실록 편찬은 국가의 큰 관심사였다. 실록은 태종 때 태조 실록이 편찬된 이래로 역대왕의 실록이 차례로 편찬되었는데, 날짜별로 그 날의 중요한 사건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어 조선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문화 수준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2.내용:태조(太祖)부터 철종(哲宗)까지 25대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編年體)로 쓴 책으로, 태종 13년(1413)에 하륜(河崙) 등에게 명하여 태조 실록을 처음으로 편찬한 이래 역대왕의 실록이 차례로 편찬되었다. 각 왕의 실록은 서울 춘추관․충주․성주․전주 등 4대 사고(四大史庫)에 비치했다.
3.편찬 방법:왕의 사후 춘추관 내에 실록청(實錄廳)을 두고 사관의 사초(史草)를 기준으로 하여 승정원 일기․의정부 등록․비변사 등록․일성록․시정기 등을 보조 자료로 하여 편찬하였다. 특히, 광해군과 연산군 때는 일기(日記)로 표시되었고, 일단 편찬된 실록을 때에 따라 수정(修正)․개수(改修)하는 경우가 있었다.
4.사고(史庫)의 정비:세종 때 4대 사고를 정비하여 실록을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만 존속하여 광해군 때 5대 사고에 보관하였고, 현재 전하는 것은 태백산 사고본과 정족산 사고본뿐이다.
4. 동학 농민 운동(1894년)이 추구한 개혁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은?
A. 부세 제도를 개혁하여 삼정 문란을 바로잡고, 부정의 근원이 되는 각종 잡세를 폐지하려 하였다.
B. 지주 제도를 개혁하고 두레법을 장려하여 소농․빈농층의 경제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G.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민주적인 지방 자치를 실시하였다.
M. 중앙과 지방에서 부정한 관리를 숙정하고 입헌 군주제를 실시하려 하였다.
M:갑신정변 때 개화파는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는 정치 개혁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 때 폐정 개혁안에서는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유림들의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을 요구하였고,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무명 잡세의 폐지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며 봉건 체제에 반대하였으나 입헌 군주제의 실시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5.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는 불법 행위를 자행한 시점은?
A. 청․일 전쟁 시기
B. 러․일 전쟁 시기
G. 통감부 설치 시기
M. 합방 조약 체결 시기
B:일제는 러․일 전쟁중인 광무 9년(1905)에 울릉도의 속도인 독도를 불법적․강제적으로 약탈하여 다케시마[竹島]라 하고 일본에 편입시키는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6. 발해는 신라와 ‘남북국 시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발해사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A. 양국은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B. 발해와 신라는 계속하여 적대 관계에 있었다.
G. 발해는 지금의 함흥에서 덕원을 거치는 ‘신라도’를 통하여 신라와 물자를 교류한 것으로 보여진다.
M. 발해사를 처음으로 우리 민족사의 연장으로 보려 하였던 것은 유득공의 「발해고」이다.
B:발해는 당, 신라의 협공으로 인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신라와는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대립 관계는 당을 사이에 두고 문화적인 우월 경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당의 견제 정책에 의하여 이 같은 상황은 더욱 조장되었다. 즉, 당에 간 발해와 신라의 사신이 서로 상석에 앉기를 다투거나, 빈공과의 합격자 서열을 문제삼음으로써, 두 나라 간의 경쟁은 격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 발해와 신라는 사신을 교환하였고, 무역을 하였으며, 발해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에는 신라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발해에서 신라로 왕래하던 신라도는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7.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에 대하여 옳게 설명한 것은?
A. 과거는 5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
B. 무과가 설치되었으나 처음부터 하층민의 진출로로 변하였다.
G. 양인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M. 지방의 향리 임용을 위해 잡과가 운용되었다.
G:양인은 법제상 과거 응시의 제한을 받지 않았으므로 원칙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은 있었으나, 교육의 기회가 없었고 경제상의 문제 등으로 현실적으로는 거의 응시가 불가능하였다.
A:과거는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수시로 행해졌다.
B:무관 시험 응시자의 신분적 제한은 문과에 비해 약하였으며, 후에 제도가 해이해지면서 하층민의 관계 진출로로 변하였다.
M:조선 시대 과거에 있어서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분야가 있어서 사역원, 형조,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관서의 특수 기술관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기술학의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맡았다. 무과와 잡과 응시자에는 서얼, 향리 등 중간 계층이 많았다.
A:과거는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 외에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수시로 행해졌다.
B:무관 시험 응시자의 신분적 제한은 문과에 비해 약하였으며, 후에 제도가 해이해지면서 하층민의 관계 진출로로 변하였다.
M:조선 시대 과거에 있어서 잡과에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의 네 분야가 있어서 사역원, 형조,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관서의 특수 기술관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기술학의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맡았다. 무과와 잡과 응시자에는 서얼, 향리 등 중간 계층이 많았다.
8. 청동기 시대에 농경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A. 농경에 소나 말 등의 축력을 이용하였다.
B. 주로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기장․조․수수․벼 등을 재배하였다.
G. 청동으로 제조된 농기구가 사용되면서 신석기 시대에 비해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다.
M. 가족 단위의 독립적 농경이 발전하면서 토지 사유가 확립되어 갔다.
B:청동기 시대에는 구릉 지대에 살면서 농업을 주로 하였다. 북한 지역에서는 기장․수수․조 등이 발견되었고, 남한에서는 벼․보리․수수․조 등이 발견되었다.
9. 일제하의 민족 해방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A. 문화 통치 기간중에 좌우의 사상적 대립이 나타났다.
B. 신간회 운동은 민족 독립을 제일 목표로 한 좌우 연합의 운동이다.
G. 해외 독립 운동은 분산적으로 수행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M. 자치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이었다.
M:3․1 운동 후 민족 해방 운동의 열기를 식히고 더 많은 친일파를 양성한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 정책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문화 운동․자치 운동 등 개량주의 운동을 주창하였다. 문화 정치를 표방한 일본은 민족 운동의 방향을 문화 운동으로 유도하기 위해 종교 운동․수양 운동․사교 운동․생활 개선 운동․농촌 계몽 운동 등을 적극 장려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그 일부가 자치론에 동조하여 절대 독립론에서 한걸음 물러서는 등 일제와 타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계열과의 연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6․10 만세 계획의 실패로 붕괴 직전에 있던 사회주의 계열에서도 민족주의 계열과의 타협에 응하여 신간회가 성립되었다.
10. 3․1 운동 이후 일제의 친일파 양성책과 관계없는 것은?
A.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여 이들을 각 단체에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든다.
B. 친일파를 각종 종교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 고문을 앉혀 어용화한다.
G.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 단체를 만들어 국유림 일부를 불하하고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이용한다.
M. 노동 쟁의, 소작 쟁의를 일으키게 하여 계급 대립을 조장시킨다.
M:노동 쟁의, 소작 쟁의는 일제에 대항하여 우리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일으킨 경제적 저항 운동이었다. 이는 일제의 수탈에 반대하는 반제․반일 투쟁, 항일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일제의 친일파 양성책:3․1 운동 직후 폭탄 세례를 받으며 부임한 총독 사이또오(1858~1936)는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을 구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친일파 양성책을 고안했다.
1.일본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로써 관리(官吏)를 강화한다.
2.신명(身命)을 바칠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고 이들을 귀족․양반․유생․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든다.
3.각종 종교 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혀 어용화한다.
4.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친일적 지식인을 대량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양성한다.
5.양반․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만들어 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 정찰에 이용한다.
6.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 쟁의․소작 쟁의를 통해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또 일본 자본을 도입해 그것과 연계를 맺도록 해 매판화시켜 일본측에 끌어들인다.
7.농민을 통제 조정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 단체 교풍회(矯風會)․진흥회(振興會)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주는 한편 입회권(入會權,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일제의 친일파 양성책:3․1 운동 직후 폭탄 세례를 받으며 부임한 총독 사이또오(1858~1936)는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을 구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친일파 양성책을 고안했다.
1.일본에게 절대 충성을 다하는 자로써 관리(官吏)를 강화한다.
2.신명(身命)을 바칠 친일적 인물을 물색하고 이들을 귀족․양반․유생․부호․실업가․교육가․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든다.
3.각종 종교 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혀 어용화한다.
4.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친일적 지식인을 대량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양성한다.
5.양반․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만들어 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 정찰에 이용한다.
6.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 쟁의․소작 쟁의를 통해 노동자․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또 일본 자본을 도입해 그것과 연계를 맺도록 해 매판화시켜 일본측에 끌어들인다.
7.농민을 통제 조정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 단체 교풍회(矯風會)․진흥회(振興會)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주는 한편 입회권(入會權,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11. 공민왕의 개혁 정책과 관계없는 것은?
A. 자제위를 설치하였다.
B. 권문 세족의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정방을 폐지하였다.
G. 기철 등 부원 세력을 숙청하였다.
M. 쌍성 총관부를 점령․수복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
1.몽고풍의 폐지와 관제의 복구:원의 연호, 풍습과 몽고식 관제를 폐지하여 2성 6부제로 복구하였다.
2.친원 귀족 숙청:기철(奇轍) 등 원의 앞잡이를 숙청하였다.
3.쌍성 총관부 회복:인당(印璫)으로 하여금 8참을 빼앗게 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쌍성을 치게 하여 98년만에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회복했다(1356).
4.정동행성 폐지:내정 간섭 기관인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1356).
5.요동 공격:인당, 최영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략하게 하였다.
6.정방 폐지:무신 정권의 유물인 정방을 폐지하고 문관의 인사권을 이부(吏部)로 환원하였다.
7.전민변정도감의 설치: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1366)한 후 토지․노비제의 개혁을 단행하여 권문 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등 토지와 노비의 정리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몽고풍의 폐지와 관제의 복구:원의 연호, 풍습과 몽고식 관제를 폐지하여 2성 6부제로 복구하였다.
2.친원 귀족 숙청:기철(奇轍) 등 원의 앞잡이를 숙청하였다.
3.쌍성 총관부 회복:인당(印璫)으로 하여금 8참을 빼앗게 하고, 유인우(柳仁雨)로 하여금 쌍성을 치게 하여 98년만에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회복했다(1356).
4.정동행성 폐지:내정 간섭 기관인 정동행성을 폐지하였다(1356).
5.요동 공격:인당, 최영으로 하여금 요동 지방을 공략하게 하였다.
6.정방 폐지:무신 정권의 유물인 정방을 폐지하고 문관의 인사권을 이부(吏部)로 환원하였다.
7.전민변정도감의 설치: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1366)한 후 토지․노비제의 개혁을 단행하여 권문 세족에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등 토지와 노비의 정리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 신라 하대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실만을 골라 묶은 것은?
㉠ 대외 무역은 사무역 대신에 공무역이 크게 성행하였다. ㉡ 불교는 교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 귀족들은 막대한 사병을 소유하고 왕위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 지방 호족 세력이 대두하여 중앙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
B. ㉡, ㉢
G. ㉡, ㉣
M. ㉢, ㉣
㉠:신라 하대에는 공무역보다 사무역이 크게 성행하였다.
㉡:신라 하대에는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면서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신라 하대에 귀족들은 막대한 사병을 소유하고 왕위 쟁탈전을 전개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진골 귀족들의 극심한 자기 항쟁으로 결국 골품제는 붕괴되어 갔다.
㉣:신라 하대에는 호족․해상․군진 세력이 새롭게 대두되었는데, 중앙 지배력의 약화를 계기로 성장한 호족 세력은 지방의 막대한 농장과 사병을 소유하고 지방 행정을 장악하였다.
㉡:신라 하대에는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면서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신라 하대에 귀족들은 막대한 사병을 소유하고 왕위 쟁탈전을 전개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진골 귀족들의 극심한 자기 항쟁으로 결국 골품제는 붕괴되어 갔다.
㉣:신라 하대에는 호족․해상․군진 세력이 새롭게 대두되었는데, 중앙 지배력의 약화를 계기로 성장한 호족 세력은 지방의 막대한 농장과 사병을 소유하고 지방 행정을 장악하였다.
13. 조선 철종 때에 발생한 임술민란(1862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A. 농민층 분화가 진전된 지역을 중심으로 삼정 문란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B. 도결(都結)의 혁파와 동포제(洞布制)의 실시가 요구되었다.
G. 소농․빈농이 주류를 이루는 소민(小民)들이 부호나 양반 지주를 공격한 경우가 많았다.
M. 지주 제도를 개혁하고 신분 제도를 폐지할 것이 요구되었다.
M:세도 정치의 전개와 농촌 경제의 파탄, 극심한 삼정 문란, 지배층의 학정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대표적 민란인 홍경래의 난(1811)과 임술민란(1862) 때의 요구 사항은 대부분 수취 체제의 개선과 학정의 금지, 세도 정치의 부패에 대한 비판 등이었으며 신분제의 폐지를 요구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분제의 폐지는 근대 사회에 들어서서 개화파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요구되다가 갑오개혁 때 실현되었다.
14. 조선 시대 향교(鄕校)를 바르게 설명한 것은?
A. 교육적 기능은 기술관의 양성에 있었다.
B. 지방에 설치한 관학으로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G. 건물은 명륜당, 동서 양제(東西兩齊)로 구성되어 있었다.
M. 과거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사설 강습소였다.
B:조선 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치한 관학으로, 서당에서 초보적 한문과 유학을 익힌 이들은 15~16세가 되면 중앙에서는 4학(4부 학당),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기술 교육 기관을 별도로 두고 기술관을 양성하였다.
15. 4월 혁명 기간(1960년 2월~1961년 5월) 중에 일어난 사회 운동이 아닌 것은?
A. 신생활 운동과 국민 계몽 운동
B. 친일파 청산과 한․일 회담 반대 운동
G. 민족 자주 통일 협의회의 결성과 통일 운동
M. 노동 조합 민주화 운동과 한국 노동 조합 총연맹 결성
B: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기 위한 친일파 처벌 문제는 정권의 민족주의적 명분으로서 이승만 정권이 내세운 문제였다(1949). 이승만 정권은 반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식민지 시대의 친일 세력을 토대로 한 정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친일파 처벌 문제는 사실상 흐지부지되고 반공주의만 정권 유지의 명분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1963년 총선거로 출범한 공화당 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는데, 이 때 학생․지식인․언론․종교 단체․야당은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여(1964. 3.) 이를 반대하였다.
16. 고려 후기의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못한 것은?
A. 원나라로부터 금속 활자 기술이 도입되었다.
B. 최무선은 원나라 사람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배워 화포를 만들었다.
G. 향약(鄕藥)을 사용하는 의술 서적이 출현하였다.
M.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농법이 소개되었다.
A:고려 시대에는 송(宋)의 판본이 수입되면서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다가 중기 이후에 금속 활자가 발명되어 활판 인쇄가 발전하였다.
B:고려 말에 최무선이 원(元)의 상인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익혀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여기에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G:고려 의학은 송(宋)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 의약을 개발하여 의학의 독자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고종 23년에 간행된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의서로 그때까지 많이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어 우리 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M: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원(元)의 「농상집요」를 소개․보급하였고, 공민왕 때 문익점은 목화씨를 원(元)으로부터 수입하였다.
B:고려 말에 최무선이 원(元)의 상인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익혀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여기에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G:고려 의학은 송(宋) 의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전통적 의약을 개발하여 의학의 독자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고종 23년에 간행된 「향약구급방」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의서로 그때까지 많이 쓰이던 중국 약재들을 한국산 약재, 즉 향약으로 충당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어 우리 나라 의약의 독자적 연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M: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원(元)의 「농상집요」를 소개․보급하였고, 공민왕 때 문익점은 목화씨를 원(元)으로부터 수입하였다.
17. 삼국의 유적․유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A.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B. 백제의 무령왕릉은 돌을 다듬어 만든 석실분이다.
G. 경주의 천마총은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이다.
M. 경주의 분황사 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만든 모전 석탑이다.
A:삼국 시대 고분 중 석총(돌무지무덤)에는 벽화가 없고 토총(굴식 돌방무덤)에는 벽화가 있었다. 백제도 사비 시대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 등에서 벽화가 발견된다. 신라 고분은 대개가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무덤 구조상 벽화를 남기기가 어려웠다.
B:백제의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전축분)이었다.
G:경주의 천마총은 통일 신라 시대 이전의 무덤이다.
B:백제의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전축분)이었다.
G:경주의 천마총은 통일 신라 시대 이전의 무덤이다.
18. 조선 전기 군사 제도의 성격으로 옳은 것은?
A. 5위의 군사는 직업 군인에 의해서만 충당되었다.
B. 지방의 방어를 위해서 속오군이 따로 편성되었다.
G. 양반은 군사적 의무는 있었으나 실제로는 제외되었다.
M. 모든 양인은 2필의 군포를 바침으로써 군역을 대신하였다.
A:조선 전기 중앙군인 5위의 중심 병력은 갑사(甲士)를 위시한 직업 군인으로서 이들은 시취(試取)에 의해 선발되었다. 중앙군은 의무 군역자인 정병, 시험에 의해 선발된 정예 부대, 왕족 및 공신 또는 고급 관료의 자제로 구성된 특수병들로 이루어졌다.
B:조선 후기에 대한 설명이다.
M:조선 시대에 16세 이상부터 60세에 이르는 양인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져서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 되거나 군인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 봉족)이 되어야 했다. 보인은 의복이나 식량을 직접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으로 매년 포 2필을 내게 하였다.
B:조선 후기에 대한 설명이다.
M:조선 시대에 16세 이상부터 60세에 이르는 양인 장정들은 누구나 군역을 져서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 되거나 군인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 봉족)이 되어야 했다. 보인은 의복이나 식량을 직접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으로 매년 포 2필을 내게 하였다.
19. 광무 개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사실을 모두 고른 것은?
㉠ 고종은 아관 파천 후 1년만에 환궁하여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이라 하였다. ㉡ 독립 협회가 주장한 입헌 군주제와는 달리 황제권이 전제적으로 강화되었다. ㉢ 양전 사업의 실시와 함께 근대적인 제도라 할 지계(地契)를 발급하였다. ㉣ 근대적인 실업 학교 교육이 추구되었다. |
B. ㉡, ㉢, ㉣
G. ㉠, ㉢, ㉣
M. ㉠, ㉡, ㉢, ㉣
㉠:아관 파천 1년만인 1897년에 고종은 내외의 여론에 힘입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 연호를 광무라 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 제국의 복고적 정책은 정치면에서 전제 황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대한 제국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의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과거의 누적된 폐단의 하나인 전정(田政)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양전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地契)가 발급되었다. 각 도에 파견된 지계감무(地契監務)가 지계 발급 사무를 맡았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상공업 진흥책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이 파견되었으며, 상인과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각종의 실업 학교(기예․상공․광무 학교)와 의학교, 외국어 학교,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대한 제국의 복고적 정책은 정치면에서 전제 황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대한 제국은 입헌 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의 정치 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과거의 누적된 폐단의 하나인 전정(田政)을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양전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라 할 수 있는 지계(地契)가 발급되었다. 각 도에 파견된 지계감무(地契監務)가 지계 발급 사무를 맡았다.
㉣:정부의 상공업 진흥책이 실시되어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상공업 진흥책에 따라 실업 교육이 강조되었고,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생이 파견되었으며, 상인과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각종의 실업 학교(기예․상공․광무 학교)와 의학교, 외국어 학교, 기술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20.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A. 제1공화국의 통일 전선은 무력에 의한 북진 통일론이었다.
B. 4월 혁명 직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섰다.
G. 10월 유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주된 목적으로 하여 취해진 조치였다.
M. 7․4 공동 성명은 분단 이후 남북한 정부의 합의에 의해 발표된 최초의 공동 성명이었다.
B:4․19 의거 후 사태 수습을 위해 허정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으며, 과도 정부는 의원 내각제의 개헌을 단행하여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이 압승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함으로써 장면 내각의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장기 집권에 대응하여 성립된 이 민주당은 여러 정치 세력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보수 정당이었다. 당내의 심한 정치적 갈등과 끊임없는 내외 파쟁에 빠진 보수적 장면 정권은 과단성 있는 정치를 단행하지 못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급격한 정치․사회․경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어 정치적 혼란은 거듭되었다. 결국 5․16 군사 정변으로 장면 내각은 불과 9개월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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