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0일에 시행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다음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서적에 관한 설명이다. 옳지 않은 것은?
① ‘향약구급방’은 우리나라 최초로 약초로 병을 치료하는 의학서로서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의서이다.
② 원으로부터 들어온 ‘농상집요’를 바탕으로 ‘금양잡록’이 쓰여졌으며, 고려의 농업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③ ‘속편년통재’는 편년체로 서술되었으며, 예종 때 홍관이 ‘편년통재’의 속편으로 지은 사서이다.
④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순 설화가 서술되어 있으며 , 이는 몽고 간섭기에 민족적 정통성과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⑤ 1234년 ‘고금상정례’ 50권을 인쇄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답: ②

*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서적들

① 13세기에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의학 서적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처방과 국산 약재 180여 종이 소개되어 있다.

② 고려 후기 충정왕 때에 이암이 중국(원)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1349)하여 중국의 선진 농법이 들어왔다.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 초기에는 우리의 풍토와 실정에 맞는 정초의 ‘농사직설’(1423)과 강희맹의 ‘금양잡록’(1492)과 같은 농서가 간행, 보급되었다.

③ 고려 전기에 편찬된 사서로는 ‘고려왕조 실록’과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책인 ‘구삼국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기전체 사서로 편찬되었으며, 고려왕실의 족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편년통록’.‘왕대종록’ 등의 왕실가계서와, 편년체, 또는 연대기적 사서로 보이는 박인량의 ‘고금록’과 홍관의 ‘편년통재속편’ 등이 있다.

*‘편년통재’는 고려시대 간행된 편년체 역사책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현재 전하지 않으며, 저자와 편찬 연대도 알 수 없으나, 홍관의 ‘편년통재속편’이 편찬된 예종 11년(1116) 이전에 편찬되어 있었으며, 11세기 중엽에 편찬된 송의 ‘편년통재’를 모방하여 편찬되었을 것으로 본다.

④ 원의 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1285)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1287)도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⑤ ‘상정고금예문’ 또는 ‘고금상정예문‘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가 지은 것으로 현존하지 않으나, ‘동국이상국집’에 이 책을 고종 21년(1234년) 활자로 찍었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세계와 한국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2. 고려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게 서술된 것은?
① 감문위는 중앙군인 6위의 하나로 1000명으로 구성되며, 궁성 수비를 담당하였다.
②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종은 광군사를 설치하고 송과 국교를 맺어 대비하였다.
③ 상평창은 물가조절 기구로 성종 때 개경, 서경, 5도, 양계에 설치되었다.
④ 부곡의 남자와 군현의 여자가 결혼하면, 그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 군현에 소속되었다.
⑤ 4월 초파일날 거행되는 연등회는 국가적 행사로 거행되었다.


정답: ①

* 고려 시대의 제도들

① 고려의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각 부대의 병력은 1천 명씩 1령을 기본단위로 하여 편성).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2군은 응양군(1령)과 용호군(2령)으로 구성된 친위대로 근장(近仗)이라고도 불러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6위는 금오위(7령, 경찰 임무), 천우위(3령, 의장대), 감문위(1령, 궁성문 수비)의 수도 주둔 3위와, 개경의 경비뿐 아니라 국경방위 임무까지 맡은 좌우위(13령), 신호위(11령), 흥위위(12령)의 3위(정용군.보승군 구성)로 구성되었다.

② 정종(945~949)은 거란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광군사를 설치하고 30만을 조직하였다(947). 고려가 후주를 계승한 송과 통교한 것은 광종 때부터이다(962)

③ 고려는 개경과 서경 및 각 12목에 상평창을 두어 물가의 안정을 꾀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④ 부곡인은 형벌상 노비와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자손의 귀속문제에 있어서 천인의 취급을 받았다(일천즉천). 따라서 이 경우 부곡에 귀속이 된다.

⑤ 본래 연등회는 본래 태조의 훈요 10조에 의한 정월 연등(1.15)을 국가적으로 행하였다. 그후 2월 연등(2.15), 그리고 고려 후기에 불탄일을 기념하기 위한 4월 초파일 연등 등이 나타났다.

3.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나타난 국내외 변화로 보기 어려운 것은?
①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였다.
② 명나라가 약화되고 여진족인 급속히 성장하였다.
③ 비변사의 구성원이 확대되고 기능이 강화되었다.
④ 일당전제화가 강화되어 탕평책 실시의 계기가 되었다.
⑤ 공명첩, 납속책의 시행으로 조선의 신분제가 동요되었다.


정답: ④

*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나타난 국내외 변화

임진왜란(1592~1598)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정치적으로 비변사가 강화되어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경제.사회적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여 서얼.중인.양인 계층들의 신분 상승이 가능하여 신분제 변동이 심하여졌다.대외적으로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④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졌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일당전제)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4. 다음 조선 후기 국학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야사를 참고하여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고, 우리나라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하였다.
②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단군을 정통 국가의 시발점으로 하여 기자-마한-통일신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③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는 고대 지명을 새롭게 고증하였으며, 고구려의 발상지가 만주 지방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고증하였다.
④ 오운의 ‘동사찬요’는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의병에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역대 애국 먕장의 활약을 드러내고 있다.
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우리나라가 기자로부터 시작된 유교 국가임을 강조하였으며, 영남 남인들 사이에 추앙받는 사서가 되었다.


정답: ⑤

* 조선 후기 국학 관련 서적들

① 연려실기술(1776): 소론계 이긍익이 저술한 조선 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 400여 종의 야사를 인용하여 근거 제시에 충실하고 나아가 사료를 집대성하고, 사건의 인과 관계를 밝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사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조선 왕조의 정치사를 문헌 고증적 인장에서 보다 객관적 기준으로 서술하고, 우리나라 역대의 문화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② 동국역대총목(1705): 소론계 홍만종이 저술한 단군~조선시대 역사서. 노론계가 중시하던 주자학적 명분 위주의 <여사제강>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실세(實勢) 위주로 역사를 파악하였으며, 단군을 정통 국가의 시발점으로 하여 기자-마한-통일신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③ 동국지리지(1615): 서경덕(漢黨) 계열의 한백겸이 쓴 역사지리서. 문헌고증과 답사의 방법으로 고대 지명을 새롭게 고증하여, 고구려의 발상지가 평안도 성천이라는 통설을 뒤집고 만주 지방이라는 것을 처음 고증하였고, 삼한의 위치도 고증하여 객관적 역사지리 연구의 단서를 열어 놓았다.

④ 동사찬요(1606): 오운이 쓴 기전체 형식의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 본래 지(志)가 빠져 있었으나 한백겸의 충고를 따라 지리지를 덧붙이고(1614) 열전에서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의병에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역대 애국 명장의 활약을 드러내고 있다. 기자조선을 높여서 기자로부터 우리나라 풍교가 시작되었다고 보며, 박상의 ‘동국사략’을 따라 신라 중심으로 서술했다.

⑤ 지봉유설(1614): 이수광이 쓴 백과사전식 저서. 조선의 전통 사회와 그 정치에 대한 연구 결과를 수록하였고, 유교 문명 이외에도 유럽 문명, 회교 문명, 불교 문명권이 있음을 소개하여 시야를 넓혀주어 문화 인식의 폭을 확대하였다.

우리나라가 기자(->마한->신라)로부터 시작된 유교 국가임을 강조하여 영남 남인들 사이에 추앙받는 사서는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이다

5. 조선 초기 국제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세종 때 임신약조에 의해 일본과의 무역은 세견선 50척 등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게 되었다.
② 조선은 부산포, 염포, 제포 등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에 각각 1곳씩을 개방하여 왜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용하였다.
③ 세종 계해년 도체찰사 박위의 대마도 정벌에 의해 왜구를 근절하고 통교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④ 3포 왜란을 계기로 조선은 3포를 폐쇄하고,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청사를 설치하고 상설화하였다,
⑤ 정미약조는 사량진 왜변 이후 단절되었던 왜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으로, 규정 위반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였다.


정답: ⑤

* 조선 전기의 대일 관계

조선은 본래 일본이나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된 왜구의 침략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뛰어난 전함을 대량으로 건조하였다. 특히, 화약 무기를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하는 등 왜구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침략과 약탈이 어려워진 왜구들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은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세종 때 상왕 태종의 주도 아래 이종무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1419). 아울러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해안의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1426)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1443, 계해약조).

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 사량진 왜변(1544)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1517)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1590, 황윤길.김성일).

3포 개항(1426): 계해약조(1443) -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삼포 왜란(1510): 임신약조(1512) - 세견선 25척, 세사미두 100석, 제포만 허용

사량진 왜변(1544): 정미약조(1547) - 규정 위반에 대한 벌칙 강화

을묘 왜변(1555): 국교 일시 단절. 제승방략 체제 도입과 비변사 본격 제도화
③ 고려 말 창왕 때 박위가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1389).

6. 다음은 초기 고구려에 관한 설명이다. ( ) 속에 들어갈 내용이 잘못 연결된 것은?
고구려도 왕 아래에 ( ㉠ )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 ㉡ )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혼인을 정한 뒤 신부집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 ㉢ )라는 풍속이 있었다.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 ㉣ )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 ㉤ )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① ㉠ - 상가, 고추가
② ㉡ - 제가회의
③ ㉢ - 형사취수제
④ ㉣ - 동맹
⑤ ㉤ - 국동대혈


정답: ③

* 초기 국가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혼인을 정한 뒤 신부집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인 서옥제(婿屋制)와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같이 사는 혼인 제도인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의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7. 다음은 조선의 지방제도에 대한 설명이다. 옳지 않은 것은?
① 변경 지역인 평안.함경 양도의 일부 지방에는 특별히 유력층이 토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2품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하는 한품의 제약이 있었다.
② 모든 지방행정 단위에는 6방의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사무는 지방의 향리들이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담당하였다.
③ 군현의 하부 행정 구획으로는 새로운 촌락 지배 체제로서 면리제가 성립되엇으나, 완전히 획일화된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④ 관찰사는 360일 임기에 단임으로 제한되었고, 수령의 임기는 1800일로 정해져 있었다.
⑤ 향리 가운데 한 사람을 서울에 파견.상주시켜 그 고을 공부를 수납하도록 한 경저리가 있었으며 감영에는 영저리를 두었다.


정답: ①

* 조선의 지방 제도

① 조선 초기의 평안.함경 양도는 북방 개척과 사민 정책으로 형성된 지역이라 토성이민(土姓吏民)이 없었던 터라, 현지 유력층을 토관(土官)으로 삼았다. 토관은 5품 한품(限品)이었고, 중앙관직을 받을 경우에는 1품을 낮추기도 하였다.

②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행정조직은 중앙관제처럼 이·호·예·병·형·공의 6방으로 나누어 6방 향리들에게 분담되었다. 6방 향리의 여러 가지 직무 가운데 주요한 것은 일반 농민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공부와 군역 및 요역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6방 향리 가운데 이방·호방·형방의 수석은 「삼공형(三公兄)」이라고도 하였으며, 특히 향리의 수반인 호장(戶長)은 수령 이 부재시 그 직무를 대리하는 수석 향리였다. 향리들의 사무는 향역으로 세습하면서 담당하였다.

③ 조선 시대에 군현의 하부 행정 구획으로는 새로운 촌락 지배 체제로서 면리제(호->통->리->면)가 성립되었으나, 초기에는 완전히 획일화된 구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즉, 조선 초기는 후기처럼 군현→면→리로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 고려 시대와 조선 후기와의 중간에 개재한 과도기적 성격을 띠어 면(지역촌)과 촌(자연촌), 또는 리(지역촌)와 동·촌(자연촌)이 때로는 상하관계, 때로는 병렬적으로 존재하면서 그 명칭이 혼용되고 있었다.

④ 관찰사와 수령은 지방의 행정.사법.군사에 관한 막강한 권한을 지니었기에 견제책의 일환으로 임기제를 마련하여 관찰사는 360일(1년) 단임, 군현의 수령은 1,800일(5년), 당상관 수령은 900일의 임기제와, 모두 자기 출신지에 부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상피제).

⑤ 각 지방의 향리 중에서 한 사람을 서울에 파견 상주케 하고 그 고을의 공부를 수납하도록 한 경저리(京邸吏)를, 감영에는 영저리(營邸吏) 제도를 마련하여 왕->감사->수령의 관치행정을 보조케 하였다.

8. 다음 연해주 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단체를 모두 고른면?
㉠ 경학사
㉡ 부민단
㉢ 대한인 국민회
㉣ 대한 국민 의회
㉤ 대한 광복군 정부
① ㉠㉡
② ㉠㉢
③ ㉢㉣
④ ㉢㉤
⑤ ㉣㉤


정답: ⑤

* 연해주 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 단체

이미 많은 동포들이 이주해 살고 있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10년 6월과 8월 유인석, 이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 의군과 성명회(聲鳴會)가 설립되었으나 동년 9월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1911년 독립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이를 기반으로 자치조직인 권업회(勸業會) 설립되어 독립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으나, 이 역시 대일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이상설과 이동휘 등은 1914년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여 군사 활동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꺼린 러시아가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탄압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활동은 어려웠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연해주에서는 전로한족대표자회의(1917)가 설립되어 한인신보 등을 간행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다, 3·1 운동 직후 임시 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 의회(1919.3)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동휘 등에 의해 한인 사회당(1918)이 조직되어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 ㉡ 서간도 지역에서는 신민회 회원들이 독립군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이회영이 중심이 되어 삼원보에 민족 운동 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와 같은 군사 간부 양성소를 설치하였다. 특히 신흥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백서농장을 건설하고 독립군을 편성, 훈련하였다.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서로 군정서)을 조직하였다

㉢ 미주 지역에서는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대한인 국민회(1910)가 조직되어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동포 사회의 결속과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호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9. 다음 중 삼국의 통치 체제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초기에 각 부의 부족들은 중앙 왕실에 예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다스렸다.
② 왕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은 점차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③ 지방 통치는 주요 거점만을 지배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를 허용하여 간접적으로 주민을 지배하였다.
④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제의 운영은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⑤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었으며,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정답: ①

* 삼국의 통치 체제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과 그 아래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으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간접 지배).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 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10. 다음 기록에 보이는 의식을 행한 조직에 대한 성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사람들은 바닷가에 커다란 구덩이를 여러 개 만들고 자신과 가족의 이름을 적은 향나무를 집어 넣었다. 나무를 다 넣고 구덩이를 덮은 후 승려가 불경을 외우면서 이 공덕이 도솔천의 미륵불에게 전달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이 이의식의 지도자는 나중에 이날의 행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기 위해 행사의 전말을 기록하였다.
① 불교 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신도들을 결사하였다.
② 구성원 간에 길흉사의 경조, 재난 구제 등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③ 사원의 주도하에 승려와 일반 신도들로 결성된 신앙단체였다.
④ 신앙조직에서 점차 마을의 공동체생활을 주도하는 농민조직으로 변모하였다.
⑤ 석탑이나 불상 등의 조성을 위해 대규모 노동력과 경제력을 제공하였다.


정답: ③

* 고려, 조선의 농민 공동 조직 향도(香徒)

농민은 일상 의례와 공동 노동 등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을 다졌다. 공동체 조직의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 향도였다. 향도는 본래 매향 활동을 하는 무리이다. 매향은 불교 신앙의 하나로,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향나무를 바닷가에 묻는 활동이다.

향도는 매향 활동을 하면서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석탑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점차 신앙적인 향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되는 향도로 변모되어 마을 노역, 혼례와 상장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등 공동체 생활을 주도하는 농민 조직으로 발전해 갔다.

③ 향도는 사원이 주도한 것이 아닌 순수한 농민과 신도들이 주도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 사원의 주도하에 승려와 일반 신도들로 결성된 신앙단체는 결사(結社)라 하고, 고려 후기 무신 집권기 불교 정화를 위해 지눌이 주도한 수선사 결사와 요세의 백련사 결사가 유명하다.

11. 다음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일부이다. 이 비분에서 보이는 사실이 있었던 이후의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바르게 모은 것은?
영락9년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서로 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급히 뒤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리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리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하였다.

< 보 기 >
㉠ 고구려는 율령 반포, 불교 공인 등으로 중앙집권국가로서 체제를 강화하였다.
㉡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에 밀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권이 약화되었다.
㉢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였다.
㉣ 백제는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 고구려는 낙랑을 완전히 몰아내고 만주지방에서 대규모 정복사업을 단행하였다.
① ㉠, ㉣
② ㉡, ㉢
③ ㉡, ㉤
④ ㉢, ㉣
⑤ ㉢, ㉤


정답: ②

* 광개토대왕의 한반도 남부 정벌(400) 이후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

고구려는 소수림왕(371~384) 때의 내정 개혁(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설립)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391~413)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400).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479, 지두우 점령),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장수왕의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동성왕 때에 신라(눌지왕)와 동맹(433)을 맺으며 대처했으나, 개로왕이 전사하며 수도(한성)을 뺐기며, 문주왕 때에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 백제 근초고왕(346~375) 때에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 고구려 미천왕(300~331) 때에 낙랑을 완전히 몰아내었다(313).

12. 다음 중 서울시에 있는 고대 국가 시기의 문화유산으로 잘못 연결된 것은?
① 고구려 - 아차산성 보루
② 백제 - 석촌동 고분
③ 백제 - 풍납 토성
④ 신라 - 북한산 순수비
⑤ 신라 - 서울 동묘


정답: ⑤

* 서울시에 있는 고대 국가 시기의 문화유산

① 서울시 광장동에 소재한 아차산성은 백제 수도 풍납토성 한강 너머에 있는 주요 방어지로서, 475년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으로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하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590).

②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온조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③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소재한 백제의 초기 왕성(王城)으로 확실시되고 있는 곳. 백제 초기 수도로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도 추정되지만, 한강을 북쪽으로 끼고 반 타원형 모양으로 3.5km를 둘러친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폭이 40m, 높이 9m에 이르는 동양 최대의 판축토성이다. 이 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을 축조하려면 대규모 인력동원이 있어야 함으로, 절대왕권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입증하게 된다.

④ 국보 제3호. 서울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진흥왕의 4개의 순수비 중 하나. 본래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김정희가 고증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진흥왕이 553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 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555년 10월에는 몸소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소재.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로서, 중국의 장수인 관우를 신앙하기 위하여 건립된 묘당. 관왕묘는 임진왜란 때인 1598년 명의 원군 장수 진인이 서울 남대문 밖에 처음으로 건립하였는데 남쪽에 있다 하여 남관왕묘라고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정유왜란 때 관우의 혼이 나타나 때때로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 하므로, 군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관왕묘를 건립한 것으로 보이고, 동관왕묘는 선조 33년(1600)에 명나라의 칙령으로 건립하여, 선조 35년(1602)에 준공하였다.

13. 1945년 8월 15일을 전후한 시기에 벌어진 상황 중 사실이 아닌 것은?
① 여운형, 안재홍 등이 중심이 되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② 미군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불법단체로 여겨 강제해산 시켰다.
③ 건국준비위원회의 좌파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주석에 김일성, 부주석에 여운형을 추대하였다.
④ 송진우와 김성수 등 우익계열 인사들은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다.
⑤ 미군정하에서 일제의 총독부 체제가 그대로 존속하였고, 일본 관료 출신들이 미군정에 참여하였다.


정답: ③

* 1945년 8월 15일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사실

일제가 항복하기 직전, 건국 동맹의 여운형은 조선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의 일부를 이양받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1945. 8.). 여기에는 민족주의 세력의 안재홍 등도 참가하였다. 이 위원회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국내 질서의 자주적 유지, 대중 생활의 확보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좌익 세력이 건국 준비 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중도 세력이 탈퇴하자 그 영향력은 많이 약해졌다. 박헌영 등의 좌익 세력은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고 조선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1945.9.6)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을 선임하였으나, 이승만은 취임을 거부하였고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한편, 송진우 등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한국 민주당을 만들었다(1945. 9.). 지주 등 자산가들이 주축을 이룬 한국 민주당은 미 군정청과 유대 관계를 강화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좌파 세력과 대립하였다.

1945년 10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그는 각 정파를 연합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결성하였다(1945.10).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는 완전 독립, 38도선 철폐, 신탁 통치 반대 등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조선 공산당이 친일파의 처리 등을 요구하며 탈퇴하자 좌우 연합 단체로서의 성격은 약화되었다.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는 이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 과정에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로 통합되었다(1946. 2.).

한편, 9월 2일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미군은 8일 인천에 상륙하고, 9일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어 미군은 군정 실시를 선언하면서 공산화 방지를 위해 민주주의 실현과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조선 총독부의 행정 체제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미군정은 총독부 관료와 경찰을 그대로 등용한 반면, 한국인들이 조직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조선 인민 공화국은 모두 부인하였다.

14. 다음 연표의 (나) ~ (다) 시기에 있엇던 사실은?
(가) 일본의 만주 침략 → (나) 중 · 일 전쟁 발발 → (다) 태평양 전쟁 발발
① 징병제
② 치안유지법
③ 국민 징용령
④ 조선 태형령
⑤ 학도 지원병제


정답: ③

* 민족말살기 1937~1941년 사이에 있었던 일제의 인적 수탈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본격적인 전시체제를 발동하는 동시에 이른바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정책을 본격화하였다. 그리하여 신사참배에 이은 황국신민서사와 창씨개명, 그리고 조선어 사용금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조선 민족성의 말살을 획책하였다.

또한 전쟁인력의 확보를 위해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청년 수만 명을 지원병 형태로 전쟁에 끌어들이는가 하면, 1943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약 20만 명이 징집되었고, ‘학도지원병’제도가 강행되어 약 4,500명의 전문학교학생과 대학생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다.

이와 함께 일제는 모집·징용·보국대·근로동원·정신대 등을 통한 조선인의 희생을 대량으로 강요한 노동력의 강제수탈을 시행하였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고 곧이어 1939년에<국민징용령>을 실시하여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② 치안유지법: (1925~1945): 일본제국과 식민지 전체에 적용되는 천황 통치 체제 및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법률로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를 탄압(사상 전향을 강요)하기 위한 법령이다.

④ 조선 태형령(1912): 갑오개혁 때에 폐지되었던 태형이 무단통치 기간인 1912년 제정되어, 조선인에게만 적용되었다. 3·1운동 이후 비등한 여론과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1920년 폐지되었다.

15. 다음은 해방 이후 남북 당국자 사이에 진행된 회담의 결과들이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1972년의 7 · 4 남북 공동 성명
(나)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
(다) 2000년 6 · 15 남북공동선언
① (가)에서는 자주 · 평화 ·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평화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하였다.
② (나)의 정신에 따라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이 이루어졌다.
③ (다) 이후 개성공단이 설치되고 금강산 육로관광이 이루어졌다.
④ (나), (다)의 공통점은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⑤ (가), (나), (다)에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정답: ②

* 남북 간의 합의 문서

1970년대에 들어와 냉전 체제의 완화, 남한의 경제 발전 등 국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남북 교류를 제의하고, 남북 간에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적십자 대표의 예비 회담을 열었다. 또, 서울과 평양에서 7·4남북 공동 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다(1972). 이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내세운 것으로 이후 통일 논의의 기본 원칙이 되었으며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선언 직후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주석 체제)를 더욱 강화하며, 이후 남북 간의 대화가 상당 기간 단절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1991.8),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1991.12),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의 교류가 크게 확대되었다. 마침내 평양에서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2000). 이 선언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이후 합의 사항인 개성 공단 건설, 금강산 육로 관광과 경의선.동해선 연결,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고 있다.

④, ⑤ (가), (나), (다) 모두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며,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꾀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6.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에 발표한 '개혁정강 14개조'의 내용이 아닌 것은?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한다.
②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③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④ 조세의 징수와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의 관할에 속한다.
⑤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정답: ④

* 갑신정변(1884)의 '개혁정강 14개조'

개혁 정강 14개조 정강
1. 흥선 대원군을 빨리 귀국시키고 종래 청에 대해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재정을 넉넉히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탐관오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환곡)을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외척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보부상 특권 기구)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하거나 옥에 갇혀 있는 자는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1영으로 합하되,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재정의 일원화.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군주적 요소).
14. 의정부와 6조 외에 필요 없는 관청을 없앤다.

④ 조세의 징수와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은 1차 갑오개혁(1894.7~12) 때의 개혁 내용이다 .

17. 다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나타난 당시 사회의 경제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전에 전라도 무안 등의 여러 고을에서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장문(場門)이라 일컬으며 모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니 장문을 금지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여 와뢰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이 이제 전라도 감사 김지경에게 공문을 보냈더니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도내 여러 고을에서 장문이라 하여 매달 두 번씩 거리에 모여듭니다. 비록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바꾼다하나, 본업을 버리고 말업을 쫓는 것이며, 물가가 뛰어 오릅니다."
① 왜구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연해지역의 농토개간이 완료되었다.
② 출현할 당시의 장시는 15일이나 10일 간격으로 개시되었다.
③ 장시에서의 주요 유통수단은 화폐보다 쌀이나 무명이었다.
④ 농민들이 상업적으로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⑤ 장시에서 물건을 매매한 사람은 대부분 선상이나 도고 등 대상인이었다.


정답: ⑤

* 장시가 출현한 15세기 말의 경제 상황 : 제시 자료 ‘성종 실록’

15세기 후반 남부 지방(전라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장문)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판매하여 유통시켰다.

① 조선 초기에는 주로 북부 지역이 개간의 대상이었으며, 세종 이후 왜와의 관계가 안정된 이후 15세기말 16세기에 들어서는 연해 지역에 대한 개간이 늘어났다.

② 장시의 성립 초기에는 1개월에 2회 개설되는 15일장이었는데, 16세기에는 10일장과 5일장으로 발달하였다.

③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18. 무신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인 결사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바른 것으로 짝지어진 것은?
㉠ 지눌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여 개혁운동인 백련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 송광사의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체계인 교관겸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 지눌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여 선교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① ㉠, ㉡
② ㉡, ㉢
③ ㉡, ㉣
④ ㉣, ㉤
⑤ ㉠, ㉤


정답: ③

* 고려 무신집권기 결사 운동

무신 집권 이후의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도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인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지눌(1158~1210)은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였다. 그는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행,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 운동인 수선사 결사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수선사 결사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조계종은 지눌이 수선사를 열면서부터 매우 흥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계의 중심적인 종파가 되어 많은 승려를 배출하였다.

지눌은 선과 교학이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니라는 사상 체계인 정혜쌍수를 사상적 바탕으로 철저한 수행을 선도하였다. 또, 지눌은 내가 곧 부처라는 깨달음을 위한 노력과 함께,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강조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여 교와 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한 지눌의 논리는 고려 불교가 지향하던 선교 일치 사상을 완성한 것이었다.

지눌의 결사 운동은 지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혜심은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지눌과 비슷한 시기에 요세(1163~1245)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 결사를 제창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 결사 역시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고, 수선사와 양립하며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다.

19. 다음의 ㉠ ~ ㉣의 도구들이 사용되던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쐐기 등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반달 돌칼, 돌도끼, 흠자귀 등의 도구를 사용하였다.
㉢ 한 개 내지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도구를 사용하였다.
㉣ 이른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① ㉠ - 동굴과 막집에 살면서 채집과 사냥을 하였다.
② ㉡ -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
③ ㉢ -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하였다.
④ ㉣ - 원형이나 네모 모양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⑤ ㉣ - 영혼숭배, 조상숭배, 토테미즘 등이 나타났다.


정답: ②

* 각 선사 시대의 모습

㉠ 구석기 시대: 전기에는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썼으나, 중기에는 큰 몸돌에서 떼어 낸 돌조각인 격지들을 가지고 잔손질을 하여 석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크기는 작아지고 점차 한 개의 석기가 하나의 쓰임새를 가지게 되었다. 후기에는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격지를 만드는 데까지 발달하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를 이루어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생활하였고,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 청동기 시대: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업은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 중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빙하기가 지나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런 새로운 자연 환경에 대응하고자 이 시기의 사람들은 적합한 생활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큰 짐승 대신에 토끼, 여우, 새 등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하여 활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석기들은 더욱 작게 만들어진 잔석기로서, 한 개 내지 여러 개의 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쓰는 이음 도구를 만들었다. 이음 도구에는 톱, 활, 창, 작살 등이 있었다.

㉣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의 토기로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압인문 토기) 등이 있다. 농경과 정착 생활이 처음 시작되며 인간들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며, 애니미즘(영혼숭배), 토테미즘(동물숭배), 샤머니즘(무속신앙), 조상숭배 등이 나타났다.

20. 다음 중에서 신간회가 주장한 내용이 아닌 것은?
① 무력투쟁을 통한 민중적 조선 건설
②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 철폐
③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④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⑤ 사상연구의 자유


정답: ①

* 합법적 좌우 합작 단체 신간회(1927~1931)의 주장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치안유지법(1925)으로 탄압받는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이에 호응하여 결국,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합법적 단체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1927. 2.)

신간회는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였고, 사회 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지원,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1929년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결과를 발표할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신간회는 민중 대회 사건 후, 새 집행부의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대립이 생겨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신간회는 국내 민족 운동 세력의 역량을 총결집시켰다

신간회 강령 (창립 당시)
1. 우리는 정치·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타협적 민족주의)를 일체 부인함.

신간회의 투쟁 목표 (신간회 동경 지회의 정책 제안’ 중에서)
•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 단결권.파업권.단체 계약권의 확립
•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모든 법령 철폐
• 경작권의 확립
•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 8시간 노동제 실시
• 부당한 납세 반대
• 최저 임금, 최저 봉급제 실시
• 산업 정책을 조선인 본위로
• 모든 학교 교육을 조선인 본위로

① 무력투쟁을 통한 민중적 조선 건설은 ‘조선혁명선언’(1923)에 나타난 의열단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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