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4일에 시행한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 1. (가), (나)의 나라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집안 사람들이 죽으면 가매장하였다가 뼈를 추려 커다란 목곽 안에 묻었다. 목곽 안에는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나무로 만들어 넣었다.
(나) 대군장이 없고 한(漢) 시대 이래로 후ㆍ읍군ㆍ삼로라는 관직이 있어 하호를 다스렸다. 그 풍속은 산천을 중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① (가)-동맹이라는 제천 행사가 행해졌다. 
② (가)-천군이 제사를 주관하는 소도가 있었다.
③ (나)-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이 산출되었다.
④ (나)-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정답] ③

[해설]
(가) 옥저, (나) 동예에 대한 설명이다.
① 고구려, ② 삼한, ③ 동예, ④ 부여와 고구려

(가) 옥저의 골장제, (나) 동예의 책화에 대한 설명이다. ① 동맹은 고구려의 제천행사이다. ② 소도는 삼한의 특수 지역이며, ④ 부여의 우제점법이다. ③ 동예는 단궁, 과하마, 반어피가 특산물이었다.

문 2. 삼국시대 관등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신라의 관등은 크게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으로 나뉜다.
② 고구려의 관등은 크게 형계 관등과 사자계 관등으로 나뉜다.
③ 백제의 관등은 복색제와 연관되어 공복의 색깔도 관등에 따라 3색으로 구분되었다.
④ 종래의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집단이 왕 아래에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상하관계를 이룬 것이다.


[정답] ①

[해설]
① 백제에 대한 설명이다.

① 백제의 관등 체계는 솔계열과 덕계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라는 간군과 비간군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솔계(率系)·덕계(德系) 설치 : 소국의 수장으로서 신지(臣智)나 읍차(邑借)를 칭했던 사람들에게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을 수여하여 지배 체제 내에 편제하였다.

② 고구려는 형계 관등과 사자계 관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사자(使者)계 계열의 우위 : 사자(使者)계 계열과 형(兄)계 계열로 나누어졌으며, 왕권과 연결되어 있는 사자계 관등이 형계 관등보다 관등상 우위를 점하였다.

③ 백제의 관등은 복색제와 함께 3색으로 구분되었다.
3등급으로 편제 : 관등제와 복색제를 통해 알 수 있는 백제의 지배 신분층은 크게 3등급이었다. 제1등급은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 제2등급은 장덕 이하 대덕까지, 제3등급은 문독 이하 극우에 이르는 관등의 소지자들이었다.

■ 관등제의 의미 ■
관등제는 관리들의 등급을 정한 것으로 종래의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 집단이 왕 아래에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상하 관계를 이룬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초기부터 국가 권력을 독점하던 각 집단의 최고 귀족들이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특권을 항구적으로 보장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문 3. 다음 글의 지은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요,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앞으로 후세에 무엇을 볼 수 있으리오.
-동명왕편-
① 최씨 무인정권 하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② 유교ㆍ불교ㆍ도교ㆍ민간신앙 등을 포용하였다.
③ 삼국사기에 반영된 신라 계승 의식을 비판하였다.
④ 단군 계승 의식을 반영하여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하였다.


[정답] ④

[해설]
이규보는 최우 정권기에 서방을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로 「동명왕편」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명하였다. ④는 원간섭기에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대한 설명이다.

① 최씨 무인 정권 하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 최씨 정권의 특징 ■
최씨 정권 이후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강력한 권한을 보유한 독재정권이었고, 이전 무신 정권과 다른 점은 독재 정권에 방해가 되는 중방 출신 무신을 억압하고 문신을 옹호했다는 점이다. 최씨 정권은 정방, 서방을 통하여 문신을 우대, 회유하였고, 문신들의 행정적 실무 능력을 이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 등용된 문신으로 이규보, 금의, 최자, 진화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② 고려 광종(925~975)이 처음 과거제도를 실시한 이후 유교 사상은 고려 사회의 핵심적 정치 이념이 되었으며, 신라 천년동안 국교로써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불교는 고려사회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초제를 거행하고 조정에 도사를 두었을 만큼 도교 역시 성행하였다. 이렇듯 고려 사회는 유·불·도 삼교가 서로 거부감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도 서로를 아우르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그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삼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졌으며 이규보 역시 유교·불교·도교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동명왕편 (이규보) : 명종 23년(1193),이의민 집권기
ⓐ 이의민 집권기로서 사회 기강의 붕괴 ⇨ 국가의식의 표출
ⓑ 『동국이상국집』에 수록
ⓒ 민간 전승으로 내려온 고구려 건국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
ⓓ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 반영
ⓔ 서문에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본래 성인의 고장임을 알리려 한다.’고 하여 민족적 자부심 고양

④ 단군 계승 의식을 반영한 최초의 역사서는 『삼국유사』이다.

문 4. 6ㆍ25전쟁의 휴전회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중공군이 참전하자 휴전회담은 일시 중단되었다.
②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같은 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③ 휴전회담이 난항에 빠지자 참전국들 간의 회담이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④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이승만은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정답] ②

[해설]
① 중공군이 참전하자 소련이 휴전 회담을 제의하면서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총 765회의 회담이 진행되었다.
③ 휴전회담이 체결되고 이후 1954년 6월에 제네바 정치 회담이 개최되었다.
④ 휴전협정에 반대하면서 휴전 체결 한달전인 1953년 6월에 이승만은 거제도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 중공군의 참전(1950. 10) : 유엔군은 만주진격을 우려한 중국이 1백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전세는 다시 뒤집어 졌다. 그리하여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1.4후퇴)

* 서울 재수복(1950. 3. 14) :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로 평택, 오산지방까지 후퇴하던 유엔군은 다시 총공세를 시도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

* 휴전협상의 실시(1951. 6. 23) : 이 무렵 미국의 비공식제의를 받아들인 소련이 유엔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해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 사이에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다. 휴전회담은 2년여 계속 되었으나, 군사분계선 설정, 중립군 감시기구의 구성, 포로교환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 전쟁이 계속되어 쌍방간의 희생이 더욱 컸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1953. 10) :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떠한 외부의 침략에도 상호 협력, 대항한다는 내용의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 제네바 회담(1954. 4) :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관련국간 정치 회담으로서 개최되었으며, 남북한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별다른 수확은 얻지 못했다.
㉠ 남한 :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 감시 하에 대한민국의 헌법 절차에 의거하여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 등 4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 북한 : 북한 최고 인민 회의와 남한 국회에서 각각 선출된 대표로서 전조선위원회를 조직하여 동 위원회에서 선거법 초안을 준비하며, 6개월 이내에 외국 군대를 철수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 이승만정부의 휴전협상 반대 : 휴전협정이 성사될 즈음, 이승만 정부는 북진통일을 맹렬히 주장하면서 반공성향이 있는 인민군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1953. 6)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문 5. 밑줄 친 ‘이 같은 풍습’과 관계가 먼 것은?
근래 지방의 민심이 사나워 수령을 능멸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전에 성상께서 행차하는 길에, 황주와 해주의 백성이 수령에 대한 불만을 성상의 수레 앞에서 호소하여, 수령을 바꾸어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이 같은 풍습은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성상은 이들을 고양군에 가두라고 한 다음 특별히 어사를 보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모두 석방하라 하였습니다.
-영조실록-
① 민권의식의 증대
② 소원제도의 확대
③ 언관ㆍ언론의 발전
④ 상언ㆍ격쟁의 증가


[정답] ③

[해설]
지문은 영조대의 소원제도 중 상언ㆍ격쟁에 대한 설명이다. 소원제도란 말그대로 행정행위가 위법하거나 부당할 때에 상급 관청에 대하여 처분의 취소 또는 변경을 호소하는 일이다.

③ 영ㆍ정조대에는 붕당이 적극적으로 내세운 공론이 백성의 의견을 반영하는게 아니라 특정 붕당의 입장을 반영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직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3사의 언론기능도 약화시켰다.

제시된 내용은 영조 대, 민본주의 정책 시행에 따른 격쟁의 활성화에 대한 사료이다. 이는,  ① 민권의식의 증대, ② 소원제도 : ‘행정행위가 위법하거나 부당할 때에 상급 관청에 대하여 처분의 취소 또는 변경을 호소하는 일’이므로 해당될 수 있다.

④ 상언(上言)·격쟁(擊錚)의 활성화 : ‘아랫 사람이 국왕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의미인 상언과 민인들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대궐 밖을 나올 때 징, 꽹가리 또는 북을 쳐서 억울함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수단인 격쟁을 활성화하여 민의를 반영하고자 하였다.
......와 관련이 있으나, 언관언론의 발전과는 관련이 없다. 더군다나, 영조 대는 대간들의 언론권을 억제하였다.

문 6. 다음 자료는 조선시대 어떤 군사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군사체제에 해당하는 것은?
을묘왜변 이후 김수문이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도내의 여러 읍을 순변사ㆍ방어사ㆍ조방장ㆍ도원수와 본도 병사ㆍ수사에게 소속시키니 여러 도에서 이를 본받았다. <중략> 이리하여 한번 위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빈 들판에 모아놓고 1,000리 밖에서 오는 장수를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므로 장수는 아직 때 맞추어 이르지 않았는데, 적은 이미 가까이 오게 되니 군심이 동요하여 반드시 궤멸하는 도리밖에 없다.
-유성룡의 상계-
① 진관체제
② 5군영체제
③ 속오군체제
④ 제승방략체제


[정답] ④

[해설]
진관을 중심으로 군대를 배치한 15세기 진관체제가 무너지면서 16세기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병력을 동원하는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으나 왜란을 맞아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자 왜란 중에 다시 진관체제를 복구하고 속오법에 의한 속오군 체제를 갖추었다.

※ 제승방략기(을묘왜변 전후~임진왜란 초기)
㉠ 배경 :
진관체제에서 정규군의 군사적인 기능은 약화되면서 허술한 방어체제를 보충하기 위하여 군사가 아닌 층까지 동원하여 전쟁에 임하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이 등장하였다.

㉡ 내용 :
유사시 각 읍의 수령이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약속된 지역(信地)으로 가서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京將)과 본 도의 병󰋯수사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 한계 :
각 읍의 군사가 약속지로 모여 대처하기 때문에 후방지역에는 군사가 없어 제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제2차 방어선이 없기 때문에 전멸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총동원체제인 제승방략은 임진왜란시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후기까지 진관체제 복구론이 등장하였다.

④ 진관체제 복구론(선조 28년, 1595) :
건주위 야인의 침입에 대한 대비로 도체찰사부가 개설되자 임란 이전부터 진관 체제 복구론을 주장했던 유성룡은 지방 군사력의 재건과 그 증강을 위해 진관체제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유성룡의 주장은 효종대 영장제의 실시의 밑거름이 되었다.

문 7. 다음 주장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시대적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결교(結交)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결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모두 노예이며 신첩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았다 하여도 죽는 것만 못하다.
-최익현, 포고팔도사민-
① 일본의 강제 합병조약 체결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② 을미사변을 계기로 개혁을 단행하여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③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④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정답] ③

[해설]
최익현의 활동을 단계별로 파악하면 쉽게 답이 나오는 문제이다.

※ 최익현의 위정척사활동 : 1860년대 통상반대론 → 1870년대 개항 당시-왜양일체론에 의한 개항반대 5불가소 → 1905년 을시늑약당시 을사의병장

※ 최익현의 포고팔도사민
아, 원통하도다! 오늘날의 국사를 차마 말로 할 수 있으랴. 옛날에 나라가 망할 때는 종사만 멸망할 뿐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망할 때는 인종까지 함께 멸망하는 구나. 옛날에 나라를 멸망시킬 때에는 전쟁으로써 하더니 오늘날 나라를 멸망시킬 때에는 계약으로 하는 구나. 전쟁으로 한다면 그래도 승패의 판가름이 있겠지만 계약으로 하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 지난 10월 20일의 변은 전세계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결교(結交)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결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인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만 인민은 모두 노예이며 신첩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았다 하여도 죽는 것만 못하다.

문 8. 다음은 울산 호적을 분석한 표이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단위:%)
시기 양반호 상민호 노비호
1729 26.29 59.78 13.93
1765 40.98 57.01 2.01
1804 53.47 45.61 0.92
1867 65.48 33.96 0.56
① 영조 때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② 정조 때 신해통공을 단행하였다.
③ 순조 때 공노비 6만여 명을 해방시켰다. 
④ 흥선 대원군은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정답] ②

[해설]
조선 후기 양반 수 증가, 상인노비 수 감소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상민의 경제적ㆍ사회적 부담이 증가되자 국가가 취한 조치를 물어보는 문제로 공무원 시험뿐만 아니라 수능, 한국사검정 등에서 자주 출제되는 주제이다.
② 정조 때 신해통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철폐함으로써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용해줌과 동시에 노론의 정치 자금줄을 차단하는 효과를 노린 조치이다.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 양반층의 증가 및 상민층과 노비층의 감소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면 국역 수행층이 감소하기 때문에 국가재정이 악화된다. 그러므로 국가는 국가재정확대책을 시행하게 된다.

① 균역법, ③ 순조 때의 공노비 해방, ④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법 시행 등은 모두 양반이 늘어난 상황에서 시행된 국가재정 확대책이다.
그러나, ② 신해통공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강조하여 시행된 조치이기 때문에 관련이 적다.

문 9. 다음 주장을 한 조선 후기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중국은 서양과 180도 정도 차이가 난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변두리로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변두리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은 땅에 따라서 모두 그러한 것이니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이다.
-의산문답-
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다.
② 신분이 아니라 재능과 학식의 여부로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③ 사람과 만물의 본성이 같지 않다는 ‘인물성이론’의 입장에서 자연과학을 탐구하였다.
④ ‘실옹’과 ‘허자’의 문답형식을 빌어 지금까지 믿어 온 고정관념을 상대주의 논법으로 비판하였다.


[정답] ③

[해설]
지문은 조선후기 중상학파(북학파) 실학자 홍대용의 주장이다.['의산문답'中 일부]
③ 북학파는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홍대용을 포괄하는 이용후생 학파는 ‘인물성동론’이 사상적인 기초가 된다.
※ 북학의 철학적 기초 -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 사람과 만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이 주장은 만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만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후생에 끌어들이는 발상을 유도하였다.

① 무한 우주설의 주장 :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무한한 우주 속에는 지구의 인간 말고도 다른 지적(知的)인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② 성리학의 극복 주장 : 기술의 혁신과 문벌제도의 철폐,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요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④ 보기 지문이 ‘실옹’과 ‘허자’의 문답형식을 빌어 지금까지 믿어 온 고정관념을 상대주의(相對主義) 논법으로 비판하였다.

※「의산문답」:
실옹(實翁)과 허자(虛字)의 문답형식을 빌어 지금까지 믿어 온 고정관념을 상대주의(相對主義) 논법으로 비판하였다.

문 10.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조선 태종 때에는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에 현존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세계지도 중 동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세조 때에는 양성지 등이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조선방역지도가 현존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정상기는 ㉢동국지도를 만들었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하고,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가. ㉠은 원나라의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추가한 것이다.
나. ㉡은 만주와 대마도를 포함하고 있어 당시 영토의식을 엿볼 수 있다.
다. ㉢은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어 있다.
라. ㉣은 100리를 1척으로 정하여 지도를 제작함으로써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① 가, 나
② 나, 다
③ 다, 라
④ 가, 라


[정답] ①

[해설]
다- ㉣대동여지도의 내용, 라- ㉢동국지도의 내용이다.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태종 2년, 1402) :
김사형·이무·이회 등이 아라비아 지도학의 영향을 받고 원나라의 「성교광피도」·「혼일강리도」와 한반도(⇨ 이회가 만든 「조선팔도도」)와 일본 지도를 첨가한 것으로 중국과 조선을 크게 유럽(100개), 아프리카(30개) 등도 그려진 세계 지도였다.

㉡ 조선방역지도 (명종)
ⓐ 현전 지도 : 유일하게 현존하는 원본 지도로서, 정척·양성지의 「동국지도」를 참조하여 만들었다.
ⓑ 만주·대마도 표기 : 주현의 명칭을 8도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표시하였으며, 만주와 대마도를 표기하고 있다.

㉢ 동국지도 (영조 연간) :
정인지의 후손 농포자(農圃子 ⇨ 농포문답 저술) 정상기가 제작한 것으로 최초로 백리척[100리를 1척으로 함]을 사용하여 지도 제작의 과학화에 기여하였다. 백리척 지도는 그 후 널리 유행되었으며, 뒷날 김정호에게 영향을 주었다.

㉣ 대동여지도
- 10리마다 방점 표시 : 도로에는 매 10리마다 점을 찍어 도읍과 도읍의 거리를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문 11. 다음 유적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여주 흔암리 유적지
○ 부여 송국리 유적지
○ 서천 화금리 유적지
① 신석기시대 초기 농경의 모습을 보여주는 석기 농기구와 잡곡 낱알이 발견되었다.
② 탄화미가 발견된 곳으로 청동기시대 일부 지역에서는 벼가 재배되었음을 보여준다. 
③ 철제 농기구가 발견된 곳으로 철기시대 농업기술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④ 삼국시대 수리시설의 자취가 발견된 곳으로 벼농사가 보급되어 갔음을 보여준다.


[정답] ②

[해설]
지문은 청동기 유적지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문 12. 발해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정혜공주 묘를 통하여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② 유득공은 남(南)의 신라와 북(北)의 발해를 남북국이라 하였다.
③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표방하였다.
④ 3성 6부는 구성 기관들의 명칭이 당과 같았으나 운영 방식은 달랐다.


[정답] ④

[해설]
④ 3성 6부 구성은 당의 체제이나 구성 기관의 명칭, 운영 방식 모두 당과 달랐다. 3성 6부는 구성 기관들의 명칭은 당과는 달리 유교식 명칭을 사용하였다.

① 굴식돌방무덤 : 정혜공주 묘 - 육정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혜공주 묘의 모줄임천장 구조는 고구려와 닮았으며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② 최초로 “남북국 시대”라는 표현을 쓴 저술은 유득공의 <발해고(1784)>이다.

③ 외교 문서 : 788년 발해의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고구려국왕 대흠무가 말하다”(高句麗國王大欽茂言)라고 하는 등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문 13.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
②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③ 19세기 말 조선 정부는 울릉도 경영에 적극 나서면서 타지 주민들의 울릉도 이주를 금지하였다.
④ 대한제국기에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키고 관할구역으로 석도(독도)를 함께 규정하였다.


[정답] ③

[해설]
③ 19세기 말 조선 정부는 울릉도 경영에 적극 나서면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울릉도 개척령(고종 19년, 1882) :
일본 어민들의 침범이 계속되자,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 조(條)> : 조선 초기에 최초로 무릉도(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별도로 기록하였다.(1454년) - 독도에 관한 최초 기록
<동국여지승람> :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1531)

② 안용복의 활약(숙종 22년, 1696) : 수군 출신 안용복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내쫓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승인받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 막부와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하고 적극적인 해방(海防) 정책을 시행하여 울릉도 경영에 나섰다. ⇨ 『해동지도』의 제작(울릉도와 독도 지도)

④ 울릉군 설치(고종 38년, 1900) : 울릉도에 군을 설치(1900)하여 군수 심흥택을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문 14. 다음 자료와 같은 시기의 경제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임금규정
  목수 1인당 매일 돈 4전 2푼,  조각장 1인당 매일 돈 4전 2푼, 기와장 1인당 매일 쌀 3승과 돈 2전
<중략>
석수(石手)
  서울 한시웅 782일, 개성 고복인 752일, 광주 송복남 577일 반,
  경기 정수대 694일, 충청 김순노미 168일
-화성성역의궤-
① 인삼재배농과 홍삼제조업이 성장하였다.
② 국가사업에서 부역노동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③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는 납포장이 줄어들었다.
④ 농촌을 떠나 도시나 광산 등에서 임노동자가 되는 농민이 늘어났다.


[정답] ③

[해설]
「화성성역의궤」에서 정조, 또는 지문 안 내용 중 임금 규정에서 조선 후기라는 것만 인식하면 문제는 쉽게 풀 수 있었다.
③ 정조때 장인등록제를 폐지하면서 국가에 장인세를 바치는 납포장이 늘어났다.
* 납포장의 증가 : 장인세만 부담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민간 수공업자가 증가하였다.

① 포삼(홍삼)제의 전개(정조 21년, 1797) :
조선 정부는 공용 은화를 마련하고 역관을 부양하려는 목적에서 역관과 경강 상인에게 홍삼 120근을 최대로 1근에 포삼세 200냥을 부과하는 포삼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만상과 송상을 배제한 채로 한정된 무역량과 높은 세금을 내야 했으므로 대량의 홍삼 밀조󰋯밀수출이 발생하는 등 19세기의 대청 무역에서 홍삼이 주요 수출 상품이 되었다.

② 16세기 이후, 부역제가 무너지면서~

④ 임노동자의 증가 :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황해도의 수안·충청도의 강경·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다.

문 15. 고려의 향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지방의 향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② 상장례 등 의례를 행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③ 매향 활동 등을 하는 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다.
④ 마을의 노동력이 동원될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정답] ①

[해설]
① 향소(鄕所)란 단어가 좀 생소하여 헷갈릴 수 있으나, 늘 강조하지만 이럴 경우 향소를 제끼고 향도에 대한 아는 지식에서부터 차분히 접근하면 쉽게 답이 나올수 있는 문제이다. 향소란 조선 시대에, 군현(郡縣)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으로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를 말한다.

향소는 고려 말기, 조선시대에 설치된 수령을 보좌하는 사족 중심의 향촌 운영 기구였다.

② 향촌 공동체적 기능 강화 :
지배층 중심의 향도에서 일반 백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농민 공동체 조직으로 변화하였다. 농민들은 자연촌을 기반으로 회음의식(會飮儀式)과 장례시의 부조를 행하면서, 향도는 신앙활동보다 향촌공동체적 모습이 부각되었다.

③ 불교신앙 가운데는 매향이라고 하여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는 신앙 활동이 있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나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때, 묻었던 향나무를 통해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매향활동을 하는 무리들을 향도라고 한다.

④ 불사(佛事)에 동원 :
향도는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불상, 사찰, 석탑을 세울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군현 단위의 공동 노동에 촌락의 지배층과 농민들이 협력, 결속하는 전통에서 나온 행위였다.

문 16. 조선시대 상업의 추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ㄱ. 15세기에 한양의 운종가에 시전이 세워지면서 시전상인들에게 사상을 단속하는 금난전권이 부여되었다.
ㄴ. 조선 후기에 장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그 시기에 활동했던 보부상은 국가로부터 행상 허가를 받아야 했다.
ㄷ. 순조 때 일어난 서울의 ‘쌀폭동’은 경강상인이 도성 안의 미전상인을 움직일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① ㄱ
② ㄱ, ㄴ
③ ㄴ, ㄷ
④ ㄷ


[정답] ④

[해설]
ㄱ. 조선 전기부터 상업을 독점해왔던 시전 상인들은 17세기 들어와 정부로부터 금난전권을 얻어내어 사상들의 활동을 얻어냈다.
17세기 초엽 이후 육주비전을 비롯한 대규모 시전에 청나라에 보내는 진공품(進貢品)을 조달하는 국역을 부담시키는 대신 그에 상응한 특권으로서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였다.

ㄴ. 조선 전기 장시는 주로 관허상인인 보부상(정확히 말하면 부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 보부상의 특권 :
보부상은 정부로부터 어염·수철·토기·목기(木器)·목물(木物) 등의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전매특권을 부여받았다.

ㄷ. 경강상인은 세곡 및 지대운송업에 진출하여 성장하였다. 여객주인은 외방읍별로 선상의 거래를 담당하는 양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시전의 수세청부인으로 기능하던 경강주인(京江主人)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는 주인권의 성장으로 시전체제로부터 독립성이 강화되고 시전체제에 대항하여 직접 난전, 도고활동을 도모하게 되었다. 그 예가 1833년 쌀폭동 당시의 동막 여객주인 김재순(金在純)이 미곡도고와 가격등귀를 도모한 경우이다. 1833년 서울의 쌀폭동은 서울의 미곡유통을 장악하고 있는 미전인(米廛人)과 여객주인, 경강무곡상(京江貿穀商)이 연합하여 도고를 행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문 17. 다음 내용이 반포된 시기를 연표에서 바르게 고른 것은?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제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이다.
제3조.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누린다.
<후략>
-대한국국제-
청일전쟁(1894) → (가) → 삼국간섭(1895) → (나) → 을미사변(1895) → (다) → 만민공동회(1898) → (라) → 영일동맹(1902)

① (가)
② (나)
③ (다)
④ (라)


[정답] ④

[해설]
지문은 대한제국의 대한제국 국제(1899)이다.

대한국국제(1899. 8. 17)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이다.
제3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한다.
제4조 신민이 황제의 군권을 침손할 경우는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본다.
제5조 황제는 육․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과 해엄의 권한을 갖는다.
제6조 황제는 법률을 제정하고 그의 반포와 집행을 명하며, 국내 법률을 개정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의 권한을 갖는다.
제7조 황제는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관의 봉급 제정 혹은 개정권과 행정 칙령을 내릴 권한을 갖는다.
제8조 황제는 문무관의 임명을 행하며 작위, 훈장 및 기타 영전을 수여 혹은 박탈할 권한을 갖는다.
제9조 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견, 주재하게 하며 선전, 강화 및 제반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갖는다.

문 18. 다음 주장을 한 조선 후기 실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농사를 힘쓰지 않는 자 중에 그 좀[蠹]이 여섯 종류가 있는데, 장사꾼은 그 중에 들어가지 않는다. 첫째가 노비요, 둘째가 과거요, 셋째가 벌열이요, 넷째가 기교요, 다섯째가 승니요, 여섯째가 게으름뱅이들이다. 저 장사꾼은 본래 사민(四民)의 하나로서 그래도 통화의 이익을 가져온다. 소금ㆍ철물ㆍ포백 같은 종류는 장사가 아니면 운반할 수 없지만, 여섯 종류의 해로움은 도둑보다도 더하다.
① 유통 경제의 발전을 통해 농촌 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다.
②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③ 역사에서 고금의 흥망이 시세(時勢)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파악하였다.
④ 관직은 적은데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많은 데서 붕당이 생긴다고 보았다.


[정답] ①

[해설]
지문은 중농학파 실학자 이익의 6좀이다.

* 나라를 좀먹는 6가지 폐단 지적 : 노비 제도·과거 제도·양반 문벌 제도·사치와 미신 숭배·승려·게으름 등 여섯 가지를 들었다.

①은 중상학파(북학파)의 주장이다. 유통경제의 활성화는 중상주의 학파(이용후생)의 주장이므로 이익의 주장과는 관련이 적다.

② 한전론(限田論) : 유형원의 균전제는 급격한 개혁으로 그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 대신에, 영업전(營業田)을 설정하여, 소농민들로 하여금 땅을 팔지 못하게 하는 제도였다. 즉,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한 다음,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였다.

③ 정통론에 대한 인식 : 실제로 대세를 주도한 나라는 정통으로 해야 하며 도덕적 선악을 통해 정통을 정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 『동사강목』에 영향

④ 붕당의 비판 : 붕당에 의한 당쟁을 비판했으며 당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관직 수는 적고 관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라 했다.

문 19. 국가의 호구 파악의 기준과 역의 징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으로만 묶인 것은?
ㄱ. 신라 민정문서에 의하면 남자는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다.
ㄴ. 고려에서는 편성된 호를 인구와 장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다. 
ㄷ. 조선에서는 경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기 위해 군인전을 지급하였다. 
ㄹ. 조선 성종 때에는 경작하는 토지 8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요역에 동원하도록 하였다.
① ㄱ, ㄴ
② ㄴ, ㄷ
③ ㄷ, ㄹ
④ ㄱ, ㄹ


[정답] ④

[해설]
ㄱ. 신라 민정문서에 의하면 인구는 각각 남녀를 구별하여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었다.
ㄴ. 고려에서는 편성된 호를 인구와 장정의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었다.
ㄷ. 조선에서는 경군(중앙군)- 군인전을 지급하지 않고 녹봉과 품계를 주었다.

문 20. 천문학의 발전과 관련된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구려 고분에서는 천문관측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별자리 그림이 확인된다.
② 신라에서는 천문관측이 제도화되어 서운관에서 천문학 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③ 고려에서는 천문관측을 담당한 관리들이 첨성대에서 관측 업무를 수행하였다.
④ 조선 초기에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하였다.


[정답] ②

[해설]
② 사천대(서운관)은 고려의 관제이다.

① 고구려 고분에서는 천문도가 발견되었다.

② 고구려 :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가 만들어졌고, 고분 벽화에도 매우 사실적이고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만들어진 별자리(장천 1호분, 덕화리 1․2호분, 각저총) 그림이 남아 있다.

② 서운관은 고려시대의 천문관측담당기구이다.
※ 서운관(書雲觀) 설치(충렬왕) : 사천대와 태사국을 합쳐 서운관을 설치하여 천문·역수(역의 계산)·측후(기후 측정)·각루(시간 측정) 등을 담당하였다.

③ 고려시대에도 개성에 첨성대가 있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태조 4년, 1395) :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돌에 새긴 천문도로, 제일 윗부분에 둥글게 원을 그려 하늘을 나타내고 그 안에 1,464개의 별들을 새겨넣은 것이다.
㉡ 고구려 천문도의 계승 : 원래 평양성에 돌로 된 천문도가 있었으나 오랜 병란의 결과로 없어졌는데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선포하자 어떤 사람이 옛 천문도의 탁본을 가져와 바쳤고, 이를 새로 관측한 천문결과를 바탕으로 수정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완성되었다.





사이버국가고시센터 문제 PDF 새탭에서 보기
사이버국가고시센터 문제 PDF 다운로드
사이버국가고시센터 문제 HWP 다운로드
사이버국가고시센터 정답 다운로드



댓글 쓰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