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12일에 시행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고려의 대외 교섭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남송은 연려제금책(聯麗制金策)을 수립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분쟁에 고려가 개입하기 를 희망했다.

② 광종은 후주의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백관의 의관을 독자적인 제도로 고치는 등 혁신정 치를 단행하였다.

③ 고려의 외교교섭은 외왕내제(外王內帝)였다.

④ 원효의 기신론소는 금나라에 반포되었다.

⑤ 고려와 일본의 물자교류가 활발했던 것은 현종 때였다.


답 ③ 

연려제금책(聯麗制金策), 외왕내제(外王內帝) 같은 한자용어로 수업생들이 어렵게 느꼈던 문제였다. 그러나 한자를 하나하나 풀면 오히려 그 뜻이 보이는 문제였다.

① 남송은 연려제금책(聯麗制金策), 즉 고려와 연합하여 금을 제어하려한 정책이란 의미로, 요와 금과의 분쟁이 아닌, 금과의 분쟁에서 고려가 개입하기를 희망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더라도 묘청의 금국정벌론 주장 당시 김부식이 했던 말(‘지금 금을 치는 것은 송에게만 유리하니 금에게 사대를 취하자’)을 떠올리면 좋겠다.

② 광종은 후주의 사신이 아닌,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하였다.

③ 외왕내제(外王內帝)란 밖으로는 왕을 칭하면서 안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지향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고려는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었으나 중국에 의존한 나라가 아니라 사실상 자주성을 강조한 나라이다. 그 예가 광종이 칭제건원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황제라고 한 점이다.

④ 원효의 기신론소는 요나라에 반포되었다.

⑤ 고려와 일본은 외교관계가 소극적으로 이루어져 물자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① 연려제금(聯麗制金) 책은 요나라가 아닌 금나라와의 분쟁에서 고려를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이다.

② 후주의 사신, 쌍기가 귀화하면서 과거제도가 시행된 것이지, 백관의 공복이 제정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광종은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중국식 문산계를 사용했으며 4색공복제도를 제정하였다.

③ 원래 황제의 옷이 황색으로 당사(唐史)에서는 황제의 옷은 적황색(주황색)으로 사용하고, 사서(士庶)는 웅황색,자황색,황색의 3황색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고려는 대외적으로 제후국으로서 왕을 칭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천자로서 ‘제(帝)’를 칭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특징이 있었다.

④ 원효의 <기신론소>가 금에 전해져 반포되었다.( X )
⇨ 원효의 <기신론소>가 요에 전해져 반포되었다.

⑤ 일본과는 현종 이후에 무역이 활발해졌다.( X )
⇨ 일본과의 무역 : 고려는 일본과 정식 국교를 맺지 않았으므로 양국의 관계는 매우 한산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민간 상인들이 방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가는 진봉무역이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2. 다음 제시된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읽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어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① 아미타를 전도해 불교의 대중화를 도모하였다.
② 철저한 수행을 선도해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다.
③ 흥왕사를 근거해 화엄종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④ 유불일치설과 심성의 도야를 강조했다.
⑤ 법화 신앙을 중점으로 백련 결사를 제창했다.


답 ②
지문은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중 일부이다. 이 문제는 정말 자주 출제된 문제라 쉽게 답을 찾았을 것이다.



⇨ 정답 : ② 철저한 수행으로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극복하였다. 

3. 다음 중 고려 후기 정국에 대한 동향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정치기구는 첨의부-4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② 충렬왕과 충선왕의 계승은 원나라 무종의 옹립과 관련이 있다.
③ 원의 기황후 세력이 충혜왕 정권을 위협했다.
④ 공민왕 12년, 흥왕사의 변을 계기로 외척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⑤ 충목왕 때 정치도감에서 활동한 정치관은 대체로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답 ④
공민왕은 자신의 측근 세력이었던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변’ 이후, 어느 권력에도 연루되지 않은 한미한 집안 출신인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 정답 : ④ 공민왕 12년 흥왕사의 변으로 외척세력이 강화되었다.
② 충렬왕과 충선왕의 왕위계승은 원 무종과 관련이 있다. ( O )
대각국사 p. 306 심양왕 즉위 : 충선왕은 이후 10여 년 간 원나라에 머물면서 회령왕(懷寧王) 해산(海山)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가 뒤에 원 무종(武宗)에 즉위하면서 심양왕(심왕)에 봉해졌다.

원에서는 세조(世祖)·성종(成宗)대의 안정이 무종(武宗)의 즉위를 계기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이후 멸망할 때까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는데, 그 여파가 고려 왕위의 문제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에 따라 충숙왕과 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번갈아 오르게 되었던 것이지만, 사실 이러한 소지는 앞서 충선왕(忠宣王)이 원에서 무종 옹립에 참여한 데에서 마련되었다.

④ 공민왕 12년 흥왕사의 변으로 공민왕의 측근 세력은 모두 제거되었다. 즉, 1363년(공민왕 12)에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으로 국왕 측근세력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김용이 처벌됨으로써 공민왕의 측근세력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는 공민왕 초의 반원개혁에 이어 측근정치의 극복이라는 점에서 고려 말 정치사의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

⑤ 충목왕대의 정치도감이 설치되어 권문세족의 토지 탈점에 맞섰다.

※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설치(동왕 3년 1347) : 입조하고 돌아온 이후 충목왕은 계림군공인 ‘왕후’를 책임자로 세족과 신진 사류 출신 34인으로 구성된 정치도감을 설치하였다.

4. 왕명에 따라 신숙주 등이 국가 왕실의 행사에 대한 의식의 절차를 규범화해 편찬한 것으로 옳은 것은?
① 국조보감
② 사성통고
③ 국조오례의
④ 내각일력
⑤ 해동제국기


답 ③
이 문제 역시 어느정도 공부한 수험생이라면 고민없이 답이 나왔을 것이다.



신숙주 왕실의 행사의식 절차를 규범화 ⇨ 정답 : ③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성종 5년, 1474) : 신숙주가 중심이 되어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 등의 5례를 기록하였다. 

5. 다음 중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명나라와 태종 이후로 관계가 좋아져 교류가 활발했다.
② 세종 때 4군 6진이 설치되어 오늘과 같은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③ 여진족에 대해 토벌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④ 화약 무기를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 하는 등 왜구 격퇴에 노력을 기울였다.
⑤ 류큐에 불경, 유교경전, 범종 등을 전해주어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답 ③
조선의 기본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는 섬기고 이웃한 나라와는 교류한다는 외교이다. 특히 여진이나 일본은 교린외교로 화전양면(和戰兩面)정책, 즉 회유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6. 역사의 의미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과거였던 사실(사실로서의 역사),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기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② 사실로서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현재까지 일어난 모든 과거의 사건을 말한다.

③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연구해 주관적으로 재구 성한 것이다.

④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역사사가 선정하고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⑤ 사실로서의 역사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이다.


답 ⑤
틀릴 이유가 없는 문제이다. 사실(事實)로서의 이유는 객관적 의미의 역사이다.



⇨ 정답 : ⑤ 사실로서의 역사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다.

7. 다음 중 청동기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청동으로 된 도끼 등의 공구가 출토되었지만 농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② 움집의 구조는 장방에서 둥근 모양으로 변천되었다.
③ 비파형 동검은 만주지방에서만 발견되었다.
④ 웅기 서포항 유적에서 발견된 호신부를 통해 당시 주술 신앙에 대해 알 수 있다.
⑤ 돌곽무덤과 움무덤을 사용하였다.


답 ①
② 움집의 구조는 둥근 모양에서 장방으로 변천되었다.
③ 비파형 동검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
④ 웅기 서포항 유적은 신석기 유적지이다.
⑤ 돌곽무덤〔돌덧널무덤〕과 움무덤〔토광묘〕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북한 고고학 용어이다. 움무덤〔토광묘〕은 초기 철기때 출현하였다.



⇨ 정답 : ① 청동기로 만들어진 농구는 출토되지 않았다. ( O )

④ 웅기서포항의 호신부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층 ⑤ 돌곽무덤은 돌덧널무덤의 북한어이며, 후기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움무덤은 구덩(널)무덤의 북한어이며, 널무덤은 신석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 제작되었으므로 답이 될 수 없다.

8. 다음 보기에 제시된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구릉과 넓은 못이 많아서 동이 지역 가운데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을 가꾸기에는 알맞지만 과일은 생산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았다.

(나)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원과 연못이 없어서 계곡을 따라 살며 골짜기 물을 식수로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서 힘들여 일구어도 배를 채우기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였다.
① (가) - 수렵 사회의 전통으로 제천행사가 12월에 있었다.
② (가) - 서옥제가 있었다.
③ (나) - 특산물로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했다.
④ (나) - 단궁이라 불리는 활,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했다.
⑤ (가), (나) -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다.


답 ①
 (가)는 부여, (나)는 고구려
② 고구려, ③ 부여, ④ 동예, ⑤ 부여는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하였고 고구려는 고대국가 (중앙집권국가)단계에서 멸망하였다.



⇨ 정답 : ① (가) 수렵사회의 제천행사가 12월에 있었다. ⇨ 영고

9. 신라의 영토가 확장된 시대 순이 바른 것은?
㉠ 금관가야  ㉡ 한강 유역 ㉢ 우산국
① ㉠ - ㉡ - ㉢
② ㉠ - ㉢ - ㉡
③ ㉢ - ㉠ - ㉡
④ ㉢ - ㉡ - ㉠
⑤ ㉡ - ㉠ - ㉢


답 ③ 
㉢지증왕 - ㉠ 법흥왕- ㉡ 진흥왕
서울시 문제는 고대국가의 사건 순을 상당히 난도있게 내는데 이 문제는 난이도 하로 출제하여 누구나 쉽게 답을 낼 수 있었다.



⇨ 정답 : 우산국(지증왕) ⇨ 금관가야(법흥왕) ⇨ 한강유역(진흥왕)

10. 보기의 사실을 근거로 추론한 내용 중 옳은 것은?
(ㄱ) 신문왕 7년(687) -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ㄴ) 신문왕 9년(689) -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였다.
(ㄷ) 성덕왕 21년(722) -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ㄹ) 경덕왕 16년(757) -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① 신문왕 때 귀족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② (ㄱ), (ㄴ)로 인해 국가 재정이 보다 약화되었다.
③ (ㄷ)의 지급으로 국가의 역역(力役) 파악이 강화되었다.
④ (ㄹ)의 실시로 귀족 세력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⑤ 토지 지배를 둘러 싼 대립이 국가와 농민 간에 있었다.


답 ③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함으로써 국가는 백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국가의 요역, 즉 역역(力役) 파악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 정답 : ③ 성덕왕 때 정전의 지급으로 인해 국가의 역역(力役) 파악이 훨씬 수월해졌다.

성덕왕 시기의 자연재해와 발해와의 긴장 관계가 계속 이어졌던 점에 주목하고 정은
역역·군역을 담당하는 가장 중심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정전은 군사적 방비를 위해 북방 개척 지역의 토지를 나누어주었던 둔전적인 성격의 토지였다.

11. 다음과 같은 정치 형태가 나타난 시기의 상황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정조가 죽고 순조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조의 유탁으로 김조순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여, 순조를 보필하게 되면서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중앙의 요직은 모두 이들 일족이 독점하였다. 그 뒤 조만영의 딸이 익종의 비가 되어 헌종을 낳자 헌종 때는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15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조순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가 되면서 다시 안종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였다.
① 붕당의 교체가 급격히 진행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②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균역법이 시행 되었다.
③ 비변사가 핵심 정치 기구로 자리 잡았다.
④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⑤ 인사관리를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답 ③ 
지문은 19세기  세도정치기에 대한 설명으로 이 시기 세도가들은 비변사와 5군영을 장악하였다. ①, ⑤ 숙종 ② 영조 ④ 효종때 상황이다.



⇨ 정답 : ③ 비변사가 핵심 정치기구였다.

12. 밑줄 친 그가 추진한 정책 중 옳지 않은 것은?
 나라에 제도로서 인정(人丁)에 대한 세를 신포(身布)라고 하였는데 충신과 공신의 자손에게는 모두 신포가 면제되었다. 이 법이 시행된 지도 이미 오래 됨에 턱없이 면제된 자가 매우 많았다. 근래에 와서는 무릇 사족이란 자는 모두 신포를 바치지 않고, 그 모자라는 액수를 평민에게 덧붙여 징수하여 보충하고 있었다. 는 이를 수정하고자 동포(洞布)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가령 한 종리에 2백 호가 있으면 매호에 더부살이 호가 약간씩 있는 것을 정밀하게 밝혀내어 계산하고, 신포를 부과하여 고르게 징수하였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면제되던 자라도 신포를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 박제형, 근세 조선 정감 -
① 정치기구를 재정비하기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② 전통적 공동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한 향약을 강화했다.
③ 『대전회통』,『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편찬했다.
④ 군정을 바로 잡기 위해 호포제를 실시했다.
⑤ 환곡을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했다.


답 ② 
지문은 대원군의 호포제(동포제)에 대한 설명이다.
② 대원군은 향약 강화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서원을 대거 정리하였다.



⇨ 정답 : ② ‘미풍양속을 계승하는 향약을 강화하였다.’는 대원군의 업적이 아니다.

13. 고종 때 시행된 군비증강사업을 실시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① 해군제 도입 - 원수부 창설 - 무관학교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② 원수부 창설 - 해군제 도입 - 징병제 실시 발표 - 무관학교 창설
③ 무관학교 창설 - 원수부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 해군제 도입
④ 원수부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 무관학교 창설 - 해군제 도입
⑤ 해군제 도입 - 무관학교 창설 - 원수부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무관학교 창설(1898. 7) ⇨ 원수부 창설(1899. 7) ⇨ 징병제 실시(1903. 3) ⇨ 해군제 도입, 해군 창설 이전에 양무호 도입(1903. 4)

㉠ 원수부 설치(1899. 7) : 서울의 방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시위대·호위대가 새롭게 개편되거나 창설되고, 이들 각 부대를 지휘하는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어 황제의 통솔을 받았다. 그 동안 일본군에 의해 왕궁이 점령당해 온 수모를 막고 지방의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원수부 안에 육군헌병대를 설치하였다. 이어 포병·공병(工兵)·치중병(輜重兵)·군악대 등이 설치되었다(1900). 황제는 대원수로서 복장도 프러시아식 군복을 착용하여 위엄을 높이고, 국가(國歌, 1902, 에케르트 작곡)와 어기(御旗; 태극기), 친왕기(親王旗) 및 군기(軍旗), 훈장(勳章; 태극장) 등을 제정하였다.

㉣ 해군 설치 계획 : 육군의 증설과 함께 해군의 신설을 계획하였으며 해군이 아직 창설되지 않았는데도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여 고종이 친히 ‘양무호’라고 명명하였다.

㉤ 징병제 실시 계획 : 지방군의 증액에 따라 모병(募兵)하였으나 농번기에 처한 농민들이 응하지 않을 경우 군인을 고용하여야 했고 이 비용의 충당을 위하여 농민들에게 수취하는 폐단도 야기되었다.

㉥ 무관학교의 설립(1898) : 군대의 증설로 사병을 훈련시키고 지휘하여야 할 초급지휘관의 양성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정부는 군대의 훈련을 독자적으로 하기 위하여 고빙하고 있었던 미국 및 러시아 교관을 해고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설립 직후 무관학교의 학도 중에는 많은 수의 보부상이 포함되었던 듯하다.

14.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던 해의 사건이 아닌 것은?
① 유인석 등이 13도 의군 결성
② 조선총독부 설치
③ 105인 사건
④ 헌병경찰제 실시
⑤ 경학사 및 신흥강습소 설치


답 ⑤
2010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이 되는 해라 매스컴에서 크게 다룬 주제라 1910년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했을 것이다. ⑤ 신흥강습소 설치는 1911년이다.

그러나 그해 일어난 사건을 찾는 과정에서 1910년 12월에 시작되어 근 2년간 전개되었던 105인 사건 때문에 헷갈렸을 것이다. 사실 1910년 12월에 일어난 안악사건을 확대하여 1911년 9월에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했다는 허위사실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을 비롯한 민족지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교수들마다 105인 사건을 1910년 안악사건으로 보기도 하고, 안악사건과 구별하여 1911년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문제는 결국 전적으로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답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는 불합리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역시 사실 1910년 4월과 1911년 4월이라는 두 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911년으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결국 객관식 문제는 문제에서 결정적인 오타를 내지 않는 한 복수정답이 되기가 어렵다.



안중근 순국, ‘1910년’이 아닌 것을 고르는 문제는 정말 애매하였다.

㉤ 안중근 의거(1909. 10. 26) :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10년 3월 6일 순국했다.

⇨ 정답 : ③ 105인 사건(1911)
③ 105인 사건은 1910년 12월 안악사건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911년에 105인에 대한 기소가 이루어졌으며 최종 판결은 1912년에 행해졌다. 즉, ‘105인 사건’의 시작은 1910년이지만, ‘105인’이라는 명칭은 1911년부터 등장한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p. 115
105인 사건
1911년,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려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조작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중심 인물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신민회의 해체(1911) : 일제는 안악사건(1910. 12)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으로 확대시키고, 신민회 평안도 지회의 회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애국 계몽 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하였고, 특히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했다(105인 사건, 1912). 이 과정에서 신민회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그러나 경학사, 신흥강습소 설치에 대한 이견도 있다.

<학설>
1910년 4월 미상
李始榮. 李東寧 등, 서간도 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 자치기관으 로 耕學社, 부속기관으로 新興강습소를 설치.
[출전] 일제하민족언론사론(최민지) p. 628 한국정치경제학사전
[출전] 개항 100년 연표자료집
[출전] 의병항쟁사

<학설>
1911년 4월 미상
李始榮·李東寧 등 柳河縣三源堡에서 耕學社 조직, 新興강습소 설립
[출전] 독립운동사 5

① 1910. 6~8 : 유인석 등이 13도 의군을 결성
※ 13도의군 (1910. 6~8)
① 도총재 유인석의 총지휘, 창의군(이범윤)과 장의군(이남기)으로 구성
② 우수리스크 근처에서 의병과 계몽운동 사이의 연합전선 성격
③ 유인석과 이상설은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할 계획
⇨ 고종에게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줄 것과 아령파천 건의

② 조선총독부 설치(1910. 8. 29)
④ 헌병경찰제(1910)

15. 남북한의 통일 외교 정책 추진과 관련된 내용 중 옳은 것은?
①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원칙에 합의하였다.

② 1990년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남한은 북방에 대한 외교 정책을 포기했다.

③ 평화통일의 3대 원칙에 따라 남북 간 화해·불가침 협정 등이 채택된 것은 1988년의 7·7 선언이다.

④ 1961년 5·16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 통일 논의가 제기되 었다.

⑤ 1982년 북한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은 1민족 2국가 2체제를 목표로 한 다.


답 ①
 이 문제는 출제자의 미숙함이 보여진다. 현대사의 중요한 통일정책을 제시하면서 가장 익숙하고 많이 출제된 7.4남북성명을 맞는 답으로 하여 별로 깊게 공부하지 않아도 답을 맞출수 있었다.



⇨ 정답 : ① 7.4 남북공동성명 ⇨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

16. 조선시대 사회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졌을 때 지방자치적으로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했고, 환곡제를 실시 해 농민을 구제했다.

② 범죄 중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③ 의료시설로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 동·서활인서 등이 있었다.

④ 재판에 불만이 있을 때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⑤ 농본 정책을 실시해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의 토지이탈을 방지하고 자 하였다.


답 ①
환곡을 국가가 실시한 제도이고 지방자치적으로는 사창이 실시되었다.



⇨ 정답 : ① 의창, 상평창은 지방자치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중앙 정부에서 실시하여 수도권에서만 실시되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환곡제 - 의창·상평창>
ⓒ 상평창의 의창 대체(세조 2년, 1457) : 의창이 기능을 상실한 후, 본래 물가 조절을 목적으로 고려를 계승하여 세조 때 설치(1457)된 상평창이 이를 대행하여 환곡업무를 담당하였고, 의창에서와 같이 모곡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상평창은 한성과 몇몇 도시에서만 활용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운영되지도 못했다.
<사창>
ⓑ 내용 : 국가에서 운영하는 환곡제와는 달리, 각 고을의 양반 지주(민간)에 의해 설치된 사창은 정부 소유의 의창곡에서 200석씩을 분급받아 농민들에게 2할의 이자를 받아 운영하게 하되 취식에 성적이 좋은 사장(社長, 사창 책임자)에게는 포상하기로 하였다.

17. 조선 전기에는 고려 시대의 농업 기술이 개량되면서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다음 중 옳 지 않은 것은?
① 밭농사, 조·보리·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다.
② 시비법이 발달해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③ 쟁기·낫·호미 등의 농기구가 개량되었다.
④ 목화의 재배가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다.
⑤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벼,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답 ⑤
이앙법의 전국적 확산은 조선후기 이후의 일이다. 이 역시 정말 너무 자주 나오는 문제이다.



⇨ 정답 : ⑤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벼, 보리 이모작이 가능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수리 문제 때문에 정부에서 이앙법을 금지하였으므로, 남부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8. 다음 중 군사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나.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①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② 지방 방어 체계의 강화를 위해 설치되었다.
③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었다.
④ 장기간을 근무하고 일정 급료를 받는 상비군이었다.
⑤ 병농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의무병제에 따라 편성되었다.


답 ④
 조선후기 중앙군 5군영 중 훈련도감에 대한 설명이다. 훈련도감은 장번급료병, 즉 장기간 근무하면서 급료를 받는 상비군이었다.



⇨ 정답 : ④ 장기간 근무하고 일정 급료를 받는 상비군의 형태였다.

2) 중앙 군제의 개편
① 훈련도감 :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장번급료병)으로서...

19. 다음 중 조선 시대 붕당정치의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붕당정치가 출현하였다.
② 중종이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해 붕당이 출현하였다.
③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이 정계에 진출해 붕당이 출현하였다.
④ 붕당은 학문의 경향과 상관없이 정치적 이념에 따라 결집하였다.
⑤ 사림 세력이 동인·서인으로 분열돼 붕당이 출현하였다.


답 ⑤
①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사화(士禍)이다.
② 선조때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해 붕당이 출현하였다.
③ 조광조는 붕당정치가 아니라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
④ 붕당은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이념에 따라 결집하였다.



⇨정답 : 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며 붕당이 출현하였다. ( O )

④ 붕당의 성립 (선조 8년 말, 1575) : 이준경 등의 재상들과 대립하던 낭관 집단이 서서히 재상으로 이관하면서 새로운 낭관 집단이 김효원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심의겸 등의 기성 사림김효원 등의 신진 사림이조전랑의 임명을 둘러싼 구조적인 갈등으로 인해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생겨났다. ⇨ ‘을해당론’

20. 다음 중 조선후기의 사회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향촌사회에서는 수령의 권한이 약화되었고, 관권을 맡아보던 향리의 역할도 비례하여 축 소되었다.
② 정조 때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능력을 발 휘했다.
③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도참 등의 예언 사상이 유행했다.
④ 양반 중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해 전호가 되거나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⑤ 지배층의 압제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벽서, 괘서의 형태에서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답 ①
①향촌사회에서는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관권을 맡아보던 향리의 역할도 상대적으로 커졌다.


⇨ 정답 : ① 향촌사회의 수령 권한이 약화되면서 관권을 맡아보는 향리의 역할도 비례 축소되었다. ( X )
㉡ 관권의 강화 : 18세기 이후, 점차 종래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 중심의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이 결집되지 못한 가운데,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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