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7일에 시행한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 1. 다음 ㉠~㉣에 들어갈 말을 바르게 배열한 것은?
○ 기원전 8~7세기 무렵에 ㉠ 도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 일반적으로 ㉡은 식량 채집 단계로부터 식량 생산 단계로의 변화를 낳은 농업혁명을 말한다.

○ ㉢과 뒤를 이은 ㉣을 대표적으로 유물로 하는 청동기 문화는 황하나 내몽골 지역의 것과는 구별되는 개성을 지닌 것이었다.
       ㉠        ㉡             ㉢           ㉣
① 벼농사 신석기혁명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② 벼농사 신석기혁명 세형동검 비파형동검
③ 보리농사 신석기혁명 세형동검 비파형동검
④ 보리농사 청동기혁명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해설>
정답 : ①

해설 :
㉠ 벼농사는 청동기 시대부터 본격화되었으므로, 기원전 8-7세기에는 벼농사가 본격화되었다.

㉡ 식량 생산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신석기 혁명이라 한다.

㉢ 비파형동검과 이를 계승한 세형동검은 중국식 청동검이나 북방 오르도스식 청동검과 구별되는 조립식으로 만들어졌다.



정답) ①

해설)
㉠ 8~7세기 무렵에 본격화된 것은 벼농사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활 용기의 발전에 힘입어 의식주 전반에 걸쳐 변화가 나타났다. 특히 농경기술이 발달하여 돌로 만든 보습·괭이, 나무로 만든 쟁기로 밭갈이를 하고 조 피 수수 기장 콩 보리 등을 재배하였으며, 일부지방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 벼농사를 지은 것을 확증해 주는 탄화미가 발견되고 있다.

㉡ 식량 채집단계에서 생산단계로 변화를 낳은 농업혁명을 신석기혁명이라 부른다.
신석기 혁명은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어 수렵 채취 단계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의 남경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어 잡곡류(벼농사 X, 조, 피, 수수의 잡곡류 경작)가 이미 신석기 시대에 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쓴 주요 농기구로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농경은 집 근처의 조그만 텃밭을 이용하거나 강가의 퇴적지를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에 있어서 중국 요령지방과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동일한 문화권으로, 또한 비중국계 청동기 문화로 해석하게 하는 대표적인 유물은 비파형 동검이다. 종래 비파형 동검을 요형식 동검 또는 만주식 동검으로 부른 것은, 이 문화가 우리 나라 문화와는 상관이 없는 중국 쪽의 청동기 문화로 인식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검이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20여개나 출토되고, 특히 부여 송국리에서 완전한 유물이 수습되고 있는 상황은 종래의 인식을 뒤바꿔 놓기에 충분하다. 비파형 동검이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고, 또한 시베리아 계통의 석관묘와 지석묘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파형 동검은 세형 동검의 전단계이고, 요령 지방과 한반도 그리고 만주의 장춘, 길림 지방이 동일한 청동기 문화권을 이루었고, 그 문화의 담당자는 예맥족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비파형동검문화는 한반도로 전파 혹은 유입되면서 세형동검(細形銅劍)이라는 독특한 한국식동검문화로 발전하였다.

문 2. 삼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② 저수지가 축조되고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③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④ 5월과 10월에 계철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해설>
정답 : ①

해설 :
제정일치는 청동기시대 단군조선 때의 일이며, 철기시대 삼한은 정치적 군장과 종교적 천군이 분리된 제정분리 사회였다.



정답) ①

해설)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삼한이라 한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는데,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원시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오답이다. 제정일치가 아니라 제정분리이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 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의 수릿날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곳곳에 저수지의 축조: 김제 벽골제, 상주 공검지)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 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철제 무기의 사용: 정복 전쟁의 활발로 인한 국가 규모의 확대 유발)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문 3. 다음 글에 해당하는 왕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 처음으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가 시작되었다.
○ 국호를 한자식 표현인 ‘신라’로 바꾸었다.
① 우산국을 복속시켜 영토로 편입하였다.
② 왕호를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꾸었다.
③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④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해설>
정답 : ①

해설 :
제시된 지문은 신라 지증왕 때의 일이다.

① 우산국 복속은 지증왕 때인 512년에 이루어졌다.
② 마립간 왕호는 내물마립간부터 사용되었다.
③ 이차돈 순교와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의 일이다.
④ 대가야 정복은 진흥왕 때의 일이다.



정답) ①

해설)
지증왕(500~514) 때 처음으로 소를 이용한 밭갈이가 시작되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국호도 신라로 바꾸었으며, 왕의 위호도 마립간 대신 중국식으로 ‘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신라 지증왕은 503년에는 이제까지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① 지증왕은 512년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② 내물마립간에 대한 설명이다. 내물 마립간에 대한 기록은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삼국사기》에는 '이사금'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 또는 후세의 군장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내물마립간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에서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朴), 석(昔), 김(金)의 삼성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③ 법흥왕에 대한 설명이다. 신라의 불교전래의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다. 초기의 전도자, 즉 신라불교 개척자로서의 명예를 지니게 된 것은 아도였다. 그는 인도의 승려로서 묵호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모례의 집에 숨어서 민간의 전도에 힘썼다. 민간에 전파된 불교는 신라귀족으로부터 비난받았으나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마침내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이라 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에 장사지냈다.

④ 진흥왕에 대한 설명이다.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후에 백제와 연합하였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문 4. 발해의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당과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돌궐과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② 일본과는 서경 압록부를 통해 여러 차례 사신이 왕래하였다.
③ 당에 유학생을 보냈는데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이 여러 명 나왔다.
④ 일본은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고려왕’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해설>
정답 : ②

해설 :
② 일본과의 교류는 동경 용원부를 지나는 일본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답)  ②

해설)
② 《신당서》의〈발해전〉에는 “발해의 대외교통로로 일본도·신라도·조공도·영주도, 그리고 거란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도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를 지나 오늘날의 러시아 연해주 남단 포시에트만의 크라스키노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길이다. 따라서 서경압록부가 틀린 지문이다.

발해는 당과 신라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처음에는 북으로 돌궐, 남으로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8세기 말 이후에는 신라 및 당과의 관계가 호전되어 산동성 등주에는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발해관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신라는 여러 차례에 결쳐 발해에 사신을 보냈으며 발해는 당으로부터 비단 서적 공예품을 수입하고 말 도자기 등을 수출하는 등 교역관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③ 발해의 문화는 당의 문화를 전통적인 고구려 문화 토대 위에 재구성하여 고구려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발해의 유학은 당에 간 유학생과 빈공과 급제하는 사람들로 발달했는데 발해의 6부명이 유교적인 이름으로 아화 된 것도 유교의 발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근래 돈화에서 발견된 정혜공주묘지와 중경터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지는 세련된 변려체로 쓰여 한문사용에 능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④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라고 천명하였고, 일본이 발해에 보낸 국서에도 발해왕을 때로는 ‘고려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문 5. 위정척사운동의 전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뒷받침하였다.
② 동도서기론과 문명개화론을 주장하였다.
③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 운동이 일어났다.
④ 일본과 관련하여 왜양일체론을 내세웠다.

<해설>
정답: ②

② 동도서기론은 온건개화파의, 문명개화론은 급진개화파의 사상적 기반이다.

① 1860년대 위정척사계인 이항로, 기정진 등의 통상반대운동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뒷받침하였다.

③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들여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이만손을 필두로 한 영남 유생들이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④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위정척사파인 최익현이 왜양일체론을 주장하였다.



정답) ②

해설)
동도 서기론은 서양의 크리스트 교와 외세는 일단 부정하지만, 침투해 들어오는 외세를 막기 위해 서양의 기술만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다. 이러한 동도 서기 사상이 등장한 배경은 개항을 전후하여 서양의 근대적 무기의 우수성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문명대화론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서양 문명에 대한 수용 논리로, 서양의 기술ㆍ기기만이 아니라 문화와 풍속까지 수용하여 낡은 폐습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기에 정답이다.

위정척사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衛正]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斥邪]'는 뜻이다. 여기에서 '바른 것'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사회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서양문물이다. 위정척사운동은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어 19세기말에는 항일의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주리론을 계승한 기정진의 이일원론(理一元論)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는 위정척사운동은 초기에는 이항로와 기정진 등이 주도하였고 그 후 유인석, 최익현 등이 계승하였다. 척사운동은 시기별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척화주전론 개항 이전인 1860년대에는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서양의 무력침략에 대항해서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뒷받침하였다.

왜양일체론  1870년대의 문호개방을 전후해서는 서양세력과 일본은 마찬가지라고 보는 왜양 일체론과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을 반대하였다. 일본은 이미 서양문물을 받아 들였으므로 서양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일본에 대한 개항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영남만인소운동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정책 추진과 <조선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개화반대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영남 만인소이다.
그리고 위정척사운동은 1890년대 이후 항일의병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문 6. 밑줄 친 ‘국왕’의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국왕께서 왕위에 즉위한 첫 해에 맨 먼저 도서집성 5천여권을 연경의 시장에서 사오고, 또 옛날 홍문관에 간직했던 책과 강화부 행궁에 소장했던 책과 명에서 보내온 책들을 모았다.… 창덕궁안 규장각 서남쪽에 열고관을 건립하여 중국본을 저장하고, 북쪽에는 국내본을 저장하니, 총 3만권 이상이 되었다.
① 통치규범을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② 당파와 관계없이 인물을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실시하였다.
③ 당하관 관료의 재교육을 위해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하였다.
④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창설하였다.

<해설>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정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면 된다.

② 완론탕평을 실시한 것은 영조이다. 영조는 자신을 스승이자 초월적 군주의 지위에 두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사를 등용하여 국왕에게 복종시키는 완론탕평을 추구하였다. 정조는 영조 때처럼 온건파 중심의 탕평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각 붕당의 공론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따지는 적극적 탕평인 준론탕평을 추진하였다.

① 정조는 법전의 재정비를 통해 국가의 집권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정조 대에 편찬된 법전은 『대전통편』(1785)이다.

③ 정조는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실시된 것이 초계문신제이다. 초계문신제는 신진 인물이나 당하관 이하의 중 ․ 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켜 등용하였던 제도이다.

④ 정조는 국왕의 친위대인 장용영을 설치(1785)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 장악하고자 하였다.



정답) ②

해설)
지문에서 설명하는 왕은 정조이다. 정조는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우리나라 책들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 책들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웠다.
사도 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 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이에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엄격하게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 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다.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이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 · 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한편,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화성 행차시에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다.
정조는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①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전통 문호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 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② 완론탕평은 영조에 대한 설명이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탕평이라 한다) 영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요순과 같은 고대 성왕을 자처하면서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이른바 탕평책을 썼다. 원래 탕평책은 붕당을 없애는 데 뜻이 있었지만 당장 그 실현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이를 완론탕평이라 한다. 탕평정책은 숙종의 환국형식의 왕권강화방식이 많은 부작용을 낳은 데 대한 반성으로 초당적 정치운용으로 왕권을 세우자는 발상이었다.

문 7. 다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삼사에서 말하기를 “지난 해 밀성 관내의 뇌산부곡 등 세곳은 홍수로 논 밭 작물이 피해를 보았으므로 청컨대 1년치 조세를 면제하십시오.” 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 향 부곡 악공 잡류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익안폐현은 충주의 다인철소인데, 주민들이 몽고의 침입을 막는데 공이 있어 현으로 삼아 충주의 속현이 되었다.
- 고려사 -
① 소의 주민은 주로 농사를 지었다.
② 부곡민은 조세를 부담하지 않았다.
③ 부곡민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④ 소의 주민이 공을 세우면 소가 현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해설>
정답: ④

④ 제시된 사료에서 다인철소(所)의 주민들이 몽고의 침입을 막는데 공을 세워 ‘익악폐현’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소(所)의 주민이 공을 세우면 소가 현으로 승격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① 소(所)의 주민은 수공업품 등의 생산에 종사하였다. 농업에 종사했던 것은 향 ․ 부곡의 주민들이다.

② 두 번째 사료에서 향 ․ 부곡 ․ 악공 ․ 잡류의 자식은 과거 응시가 허락되지 않았다고 나와있다.

③ 첫 번째 사료에서 뇌성부곡 등이 홍수로 피해를 입었으니 조세를 면해달라는 내용으로 보아 부곡민도 원래는 조세를 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답) ④

해설)
지문들은 『고려사』권80, 식화3 진휼 재면지제 숙종 7년 3월 『신증동국여지승람』권14, 충주목 고적으로, 고려시대 향 소 부곡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을 고르는 문제이다.
향·부곡·소는 고려시기에 전형있게 발달한 지방행정의 특이한 단위였다.
향·부곡은 고려이전 시기에 발생하여 고려초 태조대에 군현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크게 재편되었으며 이에 반해 소는 고려시기에 비로소 출현하였다. 발생의 시점에 차이가 있듯이, 그 성격에서도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모두 고려시기에 가장 전형적으로 발전하여 조선시기에 소멸해 간 점에선 일치한다.
향·부곡은 일차로 군이나 현으로 삼아 운영하기에는 전정(田丁)이나 호구(戶口)가 적은 곳, 즉 토지와 인구가 적은 곳에 설정되었다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독자성을 인정해 군현의 하부 촌락으로 편제하지 않았다.

① 이에 비해 소는 특정한 물품을 생산할 필요에서 설정한 것이었다. 소에서는 금·은·동·철의 광산물이나, 사(絲)·주(紬) 등의 직물, 종이·도자기·탄(炭, 숯)·먹 등의 수공업품, 생강·콩 등의 농산물, 소금과 물고기 등의 어엄물을 생산하였다 따라서 농사를 지었다는 설명은 오답이다.

② 고려 때 부세는 군현을 단위로 거둬들였다. 부세 수취 단위인 군현에는 일반 군현보다 사회 경제적 위상이 낮은 향, 부곡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조세를 부담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고려 때 공부는 각 군현에 속한 소의 생산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향·부곡·소에 거주하는 주민은 국학에 입학하거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승려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자손의 귀속에서도 천인과 같은 대우를 받는 측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 거주하는 민들의 신분을 한때 천인으로 분류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양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곳에 사는 민들의 사회적 처지는 군현민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곳에 거처하는 민들은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특정한 역을 부담하였다. 향·부곡민은 국가공유지를 경작하는 역을 부담하였으며, 소의 민인들은 특수한 물품을 생산 제조하는 역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향·부곡·소는 고정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현으로 승격되는 예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④이 옳은 설명이다. 향 소 부곡이 군현으로 승격되는 경우는 통상 국가에 공이 있는 자가 출현하거나, 고위관인을 배출하는 경우로 지극히 한정되었다. 향·부곡·소는 군현으로의 승격을 바라는 바였지만, 실제로 승격되는 예는 많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군현이 향·부곡·소로 강격되는 예도 종종 있었다. 이것은 승격과는 반대로, 국가에 해를 끼치거나 반역한 인물이 나왔을 때였다. 이렇게 강격되는 경우, 그곳 주민들은 군현으로 복귀해 줄 것을 강력히 희망하였다.

문 8. 다음 글은 다산 정약용이 당시 농민들의 실태를 지적한 것이다. 이 시기의 각 지역 호적대장에서 급증하는 호구는?
 지금 호남의 백성들을 볼 때 대략 100호가 있다고 한다면, 그 중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자는 불과 5호에 지나지 않고, 자기 토지로 농사짓는 자는 25호이며, 타인의 토지를 빌려 지으면서 지대를 바치는 자가 70호나 된다.
① 양반호
② 상민호
③ 노비호
④ 양반호, 상민호

<해설>
정답: ①

조선 후기에는 광작의 대두로 농민층이 분화하여 농민층은 소수의 경영형 부농과 다수의 임노동자 등으로 분화되었다. 제시된 자료를 보면 다른 사람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경영형 부농은 100호 중 5호로 소수이고, 타인의 토지를 빌려 지으면서 지대를 바치는 소작농은 70호로 다수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부농, 거상 등은 납속책, 족보 매입, 족보 위조 등을 통해 신분을 상승시켰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점차 군역을 담당하는 상민의 수가 급감하고 양반의 수가 급증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각 지역의 호적 대장에서 급증하는 호구는 ‘① 양반호’라고 할 수 있다.



정답) ①

해설)
다산의 글은 조선 후기로 당시 신분제가 해체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농민은 여러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층은 중소 지주층으로서 자기가 소유한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소작제로 경영하여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층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은 작은 규모의 자영농이거나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경작하고 소작료를 내던 소작농이었다.

조선 후기에도 지주의 대부분은 양반이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함께 양반 지주의 이윤 추구가 경제적 욕구를 자극하여 광작을 하는 대지주가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제 관계가 발달하자 일반 서민들 중에는 적기는 하지만 지주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지의 확대, 영농 방법의 개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해 갔다. 부를 축적한 새로운 지주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신분을 상승시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반이 되면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군역을 면할 수 있는 이익이 있었으며, 더욱이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피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제 활동에서 각종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경제력으로 양반 신분을 사들인 농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향촌 사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는 양반호가 급증하고 노비호가 줄어들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문 9. 다음 주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그러면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왜 정치적 생활이 없는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에게는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 지금까지 해 온 정치적 운동은 모두 일본을 적대시하는 운동뿐이었다.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선 내에서는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①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② 농민, 노동자를 단결시켜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
③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그 밑에서 정치적 실력 양성을 해야 한다.
④ 국제적인 외교를 통해서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알려야 한다.

<해설>
정답: ③

제시된 자료는 이광수의 <민족적경륜(1924)>이다. 1920년대 초반에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인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이광수 등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자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민족적경륜(1924)>은 그 일환으로 발표된 것이다. 자치운동은 절대독립‧독립전쟁 대신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운동으로서, 전체 민족운동에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 자치운동에 반발하여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여 1927년 신간회가 성립하였다.

① 자치운동은 신채호 등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인사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② 1930년대 이후의 혁명적 노동자, 농민운동의 구호이다.

④ 1920년대 초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독립운동노선이다.(외교독립론)



정답) ③

해설)
보기는 이광수의 민족적경륜이다.  이광수는 1922년에 쓴 <민족개조론>에서 우리 민족의 결점으로 허위, 비사회성, 이기심, 나태, 무신이 있음을 지적하고, 무실역행으로 산업발전과 교육진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1924년 <민족적경륜>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자치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민족개조론은 서구적 가치관을 주입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역사와 민족에 대한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독립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이러한 이광수와 일맥상통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그 밑에서 정치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자치론을 들 수 있다. 즉 자치론은 타협적 민족주의자 들이 부르짖은 주장으로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후에 차차 자치를 해나가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통일하자는 내용이다. 이 논리를 내세웠던 이광수와 자치론을 지지하던 민족주의자들은 다른 세력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① 무장독립투쟁론은 무장투쟁을 위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다. 1920년에는 유명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3부 통합 운동등이 있다. 또한 한인애국단(윤봉길) 의열단(나석주)의 테러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고, 1930년 조선혁명군(양세봉) 한국 독립군(지청천)이 중요한 활약역시 무장독립을 외친다. 이 밖에 무장독립투쟁운동은 광복 전까지 크게 활약한다.

② 사회주의에서는 농민 노동자를 단결시켜 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④ 외교론 열강과의 외교를 통해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리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주장이다.
이는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 김규식을 중심으로 이루어 진다. 활동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 국제연맹, 유럽과 미국, 수련, 중국 등을 상대로 외교 활동.특히 미국에는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문 10. 밑줄 친 ‘그’의 활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는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한성으로 올라와 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시위대 장교로 군인생활을 시작하였다. 강화도 진위대 대장시절에는 공금을 횡령한 강화부윤이 자신을 모함하자, 군직을 사임하기도 하였다. 는 군인이면서도 계몽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세워 근대적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전후하여 무력항쟁과 친일파 대신 암살 등을 계획하였으며, 강화 진위대가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봉기하자 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①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②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③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진단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④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라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해설>
정답: ③

‘그’는 이동휘(1872∼1935)이다.

③ 신규식에 대한 설명이다. 신규식은 1915년 박은식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가와 연결하였으며, 잡지 <진단(震壇)>을 발행하였다.

①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된 것에 반발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된 후 석방되어 그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② 한인사회당은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1918년 조직되었으며,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④ 1914년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조직된 독립군 조직이다.



정답) ③

해설)
밑줄 친 그는 이동휘이다.

① 신민회는 한말의 정치 사회단체 중 끝까지 친일을 거부하면서 실력양성의 실효를 거두었는데,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등 평안 함경도 출신과 신채호 이동녕 등 충성도 인사들이 비밀결사로 조직한 단체이다.

④ 1910년 이후 이상설 이동휘 등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라는 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② 그리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18년 이동휘 등은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1921년 고려 공산당으로 개명함)

③ 신규식은 1915년 박은식과 더불어 대동보국단을 조직하고 <진단>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따라서 오답이다.

문 11. 다음과 같은 혼인 풍습이 있었던 나라의 사회상으로 옳지 않은 것은?
 혼인하는 풍속을 보면, 구두로 약속이 정해지면 신부집에서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婿屋)이라 한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집 문 밖에 와서 이름을 "P히고 꿇어앉아 절하면 안에 들어가 신부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신부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 자도록 허락한다. …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 삼국지 -
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다.

② 남의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소나 말 등으로 변상을하는 책화 라는 풍습이 있었다.

③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다.

④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해설>
정답 : ②

해설 :
제시된 지문은 고구려 서옥제의 모습이다. ② 책화는 동예의 풍속이다.



정답) ②

해설)
서옥제는 고구려의 특징이다. 서옥제는 혼인을 정한 뒤 신부 집의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고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B.C.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 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약탈 정복 경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가의 국내성(통구)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부전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다.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중앙 왕 이외에 지방의 대가들도 독자적인 관료 조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여러 명의 대가들이 모여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② 동예의 책화이다. 동예는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씨족 사회의 폐쇄적 유습)

문 12. 다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시기의 역사적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허생은 안성의 한 주막에 자리 잡고서 밤, 대추, 감, 귤 등의 과일을 모두 값을 배로 주고 사들였다. 그가 과일을 도고하자, 온 나라가 제사나 잔치를 치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과일값은 크게 폭등하였다. 그는 이에 10배의 값으로 과일을 되팔았다. 이어서 그는 그 돈으로 곧 호미, 삼베, 명주 등을 사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가 말총을 모두 사들였다. 말총은 망건의 재료였다. 얼마 되지 않아 망건 값이 10배나 올랐다. 이렇게 하여 그는 50만 냥에 이르는 큰 돈을 벌었다.
① 보부상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혜상공국이 설치되었다.
② 특정 상품들을 독점 판매하는 도고상업이 성행하였다.
③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선박을 이용한 운수업도 발전하였다.
④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를 토대로 한 사상들이 성장하였다.

<해설>
정답: ①

제시된 자료에서 허생이 도고(都庫) 활동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도고(都庫)는 조선 후기 상품의 매점매석을 통하여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던 상행위 또는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이나 상인조직을 말한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모습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면 된다.

① 혜상공국은 1883년(고종 20) 개항 이후 상업 자유화에 밀려 생업에 위협을 받게 된 부보상(負褓商)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으로, 제시된 자료보다 뒷 시기의 사실이다.

②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都庫)가 출현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도고(都庫)의 성장으로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나게 되었다.

③ 조선 후기의 사상(私商)인 경강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巨商)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미곡 ․ 소금 ․ 어물 등의 운송과 판매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하였으며, 선박의 건조 등에도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혔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상업의 활성화로 선박을 이용한 운수업이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④ 18세기 이후 사상(私商)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 평양 ․ 의주 ․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의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정답)  ①

해설)
혜상공국은 1883년이다. 당시 정부는 국내상인의 경쟁력을 강하하기 위하여 동업조합으로서 상회사를 건립하도록 유도하였다. 관료와 객주 및 일반상인이 참여한 상회사는 평양의 대동상회, 서울의 장통상회를 비롯하여 30여개에 달했는데 이들은 영업의 독점권과 세금징수권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았다. 그리고 영세상인인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해 혜상공국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오답이다.

지문의 허생이 묘사하는 바는 조선후기 상업경제발달에 관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도 활성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리 확산된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는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보다 촉진시켰다. 더구나 조선 후기에는 인구와 자연 증가뿐만 아니라 농민의 계층 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에서 유리된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업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처음에는 공인들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에는 사상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들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상의 성장은 이 시기에 전국적으로 발달한 장시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장시는 지방민들의 교역 장소로, 인근의 농민 수공업자 상인들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장소에 모여 물건을 교환하였는데, 보통 5일마다 열렸다.

③ 조선 후기에 상업 중심지로서 새로이 성장한 곳이 포구이다. 포구에서의 상거래는 장시에서의 그것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도로와 수레가 발달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물화의 대부분이 육로보다는 수로를 통하여 운송되었다. 종래의 포구는 세곡이나 소작료를 운송하는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선상은 선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구입해 와 포구에서 처분하였는데, 운송업에 종사하다가 거상으로 성장한 경강 상인은 대표적인 선상이었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문 13. 다음과 같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신 부식은 아뢰옵니다. 옛날에는 여러 나라들도 각각 사관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 해동의 삼국도 지나온 세월이 장구하니, 마땅히 그 사실이 책으로 기록되어야 하므로 마침내 늙은 신에게 명하여 편집하게 하셨사오나, 아는 바가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①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② 기전체로 서술되어 본기, 지, 열전 등으로 나누어 구성되었다.

③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는 신라 계승 의식이 좀 더 많이 반영되었다고 평가된다.

④ 몽골 침략의 위기를 겪으며 우리의 전통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움직임에서 편찬되었다.

<해설>
정답: ④

제시된 사료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올린 글이다.

④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인 1145년에 편찬된 역사서로, 몽골 침략 이전에 편찬된 것이다. 원 간섭기에 들어 민족적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 인식에 입각하여 편찬된 역사서는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이 있다.

①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이다.

② 『삼국사기』는 본기, 연표, 지, 열전으로 구성된 기전체 역사서이다.

③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백제와 연결된 고조선, 삼한의 역사를 삭제하고 고려 왕의 대부분이 신라 경순왕의 후손임을 강조하여 신라 계승 의식을 반영하였다.



정답) ④

해설)
보기의 지문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이를 왕에게 아뢰는 진삼국사기표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은 고려 중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삼국사기가 편찬된 배경은 아래와 같다. 고려의 건국은 좀더 도덕적인 사회를 재건하고 후삼국으로 분열된 주민들을 재통합하여 민족통일을 한 단계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 그 후예들이 세운 발해의 유민들을 포용하여 민족의 대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고려 전기 200년간을 지배했던 이와 같은 역사의식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토를 확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거란과의 전쟁을 마감하고 송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도 좀더 유려하고 세련된 유교정치를 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인종 대에 이르러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금이 새로이 등장하여 고려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국내정치에 새로운 파동이 일어났다. 국제평화와 유교정치에 의해 주춤해진 북진정책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니, 묘청을 대표로 하는 이른바 서경파 지식인의 반란이 그것이었다. 개경에 있는 유학파 관료와의 권력 투쟁적 요소도 함께 지닌 묘청 일파의 반란은 결국 대세에 밀려 유학파에 의해 진압되고, 고려는 다시금 유교정치의 고삐를 다그치게 되는데, 바로 유교정치의 재확립을 목표로 하여 관찬으로 편찬된 새로운 역사책이 김부식 등 11명의 유학자 관료들에 의해 쓰인 「삼국사기」였다.

①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역사서로서,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② 기전체로 서술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하게 표방하였으나, 중기에 이르러 신라 계승 의식이 강화되었는데, ③삼국사기에는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④ 대몽 항쟁을 겪으면서 고려 중기 보수화, 사대화 경향을 띠었던 역사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주적 역사관이 부활하였다. 삼국유사[일연], 제왕운기[이승휴]는 단군에 대한 기록으로 민족 자주성을 강조, 해동고승전[각훈], 동명왕편[이규보]는 문화적 자긍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문 14. 삼국시기의 고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구려 돌무지무덤 : 백제 초기 무덤에 영향을 미쳤다.
② 백제 벽돌무덤 :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③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돌만 쌓았다.
④ 굴식 돌방무덤 : 삼국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을 조영했다.

<해설>
정답 : ③

해설 :
③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덧널 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까지 쌓아 만든 것이다.



정답) ③

해설)
① 고대 사회와 문화를 옛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은 무덤들이다. 삼국은 다양한 무덤을 많이 남겼다.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돌무지 무덤이란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인데,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만들어졌다. 돌을 정밀하게 쌓아 올린 돌무지 무덤은 만주의 집안(집안) 일대에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7층까지 쌓아 올린 장군총이 대표적인 무덤이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② 백제 벽돌무덤 백제의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꿔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사비 시기의 고분은 규모가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백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에도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이런 그림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보다 부드럽고 온화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④ 굴식돌방무덤은 돌로 1개 이상의 방을 만들고 그것을 통로로 연결한 무덤으로 앞방과 널방으로 구분한 것이 일반적이고, 벽의 표면에 벽화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백제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꿔었다.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을 많이 만들었으며, 삼국 통일 직전에는 굴식 돌방무덤도 만들었다.

③ 돌무지 덧널 무덤은 신라에서 주로 만든 무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댓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오답이다.

문 15. 다음과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시행한 정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농민의 조세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양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① 양전 사업 실시
② 군적수포제 실시
③ 연분 9등법 실시
④ 오가작통제 실시

<해설>
정답: 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으로 인한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이 농경지의 황폐화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전국의 토지 결수는 150만 결이었는데, 직후에는 30여만 결로 크게 줄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권장하면서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전세를 확보하기 위해 토지 조사 사업도 서둘렀다. 이것은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빠진 토지를 찾아내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자료에 제시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조선 정부의 대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양전 사업 실시’라고 볼 수 있다.



정답) ①

해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전란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기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경감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양반 지배층은 정치적 다툼에 몰두하여 민생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을 드러내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양 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토지 제도의 문란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전국의 토지 결 수는 150만 결이었는데 직후에는 30여만 결로 크게 줄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권장하면서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또한 전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도 서둘렀다. 이것은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빠진 토지를 찾아내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따라서 양전사업을 실시하였다는 ①이 정답이다.

② 군적수포제는 양난 이후가 아니다. 원래 조선시대 군역의 원칙은 양인 개병제와 농병일치제였다. 그러나 보법이 시행되면서 군역의 요역화가 일어나고 군역의 요역화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 사이에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 시키는 대립제가 성행하였다. 대립제는 농민이 대립가를 소속된 기관에 납부하면 담당관이 그것으로 노비나 유민을 사서 대립케 하는 방군 수포의 형태로 행해졌는데 이 대립가가 지나치게 가혹하여 농민들의 군역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방군 수포를 양성화하여 군적 수포제를 실시하였다. 군적 수포제는 농민들이 군사 훈련을 받지 않고 대신 군포를 납부하는 제도였다. 그러므로 실제로 군사 훈련을 받는 군인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란을 겪자, 정부는 임시 방편으로 훈련도감을 실시하여 용병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번상병이 직업군으로 대체되면서 농병 일치제는 무너지고 용병제가 도입되었다.

③ 세종대의 일이다. 조선 전기이니 오답이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④ 오가작통제 역시 조선 전기의 일이다. 촌락은 농민 생활의 기본 단위일 뿐만 아니라 향촌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자연촌으로 존재하면서 동, 이(里)로 편제된 조직이다. 정부에서는 자연촌 단위의 몇 개 이(里)를 면으로 묶은 면리제와 오가작통제를 통하여 촌락 주민에 대한 지배를 원활히 하고자 하였다. 오가작통제는 서로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여기에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문 16. 공민왕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① 만권당을 설립하여 문물교류를 진흥하였다.
② 성균관을 부흥시켜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다.
③ 명의 철령위 설치 요구로 인해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④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구r가 재정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해설>
정답: ②

② 공민왕은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부흥시켜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과거제도를 정비하여 이를 통해 신진사대부를 대거 등용하여 관료 체제의 정비를 추진하였다. 

① 충선왕 대의 사실이다. 충선왕은 원나라 연경에 독서당으로서 만권당을 설치하여 조맹부, 염복, 원명선 등과 고려의 이제현 등이 상호 교류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③ 우왕 대의 사실이다. 명(明)은 공민왕 때 수복한 철령 이북의 땅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해왔다.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대해 최영은 이인임 일파와 함께 즉각적인 출병을 통해 요동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는 4불가론을 제시하며 출병에 신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개경으로 돌려 최영과 반대파 권문세족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위화도 회군(1388)이다.

④ 충목왕 대의 사실이다. 충목왕은 개혁 기구로서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토지 겸병, 노비, 피역(避役) 등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인 기삼만(奇三萬) 등의 반발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공민왕 대의 개혁 기구는 ‘전민변정도감’이다.



정답) ②

해설)
원 간섭기 동안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의 인사와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 때부터 시도되었으나, 원의 간섭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어 공민왕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아울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공민왕은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 교육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정답이다.

만권당은 충선왕이 세운 것이다. 원나라에 머물기를 원한 나머지 끝내 고려왕의 지위마저 포기한 충선왕은 연경에 머물면서 만권당을 세우게 되는데, 이 만권당을 통해 고려의 학문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것은 충선왕 자신이 학문을 좋아했던 까닭에 도서관을 세우고 원나라의 많은 학자들과 교분을 얻기 위해 설립할 목적으로 세운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교류가 고려 후반기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계에 대한 설명이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한편, 북쪽으로부터 흥건적(1359~1361)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와 연합하여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으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정치도감 1347년(충목왕 3)에 설치되었던 폐정개혁기관이다.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한 상태에서 충목왕이 8세로 즉위하자, 나라를 바르게 하자는 ‘부정삼한(復正三韓)’의 주장 아래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여기에는 고려의 폐정개혁에 큰 관심을 표시한 원나라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현이 시폐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왕후가 우정승에 취임해 개혁적 시책을 베풀었다. 이에 정방이 혁파되고, 녹과전이 복구, 정비되었다. 그러나 반대세력 때문에 개혁시책은 성공되지 못하고, 왕후도 1345년(충목왕 1)에 파직되었다. 1346년 12월 왕후는 원나라로 가서 순제로부터 고려의 폐정개혁에 대한 명령을 받고 돌아와, 1347년 2월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활동을 벌였다.

문 17.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모습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기 위한 기구였다.
② 향안은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③ 경제적으로 성장한 일부 부농층은 향회를 장악하며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④ 세도정치기에 향회는 수령과 향리들을 견제하고 지방통치를 대리하는 기구로 성장하였다.

<해설>
정답: ④

④ 18세기 이후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이와 함께 관권을 맡아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종래 재지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물어보는 자문기구로 전락하였다. 그러므로 세도 정치기에 향회가 수령과 향리를 견제하고, 지방통치를 대리하는 기구로 성장했다는 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① 유향소는 향촌 사회에서 수령 보좌, 향리 감찰, 풍속 교정을 수행하던 기구였다.

②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재지사족의 명단인 향안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려면 친족, 처족에 신분적 하자가 없어야 하며, 일단 향안에 오르면 향촌에서의 신분적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다.

③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기존에 영향을 행사하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았다. 경제력을 갖춘 부농층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여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정답) ④

해설)
향촌은 중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향은 행정 구역상 군현의 단위를 말하며, 촌은 촌락이나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초기에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부, 목, 군, 현을 두어 각각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또 군, 현 밑에는 면, 이(里)등을 설치하였으나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됐지는 않았다.

① 지방 자치를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유향소였다. 유향소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다. 경재소는 중앙 정부가 현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제도로서 중앙과 지방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유향소와 경재소는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가 분화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경재소가 혁파되면서(1603) 유향소는 향소 또는 향청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고 향촌 질서 역시 변화하였다. 향소의 구성원은 향안을 작성하고 향규를 제정하였다.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들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는데 이들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였다. (향교 학생의 명단:청금록, 부거안: 과거 응시자 기록)
지방 사족은 그들 중심의 향촌 사회 운영 질서를 강구하고 향약 등의 보급을 통하여 면리제와 병행된 향약 조직을 형성해 나갔다.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에 의하여 처음 시행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향안, 향규, 향약 등은 군현 내에서 지방 사족이 그들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향촌 사회를 지배하였던 사족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부농층은 관권과 결탁하여 성장의 기반을 굳건히 하면서 향안에 참여하는가 하면 향회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 후기 향촌 사회는 관권이 강화되고 아울러 관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향리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주로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물어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하였다. 따라서 ④이 옳지 않다.

문 18. 조선후기 과학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유클리드 기하학을 중국어로 번역한 기하원본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② 지석영은 서양의학의 성과를 토대로 서구의 종두법을 최초로 소개하였다.
③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지도가 전해짐으로써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리학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④ 서호수는 우리 고유의 농학을 중심에 두고 중국 농학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한국 농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해설>
정답: ②

② 제너의 종두법을 최초로 소개한 것은 정약용의 『마과회통』(1798)이다.

① 조선 후기에는 마테오 리치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도입되었다.

③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이전에 비해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④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서호수가 편찬한 『해동농서』에 대한 설명이다. 『해동농서』에서는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되, 우리 토양과 기후에 맞게 농법을 개량할 것을 주장하였다.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등의 체계를 계승하였으며, 중국의 농서도 참조하여 남북의 농법을 모두 종합하였다.



답) ②

해설)
② 서구의 종두법을 최초로 소개한 것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여러 마진에 관한 서적을 정리하여 마과회통을 저술하였다. 특히 그는 박제가 등과 더불어 종두법을 처음으로 연구 실험하였다. 이러한 의학전통은 고종년간에 와서 더욱 발전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수학도 일정하게 변하였다. 서양의 수학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기하원본>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기하학과 대수학 등 서양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나타났다. 17세기 말 최석정은 <구수략> 이라는 수학책을 써서 무한대오 무한소의 수학개념을 해명하였으며, 대수 기하 및 삼각과 관련된 실학적 문제들을 풀어냈다. 홍대용도 서양 과학의 본질은 실험기구와 수학에 있다고 생각하여 <주해수용>이라는 수학책을 썼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④ 17세기에 이르러 농업 경영과 농업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농서가 편찬되고 농업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17세기 중엽에 신속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그 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업의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곡물 재배법뿐만 아니라 채소, 과수, 원예, 양잠, 축산 등의 농업 기술을 소개하는농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박세당은 색경을, 흥만선은 산림경제를, 서호수는 해동농서를 저술하여 농업 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농학의 전통 위에서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을 반영하고 중국의 농업기술까지도 수용하여 전제, 수리, 농기에 관한 문제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농학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문 19. 밑줄 친 ‘그’의 저술로 옳은 것은?
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영주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문무왕의 정치적 자문도 맏았다. 그는 모든 우주만물이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조화하고 포용하는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해 유명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는 독특한 논리를 폈다. 즉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① 십문화쟁론
② 해심밀경소
③ 천태사교의
④ 화엄일승법계도

<해설>
정답 : ④

해설 :
제시된 지문은 의상과 관련된 것이다.

④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다.
① 『십문화쟁론』은 원효의 저술이다.
② 『해심밀경소』는 원측의 저술이다.
③ 『천태사교의』는 고려 광종 때의 승려 제관이 천태종의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쓴 책이다.



정답) ④

해설)
의상의 화엄종 선종이 들어오기까지 신라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이 가장 선호한 불교 종파는 화엄종이었다. 신라 화엄종을 연 승려가 의상이다. 의상은 당나라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제 2조인 지엄한테 화엄학을 배웠으며, 지엄과 함께 수학하여 스승의 계승자가 된 법장의 존경을 받았다. 의상은 귀국한 뒤 태백산에 부석사를 세우고, 오진, 진통, 표훈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화엄종은 본래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시지만, 의상이 창건한 화엄종의 근본 도량인 부석사 금당은 무량수전이고, 그 안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오악을 위시한 전국 각 명산에 화엄계통의 사찰을 세워 전교하였는데 이 열곳의 사찰을 화엄십찰이라 한다.
의상은 원융사상(만물 포괄, 둥글다)을 바탕으로 화엄종을 개창하였는데 신라 화엄사상을 대표하는 의상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이 자료를 보면 하나가 곧 일체이며, 한작은 티끌속에 시방(十方)이 있는 것이요, 한 찰나가 곧 영원이라고 한다. 양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있지만 양은 실은 하나이며, 공간은 시방으로 너르게 되어 있지만 한 작은 티끌 속에 포함되며 시간에서 영원한 것도 한 찰나라하는 것이다.

① 십문화쟁론은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 원효가 불법을 논술한 책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지배층 중심의 통화사상인 반면 한차원 높여 대립을 통일하려고 한 원효의 화쟁사상은 일반 민중 중심으로 한 화합사상이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원칙에서 출발하는데, 성인 뿐 아니라 악인도 성불 할 수 있다고 한 원효의 주장은 고통받던 당시 민중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정토왕생은 원래 일반 사람들을 위한 것이며, 부차적으로 성인을 위한 것이라 가르쳤다. 원효는 모든 사람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인간 평등이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 곧 극락에 왕생하기 바라는 신앙을 정토신앙이라 한다. 단지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신라의 일반 민중에서 크게 감명을 주어 널리 퍼졌다.
원효는 신라 불교계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불교권 전체의 기본 과제였던 대승불교의 2대 조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사이의 교리적 대립, 곧 공(空), 유(有)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종합불교로서의 독창적인 교학을 이루었다. 원효는 두 극단을 버리고 양자를 종합하여야 한다는 화쟁논리에 따라 세계는 오직 한 마음이라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② 해심밀경소는 신라 중기의 승려 원측(613∼696)이 저술한 책이다.

③ 천태사교의는 고려 광종 때의 승려 제관이 천태종의 교판인 오시팔교를 차례로 배열,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문 20. 1960년대의 경제 상황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다.
②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베트남 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③ 미국의 무상 원조가 경제 개발의 주요 재원으로 활용되었다.
④ 경제 건설에 필요한 재원 조달을 위해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해설>
정답: ③

③ 1950년대 원조경제의 상황이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로 삼백산업[밀가루(제분)‧설탕(제당)‧면직물(면방직 공업)]이 성장하였다.

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진행되었으며, 경공업 중심이었다.

②④ 박정희정부는 출범하자 곧 ‘경제제일주의’와 ‘조국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경제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에 최우선을 두었다. 한일국교문제는 김종필과 오히라 외상의 비밀교섭에서 ‘독립축하금’의 형식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재정 차관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으로 낙착되었다. 진심어린 사죄와 보상이 없는 한일국교정상화는 당시 국민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한일협정이 체결될 무렵 미국의 강력한 파병요청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에 파병을 하게 되었다.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브라운 각서를 통하여 국군의 전력 증강과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제공을 약속받았다. 베트남 파병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는 등의 폐단을 남겼고, 한편으로는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베트남에는 건설업체도 진출하여 인력수출의 길이 트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인력과 장비가 중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정답) ③

해설)
③ 미국의 원조는 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미국원조에 의해 성장된 산업은 주로 소비재 공업이다. 이른바 삼백산업이라 하여, 밀가루 설탕 면화산업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몇몇 기업이 정부의 특혜 속에 삼백산업을 일으켜 재벌로 성장하고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 소비재 산업으로 극도의 궁핍은 벗어났으며 5-8%의 경제성장이 50년대 말까지 이루어졌으나, 산업의 대외의존도가 90%에 이르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미국의 무상원조는 후에 유상으로 바뀌었다.

제 1차 경재개발 5개년은 1962년부터의 일로, 정부는 수출주도형의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60년에 3천 3백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이 1966년에는 2억 5천만달러로 증가하여 연 44%의 고속성장률을 기록하였다.

② 베트남 파병은 한일 협정을 종용했던 미국의 강력한 파병요청을 정부가 수락한 것이다.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통하여 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제공을 약속받았다. 그리하여 1965년에서 1970년초까지 맹호 청룡 부대 등 5만 5천명의 전투병이 베트남 내전에 참여하였다.

④ 한일 국교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느냐에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으나 김종필과 일본 오오히라 외상의 비밀 교섭에서 ‘독립축하금’의 형식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재정 차관 2억달러, 민간상업 차관 1억달러 이상으로 낙착되자 여론의 반대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른바 6.4 사태로 불리는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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