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9일에 시행한 서울시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고려말, 조선초의 인물 및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맞는 것은?
① 최영은 우왕의 장인으로써 그의 부계집안(철원 최씨)은 원간섭기 이래 새로이 성장한 신흥가문이다.

② 이성계는 동북면 출신이지만 선대부터 전라도 전주에 탄탄한 지역적 기반을 가졌다.

③ 고려말 과전법 실시를 통해 기존의 권문세족들은 자신들의 소유지를 몰수당했으나 수조지는 대부분 그대로 인정받았다.

④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으로써 현재 서울의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세워졌다.

⑤ 조선 태종은 의정부 서사제의 실시를 통해 국왕중심의 국정운영체제를 공고히 했다.


정답. ④. [여말선초의 특징]  한번만 더 검토를 하고 문제를 출제하면 좋았을 것 같다.

② 이성계 집안은 기록상 선대에 전주에 유력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연유(여러가지 전설이 있다)로 인해 4조인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함경도에 정착한 것으로 나온다(이 자체의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로 보면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인 것은 맞다. 다만 뒷부분은 묻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 힘들다. 현재 그렇다는 것을 묻고 있는지, 아니면 그랬었다는 것을 묻고 있는 건지 가늠이 잘 안 된다.

④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만든 최초의 궁궐은 법궁인 경복궁이 맞다. 다만, 이 문제가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묻는 것이라면 전혀 다른 답이 나올 수 있다.

① 최영의 철원 최씨는 문벌귀족 출신으로 고려전기 이래 대표적인 귀족가문이다.

③ 과전법 시행 당시 주 혁파의 대상은 수조지 집적형 농장이었다. 한 토지에 전주가 수 명이 되는 현상을 주 혁파 대상으로 하였다.

⑤ 태종은 6조직계제를 실시하여 국왕중심의 국정운영을 해나가고자 하였다.

2. 다음 한국역사 속에 등장한 토지소유와 경영 그리고 토지개혁론과 관련된 설명이다. 그 순서로 바른 것은?
ㄱ. 노비가 지주의 작개지와 사경지를 경작하는 농업경영이 등장했다.

ㄴ. 국가는 지계 또는 관계의 발급을 통해 지주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ㄷ. 나라 안의 대가는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놀고먹는데 그 수가 1만 여명이나 된다.

ㄹ. 생계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하고 그 규모이하로는 매매를 제한하는 토지개혁론이 등장하였다.

ㅁ. 일반평민은 연수유전답을 소유하고 경작하였다.
① ㄱ-ㄴ-ㄷ-ㄹ-ㅁ
② ㄷ-ㄱ-ㅁ-ㄴ-ㄹ
③ ㅁ-ㄷ-ㄱ-ㄹ-ㄴ
④ ㄷ-ㅁ-ㄱ-ㄹ-ㄴ
⑤ ㄱ-ㅁ-ㄷ-ㄹ-ㄴ


정답. ④ [통사]  ㄷ. 좌식계급(고구려) → ㅁ. 신라장적(통일신라추정) → ㄱ. 농장하의 토지 경영형태를 말함(16c 양반들에 의한 지주제 경영이 나타나기 이전에 행해졌던 농장경영 형태의 일반적인 양상: 병작반수와 달리 노비가 작개지 경작에 대한 대가로 사경지 경작 몫을 챙긴다.) → ㄹ. 이익의 한전론(조선후기 실학자의 개혁안) → ㄴ. 광무양전⋅지계사업(대한제국)

3. 밑줄 친 제도를 통해 등용된 사람들의 활등으로 옳은 것은?
지난번에 아뢰었던 천거로 인재를 뽑는 일은 여럿이 의논한 일입니다. …… 혹 나중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고, 혹 공평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대체로 좋은 일이니, 비록 한두 사람이 천거에 빠진다 하더라도 주저할 것 없이 시행해야 합니다. 공론이 없는 때라면 그만이겠지만, 공론이 있으니 어찌 한두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좋은 일을 폐지하겠습니까?
<중종실록>
① 사화를 일으켜 사림세력을 공격
② 세도가문이 되어 정치권력 독점
③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세력의 잘못 비판
④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권문세족을 견제하려함.
⑤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정비에 크게 기여함


정답. ③ [조선전기–사림정치사]  사림세력에 대한 설명이다. 사료는 중종대 등용된 조광조 등 기묘사림의 주장이다. 조광조는 여기서 ‘천거로 인재를 뽑는 제도’로 현량과(賢良科)를 주장하였다. 이는 조광조 일파가 정계로 사림들을 진출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이다(조광조가 실각하면서 곧 폐지되었다.).

① 훈구파

② 세도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한 시기는 19c 세도정치기를 일컫는다. ※ 이 외에도 세도가에 의한 세도정치가 때때로 나타나기도 했었으나(世道 혹은 勢道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사림들은 진출초기 이들 세도가에 의한 정치를 비판하였다(명종대 이후 훈척정치 비판).

④ 고려말 신진사대부

⑤ 훈구파 

4. 다음 정치상황이 나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근래에는 사색(四色)이 함께 조정에 나아갔지만, 오직 벼슬만 할 뿐이지 예로부터 지켜오던 의리는 모두 고깔을 씌우듯 숨겨 버렸다(쓸모없는 물건처럼 되었다). 사문(斯文:유학)을 위한 시비(是非)와 국가에 대한 충역(忠逆)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린다(학문의 옳고 그름이나 나라의 충신⋅역적에 대한 논란도 모두 지나간 일로 돌려버린다). 그러다 보니 왕성한 기운으로 피나게 싸우던 버릇은 예전보다 적어졌지만, 예전의 습속에다 약하고 게으르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새 병폐가 보태졌다. 그 마음이 실제로는 서로 다르면서, 겉으로 입에 올릴 때에는 모두 두리 뭉실한 색이다.
<택리지>
① 비변사강화
② 탕평책실시
③ 사림의 정계진출
④ 세도정치의 전개
⑤ 대원군집권


정답. ② [조선후기 정치사-붕당정치사]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일부 기사이다. 이중환은 붕당의 폐단을 비판하면서, 이후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나온 탕평정책이 또 나름의 폐해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5. 다음 글의 내용과 거리가 먼 것은?
묘시에 시도를 떠나~~~~~~경예?에 이르렀다.
홍우재, 《동사록》
① 일본 막부의 장군이 바뀔 때 축하사절로 파견되었다.
②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를 가지고 갔다.
③ 한 번에 대략 4~5백 명이 파견되었다.
④ 부산에서 오사카까지는 배로, 다음 에도까지는 육로로 갔다.
⑤ 19세기말까지 12차례 파견되었다.


정답. ⑤ [조선후기 대외관계-통신사]  통신사에 관한 설명이다. 통신사는 19c 초반 순조대(1811) 파견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이후 조일관계는 일본이 왕정복고(메이지유신) 사실을 알리는 ‘서계’를 보내면서 다시 전개되었다(이 때 조선이 서계접수를 거부한 탓에 일본 정계 내에서 ‘정한론’이 일기도 했다).

◇ 통신사는 임란 이후(임란 전에도 명칭이 사용되긴 했으나, 통상 조선후기의 것을 칭한다), 조선은 일본의 재침략에 대한 정탐을 목적으로 일본은 새로이 수립되는 막부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상호 필요에 의해 이뤄진 한일 교류 사절단이다. 이를 통해 조선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전파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일본 막부가 있는 에도까지 갔으나, 순조대(1811년) 마지막이 된 12차 통신사는 ‘역지교빙’이라 하여 조선과 일본의 중간에 있는 대마도에서 교류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이는 상호간에 교류의 필요성이 많이 낮아진 탓이었다. 결국 이 교섭을 끝으로 전근대의 공식적인 한일관계는 끝이 났다. 이후 두 나라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다시 시작된 것은 대원군 집정기 이른바 ‘서계문제’를 통하여서였으나, 이마저도 대원군이 서계접수를 거부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강화도조약으로 둘 간의 근대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게 되었다.

◇ 《동사록》은 역관 홍우재가 숙종 8년(1682.5~11) 일본 통신사행을 수행하면서 일본 왕래까지의 여정(旅程)과 사행임무 수행과정 및 견문(見聞)한 바를 기록해 놓은 통신사 일기(日記)다.(※ 이 전에 쓰여진 것으로 선조대 문신 강홍중 《동사록》, 인조대 문신 황호 《동사록》, 19c 순조대 문신 유상필/김이교 《동사록》 등도 있다.)

6. 밑줄 친 왕에 의해 추진된 변화로 옳지 않은 것은?
왕은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대에 실력을 키워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 하였다.
① 친위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②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기구로 육성하였다.
③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체계를 재정비하였다.
④ 관리 재교육을 위한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
⑤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갖춘 화성을 건설하였다.


정답. ③ [조선후기 왕대사-정조]  정조대의 역사적 사실을 묻고 있다. 제시문은 영조대 완론탕평에 의해서 만들어진 척신정치의 폐해를 경험한 정조가 준론탕평을 실시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③ 《속대전》은 영조대 편찬되었다. 정조대는 《속대전》과 《경국대전》을 통합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 <참고> 영조대의 완론탕평과 정조의 준론탕평
영조대의 완론 탕평의 한계로 척신세력이 성장했음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영조는 자신을 도와 줄 세력을 얻기 위해 결국은 혼인관계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만든다(영조는 온건파인 ‘탕평당’을 만들어 붕당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이것이 본의 아니게 척신을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온건한 탕평(완론탕평)을 시행하지 않고 준론탕평을 시행한 것이다. 영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붕당의 극단에 있는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단순히 온건한 세력을 키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각 붕당의 주장에 대해 시시비비가 분명한 인사들을 등용해 붕당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적극적인 탕평정치를 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정조대 만들어진 외척도 결국은 권력의 중심에 있던 국왕이 급작스레 사망하면서 자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영정조 대의 이러한 현상들이 역설적으로 세도정치를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7. 19세기 후반이후 개화정책에 대한 국내인사들의 입장에 대한 설명이다 옳지 않은 것은?
① 개항이전 통상개화주장은 18세기 북학파의 대외통상론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② 개항이전 통상개화를 주장하던 인사들 중에는 유대치와 오경석 등 중인출신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③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은 영남만인소를 올려 서양세력에 대한 통상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④ 위정척사파의 인물들은 상당수가 의병활동에 참여하며 일본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삼아 조선을 근대국가로 변모시키려는 변법개화파중 상당수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강해지자 적극적인 친일 매국의 노선을 취하였다.


정답. ③ [개항기 정치사-척사운동]  척사운동은 크게 3차례 있었다. 이만손 등의 영남만인소는 정부개화정책 시기 정부의 《조선책략》 유포를 기화로 일어났던 신사척사운동(1881년)이다. 병인양요는 대원군 집정기에 있었던 조불간의 전쟁이다.

※ 개항기 3차례 척사운동
1차 척사운동
(대원군 집정기)
2차 척사운동
(강화도 조약 시기)
3차 척사운동
(신사척사)
(1881년; 정부개화정책 시기)
⋅ ‘통상반대론’ : 서양세력의 통상개화요구 반대운동
⋅ 이항로, 기정진 등 대표적
⋅ ‘왜양일치론’, ‘개항반대’ : 일본의 개항요구에 반대
⋅ 최익현 등 대표적
⋅ 《조선책략》 유포가 배경, 정부[고종]의 개화정책 반대
⋅ 영만만인소를 소두로 전국적인 착사운동 나타남
⋅ 대원군 : 동일 입장 취함 ⋅ 고종 : 왜양분리, 구호중수론 통해 일본의 수교요구 수용 ⋅ 비교적 강경하게 대응 : 홍재학 처형, 유배 등

8. 다음 주장을 펼친 사람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혼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로지 남을 수 없는 것인가?
① 조선혁명선언 발표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② 민족주의사학의 입장에서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③ 조선상고사를 저술하여 고대사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④ 1930년대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여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다.
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하고자 한독당을 창당하였다.


정답. ② [근현대 사학사-박은식] 박은식의 《한국통사》 내용이다. 박은식은 여기서 ‘혼백론’을 통해 형체(백魄)는 사라졌어도 정신(혼魂)이 살아있으면 그 나라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박은식은 민족주의 사학의 틀을 연 인물로 민족정신을 강조하였다.

① 《조선혁명선언》 발표(신채호), 의열단 조직(김원봉)

③ 신채호(※ 이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이다.)

④ 박은식은 1925년에 돌아가셨다. 조선학운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 주축으로 이뤄졌는데,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대표적이다.

⑤ 김구 

9. 다음 결정 발표직후 정치상황으로 옳은 것은?
- 한국을 독립국으로 재건하기 위해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 한국 임시정부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①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② 임시정부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③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이 추진되었다.
④ 좌⋅우익이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하였다.
⑤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정답. ④ [현대-해방공간]  제시된 사료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문>(1945.12) 내용 중 일부이다. 대체로 1946년의 한반도 상황을 묻고 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문>이 한반도에 알려지고 난 직후에 나타난 반응은 이른바 ‘신탁통치 쇼크’였다. 한국민의 감정이 극도로 격화되어 이후 한국민의 모든 정치적 논의는 사장되고 찬반탁 논의로 집중되었다. 현재 한국 좌우의 기원이 되었다. 이 논쟁으로 인하여 국가의 정통성 문제나 민족적 가치문제 등은 모두 좌우의 논의 뒤로 숨게 되었다.

① 1948.12(소련철군)/1949.6(미군철군)
② 1945.11.23./12.2
③ 1948년 남북협상운동(김구와 김규식 등 중간파에 의해 주도; 평양을 방북해 김일성과 회동)
⑤ 1948.8.15. 해방직후

10. 다음 설명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적지는?
약 4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을 말하는데 이때는 같은 석기라도 밀도가 높은 단단한 돌을 이용했으며 돌에다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격지를 만들 줄도 알았다.
① 단양 상시리, 공주 석장리
② 덕천 승리산, 하남 미사리
③ 평양 만달리
④ 웅기 부포리, 부산 동삼동
⑤ 청원 두루봉, 제주 고산리


정답. ①③(손보기, 『한국구석기학 연구의 길잡이』, P244.)  [선사-구석기]  후기 구석기를 설명한다. BP 1만년전(BC 8000년)부터 신석기가 시작된다. 시기구분은 논자마다 정답을 잘 내지 못하는 것이다. 후기구석기의 시기구분만큼은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나, 이 역시 유적지를 통해 평가할 때는 어려운 면이 많다.

제주 한경 고산리, 미사리, 부산 동삼동 등은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이다.

11. 밑줄 친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나라 족장들 중 세력이 큰 자는 스스로 신지라 부르고 그 다음 세력을 읍차라 한다. …… 정치적 지배자 외에 별도로 제사장인 천군이 있다. 한편 신성지역으로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천군이 농경과 종교에 관한 의례를 주관한다.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 도망쳐도 함부로 들어가지 아니한다.
① 부족장들이 사출도라 불리는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렸다.
② 군장들이 각각 읍락을 다스렸고 민며느리 혼인풍습이 있었다.
③ 5월과 10에 풍년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④ 각 읍락끼리 서로 침범하지 않았으며 이를 어기면 소. 말 등으로 갚아야 했다.
⑤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회의를 통해 사형시키고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정답. ③ [초기국가-삼한]  삼한에 관한 사료이다.

① 부여 ② 옥저 ④ 동예 ⑤ 고구려 

12. 다음은 고구려시기의 주요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연대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영락 연호사용
나. 낙랑군 점령
다. 진대법 시행
라. 온달의 전사
① 나-가-다-라
② 나-다-가-라
③ 다-가-라-나
④ 다-나-가-라
⑤ 다-라-나-가


정답. ④ [고대사-고구려 시대사]

    다. 진대법 시행(2c 고국천왕)
→ 나. 낙랑군 점령(4c 미천왕)
→ 가. 영락 연호(4c말~5c초 광개토대왕)
→ 라. 온달 전사(6c말 영양왕; 6c 신라에게 빼앗긴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전사(단양 온달산성 vs 서울 아차산성))

13. 삼국시대 고분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장군총은 돌무지무덤에 속하는 고구려의 대표적 고분이다.

②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은 양식상 고구려고분의 영양을 깊게 받았다.

③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벽화 중 사신도의 유형은 대체로 고구려 후기에 축조된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④ 일본 나라현 소재의 다카마쓰 고분에서는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와 비슷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⑤ 1971년 충남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깊게 받은 석실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정답. ⑤ [고대 문화사-고분문화]  무령왕릉은 대표적인 전축분(벽돌무덤)이다.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류를 알려주는 대표적 고분으로 벽돌무덤이 두 기가 있는데, 모두 백제 공주 송산리에 있다. 그 중 하나가 무령왕릉이다. 송산리고분군에는 총 7기의 무덤(송산리 1호분~7호분)이 있는데, 그 중 6호분, 7호분이 벽돌무덤이다. 가장 늦게 발견된 7호분은 안에서 지석이 출토되어 피장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무덤은 7호분이라 하지 않고 피장자 이름대로 ‘무령왕릉’이라 칭한다.

①② 돌무지무덤(적석총)은 청동기부터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이다. 돌무지무덤이 발달하면서 점차 기단이 나타났는데, 이 기단 양식이 완성되어 계단식 양식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계단식(기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이 무덤은 중국 집안지역(압록강 유역), 국내 한성지역(서울)에서 나타났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출자가 동일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백제 건국기사: 고구려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건국)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③ 벽화는 초기 생활풍속도에서 종교적 지향을 표현하는 등 점차 추상적인 형식으로 나아갔다. 불교 양식(연꽃, 연화화생문 등; 북위의 영향)이 나타나기도 하고 도교의 전형적인 양식들(신선, 사신도 등)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중 도교의 사신도가 가장 늦게까지 유행하였다. 이 덕분에 평양 주변에 그려진 사신도(강서대묘)가 가장 완성도 있다.

④ 다카마쓰 고분(7c말~8c초)은 무령왕릉 발굴(1971) 직후 발굴된 동아시아사의 가장 획기적인 발견(1970년 발견, 1972년 발굴) 중 하나였다(비슷한 시기 동아시아사로 새로 쓸 만한 커다란 발견을 한 것이다. 둘 다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일본에서는 특이하게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나 나타나는 화려한 채색의 벽화가 발견되어 일본인들의 기원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 벽화에는 인물상(여인들, 남성들), 별자리,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수산리 고분, 쌍영총(벽화의 원료가 같다), 무용총 등 많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고구려인들에 의한 작품이거나 그림의 대상이 고구려 사람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도 미국인 혹은 일인 학자들에 의해서 이들이 고구려 계통이거나 고구려 사람일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 고대의 무덤 양식

14. 다음 신분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 관등승진의 상한선은 6등인 아찬까지였다.
- 득난이라고도 불렸다.
①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② 신라 중대는 전제왕권을 학문적으로 뒷받침 하였다.
③ 집사부 시중직을 역임하면서 귀족세력을 견제하였다.
④ 중위제를 설치하여 이들의 승진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⑤ 신라 말기에는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반신라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정답. ③ [고대 사회사-골품제도]  6두품에 대한 설명이다. 6두품의 관등은 6관등까지, 관직은 차관급인 시랑 혹은 경까지만 승진 가능했다. 집사부 시중은 진골귀족만이 가능했다.

① 유학자는 대부분 6두품이다.

② 중대에는 학문⋅종교 등 국왕의 근시직으로 중앙으로 활발하게 진출하여 전제왕권을 뒷받침하였다.

④ 중위제는 대족장⋅소족장 출신이지만 신분한계상 승진의 한계가 정해진 6두품, 5두품 출신들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실시한 일종의 ‘승급제(호봉제)’와 같은 것이었다.

⑤ 신라 하대에는 골품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반신라세력화 하였다. 이들은 후백제, 후고구려, 고려 등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호족)들의 책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5. 다음 제도를 마련한 왕대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신라왕 김부가 항복하였다. 이에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로 삼고 김부로 하여금 본주의 사심이 되어 부호장 이하직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에게도 이를 본받아 각각 출신고을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① 노비안검법 마련
② 백관의 공복제정
③ 전민변정도감 설치
④ 주현에서 바칠 공물량 정함
⑤ 흑창 설치


정답. ⑤ [고려 정치사-왕대사]  고려 국초, 태조대 실시한 사심관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① 광종
② 광종(자-단-비-록 4색공복 제정)
③ 공민왕(신돈이 신진사대부 등용해 추진)
④ 광종(주현공부법)

16. 고려 성종의 업적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서경에 수서원이라는 도서관을 설치하였다.
② 개성에 최고 유학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③ 각 주에 향학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였다.
④ 중앙관제와 향직을 개정하여 문⋅무산계를 부여하였다.
⑤ 지방에 12목을 설치하여 처음으로 수령을 파견하였다.


정답. ⑤ [고려 정치사-왕대사]  말이 너무 모호하다. 두 가지 이상의 말이 이어져서 수식하는 범위에 따라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게 서술되었다.

④ 중앙관제와 향직을 마련한 후 문무산계를 부여했다는 것이라면 문제없다(중앙의 양반관료는 문산계를 받고 향리도 무산계를 지급받았다). 다만 향직에도 문무산계가 부여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문제가 있다.

⑤ 외관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태조대의 일이다. 조장, 금유, 전운사 같은 이들이 왕의 명을 따라 지방 관리역할을 수행하였다(다만, 상주하는 지방관은 아니고, 조세수취와 관련된 일을 담당했을 것으로 본다). 심지어 양계지역에는 광범위한 정도의 외관이 파견되어 있었다. 다만 이는 군사적 목적으로 파견된 것으로 민사업무 목적의 행정관과는 차이가 있다. 어찌됐든 성종대 지방관이 처음 파견된 것은 아니다. 성종대 처음으로 파견된 것은 지방관이 아니라, ‘상주 지방관’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주하는 민사지방관’이 처음으로 파견된 것이다.

① 서경제도와 서경의 분사제도는 태조대 처음 실시되었고, 성종대는 더 강화되어 서경에 도서관이 분사되었다. 개경에 비서성이 있었고, 서경에는 수서원을 설치하였다.

③ 1980년대 초반까지는 인종대 향교[향학]이 처음 설립되었다고 보고 있었으나, 지금은 성종대 향교가 처음 설립되었다는 것에 특별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성종 6년, 11년 기사가 가장 주요하게 인용되는 사료). 더불어 향교라는 명칭이 고려시대에서도 보통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역시 최근에는 크게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래서 말해지는 향학, 주학(州學), 현학(縣學)이라는 것들도 기실 향교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실제 향교를 표현하는 말에 향학이라는 말을 같이 사용하시는 교수님들이 많다. 이를 출제자가 특별히 구별해 쓰거나 향교가 그것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으로 평가해 문제를 냈으리라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17. 밑줄 친 성격에 해당하는 정치기구로 옳은 것은?
고려의 통치체제는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또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기구도 있었다.
① 식목도감
② 중추원
③ 삼사
④ 상서성
⑤ 중서문하성


정답. ① [고려 정치사-중앙제도]  고려의 독자적인 기구를 묻고 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 대표적이다.

②③ 중추원⋅삼사, 송나라 제도 수입
④⑤ 3성6부, 당나라 제도 수입 

18. 다음 사건들의 발생 시기를 연대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서경 대화궁 건설
나. 삼국사기 편찬
다. 조위총 반란
라. 경대승 집권
마. 교정도감 설치
① 가-나-다-라-마
② 가-라-나-마-다
③ 나-가-다-마-라
④ 나-라-다-마-가
⑤ 나-마-가-라-다


정답. ① [고려-시대사]
가. 서경 대화궁 건립(인종,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나. 《삼국사기》 편찬(인종, 묘청 난 진압 후 김부식에 의해 편찬)
→ 다. 조위총 반란(1174; 정중부 집권기)
→ 라. 경대승 집권(1179)
→ 마. 교정도감 설치(최충헌)

19. 고려시대 경제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은?
① 시전을 만들고 국영 점포를 열었다.
② 하급관료와 군인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③ 먹, 종이, 금, 은 등 수공업 제품을 소에서 생산하였다.
④ 공물에는 매년 내야 하는 상공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다.
⑤ 5일마다 장시가 열려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물품을 교환하였다.


정답. ⑤ [고려시대 경제사-경제사]  5일장이 열리고 장시가 활성화되는 것은 조선시대의 일이다. 장시는 고려시대 주현(지방)의 관아 부근에서 나타났던 것이(이때는 잉여생활품 교환정도) 조선왕조 개창과 동시에 잠시 소멸되었다가, 1470년경 전라도 무안지역에서 장문(場門)이란 이름으로 다시 출현하였다. 15c말 전라도 지방에 확산되고, 16c에는 삼남지방으로 확산되었다가, 18c에 이르러 전국으로 확대되고 전국적인 연계망이 형성되었다. 이전에 15일장(월3회), 5일장(월6회) 병행되던 것도 18c 이르면 5일장으로 일반화된다.

① 시전 외에 고려는 주점(酒店), 다점(茶店), 식미점(食味店) 등 국영상점(시전 외 관영상점)과 관련한 언급이 등장한다.

② 구분전은 토지를 분급받은 관료와 군인들이 사망했을 때 그 유가족에게 지급한 토지제도이다.

③ 고려시대에는 소(所) 수공업이 발달하여 이 곳에서 수공업품, 광물, (때로는 일부 농산물)이 생산되었다(※ 고려후기에는 소(所) 수공업이 쇠퇴한다).

④ 공물은 3세(조용조)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당연히 고려시대에도 존재했고 거기에는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이 있었다.

20. 다음 (가)를 제창한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무신집권 이후 사회 변동기를 지나며 불교계에서는 본연의 자세 확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났다.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 수생, 노동에 고루 힘쓰자는 개혁운동인 (  가  )를 제창하였다. 송광사에 중심을 둔 (  가  )운동은 개혁적인 승려들과 지방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활발히 전개하였다.
①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내세웠다.
② 교단의 통합과 정리를 불교계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우선과제로 보았다.
③ 꾸준한 수행으로 깨달음의 확인을 아울러 주장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④ 유불일치설을 주장하여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⑤ 아미타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신앙을 이끌었다.


정답. ③ [고려 문화사-지눌]  지눌이 결사운동(불교정화운동)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권수정혜결사문>이다. 지눌은 ‘제2의 출가’를 주장하며 타락된 불교계를 떠나 수행과 노동을 함께 실천하자는 결사운동을 제창하였다. 지눌은 전라도 송광사 지방으로 내려가 지방 지식인[단월]들의 지지를 받으며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는 지방 지식인들을 각성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① 의천

② 의천과 지눌 모두 선교 통합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나, 의천이 비교적 왕권강화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통합을 시도하였다.

④ 혜심(지눌의 제자; 유학자 이자 과거(사마시) 출신)

⑤ 의상 






댓글 쓰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