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2일에 시행한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후삼국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견훤은 900년에 무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② 궁예는 901년에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③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④ 견훤은 후당, 오월과도 통교하는 등 대중국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정답]  1번

[해설]
혜공왕이 시해되면서 시작한 신라 하대는 왕권이 강했던 중대와 달리 진골귀족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극렬해지면서 왕권이 흔들리고 중앙 집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고, 진성여왕대를 거치면서 신라 정국은 더 악화되어 지방의 주현 중에서 신라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중 대표적인 세력이 후백제와 후고구려로, 각각 견훤과 궁예에 의해 세워졌다.

견훤은 892년 무진주(現 광주)에서 나라를 세우고, 900년에 도읍을 완산주(現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칭하고 백제의 부흥과 신라 타도를 표방하였다. 신라타도를 표방하여 신라의 서부지역을 공략하고, 오월, 후방, 일본, 거란과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927년에는 경주를 습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과 그 신하들을 살해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구의 공산에서 왕건의 고려군대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나, 930년 고창의 병산에서 고려군에 패함으로써 세력이 위축되었고,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견훤은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혔다 고려고 망명하고, 이후 후백제는 396년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패함으로 멸망하였다.

궁예는 호족 기훤의 아래에 있다 892년 북원의 호족 양길 아래에 들어갔다. 양길의 밑에서 공을 세운 궁예는 901년 양길의 밑에서 벗어나 왕건이 바친 송악(現 개성)에서 후고구려 건국을 선언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라고 했으며, 이어 905년에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이라고 고쳤으며,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다시 바꾸었다. 태봉은 신라 관제에 뿌리를 두면서도 문제점을 극복하여 신분보다 능력을 중시한 인제 등용을 연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였다. 이 광평성, 내봉성 등의 관제는 이후 고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점차 궁예가 전제왕권을 강화하면서 수 많은 부하를 죽이고, 사치와 낭비를 하면서 신망을 잃어가자 배현경, 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옹립하여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태봉을 멸망하게 된다.



① 후백제의 건국 - 견훤은 상주의 농민출신으로 군진세력과 호족세력을 규합하여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건국(900)하였다. 오월, 거란, 후당, 일본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궁예는 910년에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904년 국호를‘대동방국’이라는 뜻의 마진으로 고치고 이듬해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 다음 911년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쳤다.

2. 다음 조선전기의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고 조(祖)를 거두어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 국가 재정과 관직에 진출한 신지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다.

(다) 과전의 세습 등으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였다.
① (가)가 실시되어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한층 강화되었다.
② (나)에서 사전은 처음에 경기지방에 한정하여 지급하였다.
③ (다)가 폐지됨에 따라 지주전호제 관행이 줄어들었다.
④ 시기 순으로 (나), (다), (가)의 순서로 실시되었다.


[정답]  3번

[해설]
(가) 관수관급제(1470), (나) 과전법(1391), (다) 직전법(1466)에 대한 설명이다.

(가)인 관수관급제는 성종 원년(1470)에 도입된 제도로 국가가 농민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관리가 행사하던 수조권을 대행한 것이다. 직전법의 시행으로 퇴직 후 경제적 보장이 없어진 관료들이 재직 중에 과중한 수탈을 자행하자 관수관급제가 시행되면서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받아 관리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를 통해 관료의 직접적인 수조권한이 폐지되어 국가에서 토지 및 농민을 직접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국가의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나)의 과전법은 1391년 사전개혁과 함께 시행된 제도이다. 과전법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 수조지로 편성한 후 수조권을 정부 각처와 양반 직역자에게 분급한 것으로 어디에 귀속되냐에 따라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한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관직의 고하에 따라 지급하되, 1대에 한하였으며, 수조권이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다)의 직전법은 1466년(세조 12)에 시행된 제도로, 이전에 경기도에 한정하여 시행되던 과전법이 관리 수 증가와 과전의 세습 등으로 인해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시행되었다. 직전법은 직전이라는 명목으로 현직관료에 한해서 수조지를 분급하였고, 이와 함께 수신전, 휼양전도 폐지되었다. 16세기에 직전의 지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1556년(명종 11)에 직전분급 중단을 선포한 후 이것이 장기간 지속되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직전의 소멸은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지배 관계의 해체와 동시에 사적 소유권에 바탕을 둔 토지지배 관계, 지주전호제의 본격적인 전개를 의미한다.

위 자료의 실시된 순서는 (나) 과전법 - (다) 직전법 - (가) 관수관급제이다.



④ (나) 공양왕(1391)때 제정된 과전법 → (다) 세조때 제정된 직전법 → (가) 성종때  관수관급제

② 과전법은 경기도 내의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③ 직전법이 폐지되자 관리들은 녹봉만을 지급받게 되었고, 소유권을 바탕을 둔 지주전호제가 강화되었다.

3.  조선시대 시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신해통공으로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② 경시서를 두어 시전과 지방의 장시를 통제하였다.
③ 시전은 보부상을 관장하여 독점판매의 혜택을 오래 누렸다
④ 국역의 형태로 궁중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정답]  4번

[해설]
조선 전기 시전은 도성에 설치된 상설 상업 기관으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상업기구였다. 조선은 시전을 통해 도성 상업과 전국의 교환 과정을 관장하고, 동시에 국가 수요물과 도성민의 일상적인 수요품을 조달하려 하였다. 태조는 즉위 후 경시서를 설치하여 물가조절, 상업세 징수 등 시전의 행정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다. 또한 태종대에는 세 차례에 걸친 공사 끝에 시전 구역이 형성되었다. 이는 오늘날 종로 1~3가와 남대문로 1가 일대에 위치하였다. 시전은 각각의 판매 물품에 따라 시전 내의 일정 구역에 구분하여 배치하였다. 이들 시전은 시전들은 정부로부터 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인(보부상)들이 자신들과 같은 상품을 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았는데, 17세기 초엽에 이것이 ‘금난전권’이라는 강력한 특권으로 나타났다. 원래 금난전권은 육의전에 대해서만 부여했으나, 나중에는 일반 시전에까지 확대되어 자유로운 상공업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기에 들어서 민간 상공업이 발전으로 통공발매정책(신해통공, 1791)이 시행됨에 따라 육의전 및 시전의 특권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④ 대동법의 시행으로 나타난 공인에 대한 설명이다.



① 신해통공(1791) - 조선 후기에는 난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금난전권은 무의미해졌고, 정조때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② 경시서는 고려시대 시전(市廛)을 관리, 감독하거나 국역(國役)의 부과 등을 맡아본 관청이었다. 조선시대 태조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물가의 조정, 상인들의 감독, 국역의 부과 등을 맡아보았다. 1466년(세조) 관제를 개혁할 때 이를 평시서로 개칭하였다.

③ 보부상은 전국에 있는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키는 상인으로, 보부상단이라는 독자적인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④ 시전은 한 상점에서 한 가지 물품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독점판매권을 부여 받았다. 그 대신 국가에 공랑세(公廊稅)를 바치고 국역의 형태로 궁중과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4. 다음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어떤 책의 서문이다. 이 책이 편찬된 국왕때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은?
전하께서는 … 신 서거정 등에게 명해 제가의 작품을 뽑아 한 질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전하의 위촉을 받아 삼국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辭), 부(賦), 시(時), 문(文) 등 여러 문체를 수집하여 이 중 문장과 이치가 순정하여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고 분류하여 130권을 편찬해 올립니다.
① 유향소를 다시 설치하고, 사창제를 도입하였다.
② 서울의 원각사 안에 대리석 10층탑을 건립하였다.
③ 제가녀 자손의 관리 등용을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④ 정읍사, 처용가 등이 한글로 수록된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정답]  2번 (선지에 문제가 있을수 있음)

[해설]
제시된 자료는 서거정의 <동국통감> 서문이다. ‘서거정’, ‘삼국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을 통해 <동국통감>임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책이 편찬된 때는 1485년(성종 16)으로 당시의 왕은 성종이었다. 성종은 1470년에는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토지의 세습과 겸병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고, 1485년 <동국통감>과 함께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국제를 완성한다. 또한 풍속을 교화하기 위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하였다. 1488년에는 이시애의 난으로 인해 세조대에 폐지된 유향소를 부활시켰으며,  성종은 또한 편찬사업에 관심을 가져 노사신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강희맹의 <오례의>, 성현의 <악학궤범>을 간행하여 문물을 진흥하였다.

※사창제는 1470년 성종 원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고종대(1867)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부활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면서 유명무실화 되었다. ①에서 사창제를 도입하였다는 내용은 오류가 있다. 답이 2개가 되야할 것 같다.

② 원각사는 세조대에 창건된 사찰이다. 따라서 원각사지 10층 석탑 역시 사찰의 창건 당시 건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 대에 원각사와 관련있는 것은 원각사비로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원각사는 1504년 연산군이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을 만들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 원각사비



위 책은 성종대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기가지 역대 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이다.

① 세조때 이시애의 난으로 폐지되었던 유향소가 재설치되었고, 흥선대원군 집권기 사창제가 도입되었다.

② 세조 - 원각사와 원각사 10층탑을 건립하였다.

③ 경국대전이 성종때 반포(공포)되어, 태종때 제정된 서얼차대법이 법으로 공포되었다.

④ 성종때 음악의 이론을 체계화한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5. 밑줄 친 ‘공(公)’이 속한 신분 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공(公)은 열일곱에 사역원(司繹院) 한학과(漢學科)에 합격하여, 틈이 나면 성현(聖賢)의 책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쉬는날 없었다. 경전과 백가에 두루 통달하여 드디어 세상에 이름이 났다. … 공은 평생 고문을 좋아하였다.
- 완암집 -
① 조선 초기 – 개시 무역에 종사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② 조선 중기 – 서원 건립을 주도하고 성현들의 제사를 받을었다.
③ 조선 후기 – 소청 운동을 통해 신분 상승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개항 전후 – 외세 침략에 맞서 위정 척사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답]  3번

[해설]
제시된 자료는 정내교의 ‘완암집’이다. 밑줄 친 공이 사역원에 합격하였다는 것을 통해 외국어 교육기관이었던 사역원임을 고려하여 역관 등에 종사하였던 중인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중인은 신분상승운동을 꾀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청운동이다. 중인 중에는 역관으로 조선과 청의 교역이 증가하자 청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밀무역을 하거나 상인들의 무역업무를 도와주고 돈을 받아 부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① 개시무역은 국경에 개설된 무역시장으로 양국 협의하에 공적으로 열리는 시장이다. 개시무역에서는 각국 정부에서 발행한 서계를 가진 자만이 물품을 교역하였다. 1603년의 왜관개시, 병자호란 이후 중앙개시와 경원개시가 있다. 중인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던 것은 개시가 아닌 후시를 통해서이다.

② 서원건립을 주도한 세력은 사림이다. 최초의 서원은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서원은 사림들의 지방 기반이 되어 4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후학 양성을 통해 사림의 대를 이었다.

④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보수적인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조정의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재야세력으로 존재하였고, 서원과 향교를 근거지로 한 유림세력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 사역원은 통역과 번역, 외국어 교육을 맞아보았던 관청으로, 한학과는 중국어 통역을 맡아보았다. 이곳에 합격한 신분은 중인이다.

① 개시무역은 조선 후기 청, 일본 등을 상대로 열었던 대외 교역시장으로, 상인 들이 참여하였다.

② 서원 건립을 주도한 것은 사림파이다.

③ 조선 후기 기술직 중인 들은 철종 때 대규모 소청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④ 역관(기술직 중인)들은 개항 전후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6. 조선시대 각 시기별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15세기 : 류큐에 불경이나 불종을 전해주어 그곳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② 16세기 :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비변사로 하여금 군사문제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③ 17세기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팽배해졌다.
④ 18세기 : 청과 국경분쟁이 일어나 양국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정계비를 세웠다.


[정답]  3번

[해설]
조선의 대외관계 기본 원칙은 사대교린이었다. 명과의 외교에서 사대를 취하고, 왜인과 야인에 대해서는 교린의 정책을 취했다. 명과의 외교가 사대를 표방한 것은 조선의 자기 보전을 위한 현실적인 대응이었다.

③ 조선은 중화인 명이 야인인 청에 무너지자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그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효종대에 북벌론이 전개되었다. 이를 의해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국왕의 친병인 금군을 전부 기병화하는 한편, 훈련도감, 어영청의 군대도 기병으로 강화하였다. 이러한 북벌정책은 소중화, 존명주의가 바탕이 된 명분적 사대주의의 연장이었다.

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류큐가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류큐는 조선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면서 조공관계에서 조공을 바쳐오면 상국에서는 답례품을 주는 관례가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은 류큐에 불경이나 불종을 전해주었다.

②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임시적으로 설치되었다. 이후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정식 기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를 전쟁 수행의 최고 기관으로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약 300년 동안 국정 전반을 관장한 조선 최고 중앙 관청의 역할을 한다.

④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출신지역인 만주지역에 사람이 사는 것을 금하여 만주지방이 비어있었고, 이에 조선인지 자주 내왕하며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청은 목극동을 보내어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이후 1883년 고종은 어윤중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조선의 영토를 주장하였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1909년 일제는 청과 흥정하여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주었다.



① 조선 초기 류큐와 교류하였다. 불경이나 불종(범종)을 전파해 주었다.

② 명종때 을묘왜변이 발상하자,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군제를 제승방략체제로 전환하고 비변사를 상설기구화 하였다.

③ 호란이후 조선에서는 소화(소중화)사상이 유행하였다. 정치 군사적으로 패했지만, 중화국가인 명이 멸망하였으므로, 이제 조선이 작은 중화로써 중화문화의 수호자를 자처하게 되었다.

④ 1712년(숙종)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7. 밑줄 친 상(上)의 재위 시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이 책이 완성되었다. … 곤봉 등 6가지 기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나왔는데 … 장헌세자가 정사를 대리하던 중 기묘년에 명하여 죽장창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도해로 엮어 새로 신보를 만들었고, 상(上)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 마상재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에게 명하여 … 주해를 붙이게 했다.
① 민(民)의 상언과 격쟁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②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리하였다.
③ 군역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④ 5군영 대신 무위영과 장어영 등 2영을 설치하였다.


[정답]  1번

[해설]
제시된 자료는 <무예도보통지>이다. 이 책은 이덕무, 박제가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것으로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밑줄 친 상은 정조이다. 문제에 나온 선지 중 정조 시대와 관련된 것은 ①이다.

정조는 도성 밖으로 나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자주 만들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총 100회 이상의 행차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일반 백성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되었다. 그는 1778년 상언∙격쟁 제도에 붙어 있던 신분적 차별의 단서를 철폐하여 누구든 왕에게 직접 호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② <대전회통>은 1865년(고종 2) 왕명에 따라 조두순, 김병학 등이 편찬한 법전이다. 조선의 마지막 법전이다. 정조가 편찬한 법전은 <대전통편>으로 1785년에 편찬하였다. <대전통편>은 조선의 이전 법전과 법령들을 통합하여 편찬한 법전이다.

③ 균역법은 1750년(영조 26)에 시행되었다.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고, 부족한 금액은 선무군관포, 어전세, 염세 등으로 보충하였다.

④ 무위영과 장어영은 1881년(고종 18)에 종래의 5군영이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개편된 것이다. 정조가 설치한 군대는 1793년에 설치한 장용영이있다. 장용영은 왕권강화를 위해 설치된 군영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군주였던 정조가 죽자 1802년(순조 2)에 혁파되었다.



자료는 정조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관한 내용이다.

① 정조는 화성행차시 일반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상언과 격쟁)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② 대전회통 편찬 - 고종때 흥선대원군

③ 균역법 - 영조

④ 2영 설치 - 고종, 명성왕후 정권의 개화정책

8. (가), (나)를 주장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내정 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운하는 자 누구이냐? 너희들이 ‘동양 평화’, ‘한국 독립 보전’ 등을 담보한 맹약이 먹도 마르지 아니하여 삼천리강토를 집어 먹힌 역사를 잊었느냐? …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나)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 정신이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
① (가) –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② (가) –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③ (나) – 조선 불교 유신론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방향을 추구하였다.
④ (나) – 낭가 사상을 강조하여 민족독립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려고 하였다.


[정답]  2번

[해설]
(가)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나)는 박은식의 <한국통사>이다.

신채호는 1905년 무렵부터 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1910년까지 각종의 영웅전과 더불어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세운 『독사신론』을 썼다. 그는 일제강점으로 중국에 망명한 후에는 『조선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하였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자아성을 상실하고 사대주의의 노예성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본 신채호는, 고려 전기에 일어난 ‘묘청의 난’에서 소위 국풍파가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에게 패한 이후부터 노예성이 활개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거의 고대사에 집중된 신채호의 역사 연구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민족 정신과 독립 사상을 높이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①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신채호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나 이승만의 외교독립 노선에 반대하여 사임하였다. 1922년에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초청으로 상해로 가고, 1923년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폭력에 의한 민족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또한 1922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대표로 확약하기도 하였다.

③ <조선불교유신론>은 1910년 한용운이 저술한 책이다. 한용운은 불교개혁을 위해 일본의 불교와 신문물을 접한 후 이 책을 저술하였다. 박은식이 저술한 것은 <유교구신론>이다. 1909년 발표되었으며, 유교계의 3대 문제와 유교계를 개혁,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낭가사상’은 신채호의 사상이다. 박은식은 ‘혼’ 사상을 주장하였다. 박은식은 국가나 민족의 흥망은 민족 정신은 국혼에 달려 있다고 보고, 나라가 망해도 역사가 담긴 국혼이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는 신채호 - 조선혁명선언(의열단강령, 1923), (나)는 박은식 - 한국통사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②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③ 조선불교유신론 - 한용운

④ 낭가 사상 - 신채호

9. 밑줄 친 ‘그’가 일으킨 사건의 영향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일제는 1월 28일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은 이때 시라카와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는 이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한 뒤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하였다. 식장에 참석하여 수류탄을 투척함으로써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은 즉사하였다.
① 이를 계기로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② 한국 광복군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③ 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④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  2번 (선지에 문제가 있을수 있음)

[해설]
밑줄 친 그는 윤봉길이며, 그와 관련된 사건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1932)’ 이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을 받아오던 중국인들을 열광시켰고, 그들에게 한국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시켜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1933년 김구가 장개석을 면담하고 ‘독립 전쟁을 위한 무관의 양성’ 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김구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조선인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훈련을 실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김구는 만주의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을 비롯한 간부들과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이범석 등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이들에게 교육과 훈련을 위임하였다. 이때 입교한 생도들이 1940년에 창설된 한국 광복군의 중추가 되었다.

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결성된 신간회의 활동기간은 1927년부터 1931년까지이다. 훙커우 공원 의거가 1932년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③ 민족유일당 운동은 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으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포함하여 좌우익의 민족 독립운동을 합작하려는 운동이었다. 1927년 만주 지역의 민족운동 단체 대표 52인이 참가한 회의가 열려 민족 유일당 조직방법을 둘러싼 논의를 하였지만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민족 유일당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민족유일당의 결성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④ 미쓰야 협정은 1925년 일본과 중국 군벌 장작림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만주 군벌 장작림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면 일본에 넘기고, 일본은 이에 대한 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만주 관리들은 독립군 적발에 혈안이 되었고, 이는 한국 농민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



상해사변으로 일본에게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던, 중국국민당 장개석(장제스)은 중국 1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한국인이 했다며, 한인(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준 계기가 된다. 결국 1940년 중경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이 형성 되었다.

10. (가), (나)_ 발표 시기의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가)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나)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 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① 경의선 철도가 다시 연결되었다.
② 북한에서 국가 주석제가 도입되었다.
③ 남북 이산가족이 서울과 평양을 처음 방문하였다.
④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었다.


[정답]  1번

[해설]
(가) 7∙4 남북 공동성명(1972), (나) 6∙15 남북 공동선언문(2000)

1972년과 2000년 사이의 일어난 일을 찾아야 한다.

② 북한의 주석제는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면서 신설된 것으로 국가수반으로써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명실 상부한 국가 최고의 직위이다. 김일성 사망 직후 북한의 국가 주석은 공석으로 유지되다 1998년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주석제가 폐지되었다.

③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71년 8월 12일에 대한민국의 대한적십자사가 한국전쟁 또는 한반도 분단 때문에, 남과 북으로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서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십자사간의 합의에 의하여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최초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 교환 행사가 이루어졌다.

④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은 1991년 남북한이 함께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의 위험을 제거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고,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자는 취지에서 남북한이 공동 채택한 선언이다.

① 경의선철도도로연결사업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열린 제 1, 2차 남북장관급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후 남과 북은 경의선과 동해선의 동시 시험운행에 합의했으나, 북한의 일방적인 파기 후 미사일 발사, 핵실험으로 열차시험 운행이 지연되었다. 그후 북한 핵문제 해결에 다소 진전이 있자, 2007년 5월 17일 군사분계선을 처음으로 넘는 경의선과 동해선을 시험운행했다.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산∼봉동간 화물열차를 정례적으로 운행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이해 12월 11일부터 개통되었다. 화물열차는 주중 매일 1회 운행되었으나, 남북관계가 다시 냉각되자 2008년 12월부터 중단되고 있다. 재개여부는 남북관계의 진전에 달려 있다.



(가)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1972. 7), (나)는 2000년 6·15남북 공동선언(2000. 6)

① 경의선 철도 복원(2000. 9)

② 사회주의 헌법(1972. 12)

③ 남북 이산가족 서울과 평양 처음 방문(1985)

④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1992)

11. 고인돌을 많이 만들던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추수용 도구로 반달 돌칼을 사용하였다.
②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③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제천 창내 유적, 서울 암사동 유적 등이 있다.
④ 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정치 권력을 갖지는 못하였다.


[정답]  1번

[해설]
청동기 유적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흔히 고인돌을 들 수 있다. 고인돌은 당시 군장의 가족묘로 보여지며 선돌(입석)과 함께 거석문화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네 개의 굄돌을 세워서 장방형의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돌을 뚜겅돌로 얹어 놓은 형태가 전형적인 것이며, 변형고인돌로는 매장시설인 돌방을 지하에 두고 뚜겅돌을 땅위에 올려놓은 것도 있다. 즉, 이 문제는 청동기 시대의 설명을 고르면 된다.

①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 아예 석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농업이 주산업이 되었지만 농구는 여전히 석기를 사용하였고, 청동기로는 만들지 않았다. 반달돌칼과 홈자귀는 대표적인 청동기시대의 농구로서 반달돌칼은 추수용 도구로 조,벼 등 곡식을 추수할 때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홈자귀는 땅을 가는데 쓰였다. 그리하여 답은 1번이 된다.

②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청동기 시대의 토기는 민무늬토기와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의 한 형태로 1959년 평북 의주군 미송리 동굴 유적에서 발견되어 이름 붙여진 미송리식 토기가 있다. 미송리식토기는 손잡이가 있고 적갈색인 것이 특징이다. 미송리식 토기와 비파형 동검의 분포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일치한다.

③제천 창내유적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이고, 서울 암사동 유적은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다. 또한 제천 창내유적은 구석기 시대의 막집의 형태를 보여주고, 서울암사동 유적은 신석기 시대 집터의 유형인 움집의 집터를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는 내륙, 구릉지대에 장방형 움집이 나타나고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대표적 유적지로 여주 흔암리, 청원 내수리, 부여 송국리가 있다.

④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설명으로 이 시대에는 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은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정치권력을 갖지 못하는 평등사회였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는 경제활동의 중심이 남성에게로 옮아가고, 생산의 증가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축적과 사적소유로 인하여 계급이 발생하였다. 계급의 분화는 사후까지 영향을 끼쳐 무덤의 크기와 부장품 내용에도 반영되었다.



②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청동기는 민무늬토기가 대표적 토기이다.

③ 제천 창내 유적은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며, 서울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다.

④ 구석기 시대에는 무리 중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였다.

12. 각 나라별 생활과 풍속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조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였다.
② 동예-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③ 부여- 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를 죽였고, 매년 10월에 제천행사를 열었다.
④ 고구려- 신부 집 뒤에 집을 짓고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가 있었다.


[정답]  3번

[해설]
①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것으로 8조법금(법금8조)이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이 “한서”,“지리지”에 전해지고 있다. 원래 씨족사회의 관습적 규범이었으나, 당시의 군장들은 이것을 국가의 정치적, 물리적 힘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고조선 사회의 엄격한 법률로 발전시켜 지배력 강화에 이용하였다. 8조법금의 일부 내용을 보자면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라고 되어있다. 이는 인간의 생명과 노동력을 중시한 당시 사회모습을 볼 수 있다.

② 동예에서는 산천을 중시하고 각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생구), 우마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의 제도가 있었다.

③ 부여는 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의 발굽으로 점을 치는 “우제점법”이 성행하였으며, 12월에는 영고(맞이굿)라는 제천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죄수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매년 10월에 제천행사를 지내는 곳은 동예의 “무천”과 고구려의 “동맹” 이 있다.

④ 고구려의 혼인풍속으로는 노동력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이는 구두로 약속이 정해지면 신부집에서 큰 본채뒤에 작은 별채를 짓고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였다.



③ 부여에는 수렵사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제천행사인 영고가 12월에 있었다. 길흉을 점치기 위해 점성술(우제점법,占卜)이 있었다.

② 동예는 산천을 중시하였고 부족마다 각기 생활영역이 따로 있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읍락을 침범하면 벌로서 생구(生口,노비)와 우마(牛馬)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責禍)가 있었다.

④ 고구려는 혼인풍습으로 모계사회의 유습인 데릴사위제(예서제=서옥제)가 있었다.

13.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고구려의 흥안령 일대 장악
ㄴ. 백제의 사비 천도
ㄷ. 신라의 마운령비 건립
ㄹ. 전기 가야 연맹의 약화
① ㄱ→ㄹ →ㄷ→ㄴ
② ㄱ→ㄹ→ㄴ→ㄷ
③ ㄹ→ㄱ→ㄷ→ㄴ
④ ㄹ→ㄱ→ㄴ→ㄷ


[정답]  4번

[해설]
ㄱ. 장수왕의 업적으로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5세기)

ㄴ. 백제의 사비천도는 성왕때의 일이다. 성왕은 협착한 웅진에서 광대한 벌판인 사비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고쳤는데(538), 이로써 백제는 안으로는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밖으로 해외의 여러나라와 교통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ㄷ. 신라의 중흥을 마련한 진흥왕은 해안선을따라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함흥평야까지 점령하였는데, 이와 같은 정복사업은 지금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남아있는 네 개의 순수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중 마운령비는 568년에 세워졌다.

ㄹ. 2~3세기경 구야국에서 발전한 김해의 금관가야를 주축으로 하는 전기가야연맹체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전기가야연맹은 신라의 군사적 요청을 받은 광개토대왕의 침공(400)으로 전쟁의 피해를 심하게 받아 전기가야연맹이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답은 ㄹ-ㄱ-ㄴ-ㄷ의 4번이다.



ㄹ.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의 침입으로 백제 ․ 가야가 커다란 타격을 받아 가야연맹의 중심은 김해에서 내륙인 고령으로 옮겨졌다.(400)

→ ㄱ. 5C 장수왕 때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여, 흥안령 일대의 초원지대를 장악하고 중국 남북조와 교류하였다.

→ ㄴ. 6C 성왕 때 백제 부흥을 위해 수로교통이 편리한 백강 유역의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538)

→ ㄷ. 6C 진흥왕이 순행하면서 수립한 순수비 중 하나이다. 원산만 진출과 관련한 비석이다.(568)

14. 다음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이다.
② 돌무지 덧널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것이다.
③ 죽은 자의 사후세계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④ 고구려 시대의 고분에 그려졌는데 도교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정답]  2번

[해설]

①,④위의 그림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로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신도 중 현무도 이다. 사신은 네 방위를 맡은 신으로 상징적인 동물로 표현되었는데, 현무는 그중에서 북쪽 방위를 맡은 신이었다.

② 고구려의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고구려 후기인 7세기경에 조성되었는데, 강서대묘의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무덤형식으로, 대체로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무덤의 구조는 지상 또는 지하에 피장자(被葬者)와 부장품을 안치한 목곽을 수혈식(豎穴式)으로 설치한 다음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의 냇돌로 목곽을 덮어 적석시설을 하고, 다시 그 바깥에 점토 등의 흙을 입혀 다지는 방법을 사용한다. 여기서는 벽화, 그림등을 그릴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기에 틀린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답은 2번이다.

③ 고구려의 벽화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사신도 외에 생활 풍습이나 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고, 수렵이나 전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있는데, 이 사신도는 죽은 자의 사후세계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였다.

[참고] 돌무지덧널무덤




제시된 그림은 고구려의 우현리 강서대묘의 현무도이다.

② 돌무지 덧널무덤에는 벽화가 없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초기 생활도에서,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도교 + 음양오행 + 신선사상)와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하여 갔다.

강서대묘는 굴식돌방무덤 형태이며, 벽화로 왕의 영혼을 악귀로부터 수호하는 방향의 4신인 청룡도(동), 백호도(서), 주작도(남), 현무도(북)가 그려져 있다. 사신도는 고구려 사람들의 패기와 진취성을 엿볼 수 있다.

15. 밑줄 친 ㉠~㉣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문무왕 8년(668)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의 관등을 내리고 ㉠식읍 500호를 주었다.
○ 신문왕 7년(687)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신문왕 9년(698) 내외 관료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를 주었다.
○ 성덕왕 21년(722)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① ㉠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② ㉡- 하급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지급하였다.
③ ㉢-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로의 대가로 지급하였다.
④ ㉣- 왕권이 약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정답]  1번

[해설]
㉠ 식읍은 국가에서 왕족·공신·봉작자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한 지역, 또는 수조지(收租地) 내지 수조호(收租戶)로써 신라의 삼국통일 전후에 통일에 공헌한 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에게 각각 식읍 5백호·3백호를 내린 예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체로는 어느 일정한 지역을 식읍으로 주었다. 이 식읍은 조세를 수취하며,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정답은 1번이 된다.

㉡ 고려 때 6품 이하의 하급관료 및 군인의 유족 등에게 지급되던 토지는 관료전이 아니라 구분전이었다. 틀린 답이다. 관료전은 신라 중대(中代)에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지급한 전지(田地)의 명칭으로, 관료전은 토지로부터 조세만 수취하고 사람들은 지배할 권한이 없었으며 관리는 관직에서 물러나면 관료전을 반납해야 했다.

㉢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로의 대가로 지급한 것은 시대별로 식읍 또는 공신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식읍에 대한 설명은 ㉠을 참조하길 바란다. 신라의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녹읍을 받았는데, 그것은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뿐 아니라 백성들의 부역까지도 징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중대의 전제왕권은 이들 귀족의 경제력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강행하여 신문왕이 689년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즉 녹읍은 신라 및 고려 초기에 관료(官僚)들에게 일정한 지역의 경제적, 노동력의 수취(收取)를 허용해 준 특정한 지역이라고 볼 수있다.

㉣ 정전은 왕권이 약화되는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전은 722년(성덕왕 21) 백성 가운데 정(丁)의 연령층에게 주어졌던 토지로써,정전의 지급은 실제로는 농민이 원래부터 소유하고 경작하던 토지에 대한 권리를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그 대신 국가에 대해서 조를 납부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① ㉠ 식읍 - 국가에서 왕족·공신·봉작자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한 지역이었으며, 조세를 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② 하급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지급 한 것은 고려시대의 구분전이다.

③ 고려 건국과정에서 태조를 도운 공신과 군사에게 그 대가로 관계(官階)에 관계없이 공로 ․ 인품 ․ 충성도에 따라 지급된 토지로 역분전이다.

16. 밑줄 친 ‘갈등’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성계는 즉위 직후 명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의 건국을 알리고, 자신의 즉위를 승인해줄 것과 국호의 제정을 명에 요청하였다. 명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국내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명과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①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인의 송환을 명이 요구함으로써 생긴 갈등
② 조선이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무례한 표현이 있다는 명의 주장에 따른 갈등
③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었다는 중국 측 기록을 둘러싼 갈등
④ 조선의 조공에 대한 명 황제가 내린 회사품의 양과 가치가 지나치게 적은 데 따른 갈등


[정답]  4번

[해설]
① 명의 영락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조선과의 여진인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다. 조선은 동북면에서 여진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명의 여진 초유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으며,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로 인해 명은 1406년 2월 명의 수도에 갔던 주문사 이현의 반차를 함께 와 있던 일본사신보다 낮추어 버렸다. 이는 명이 여진을 초유할 당시 조선의 태도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② 명나라는 1395년 조선이 보낸 국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문서 작성자로 추정되는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격분한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요동공격계획을 밝히고 군사훈련에 돌입하였다.

③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었다는 중국 측 기록을 둘러싼 갈등을 “종계변무 사건” 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으로, 1581년(선조 14)에는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黃廷彧)을 보냈다. 그리고 황정욱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 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종계변무의 목적이 달성되게 되었다.
이어 1587년에는 주청사 유홍(兪泓)을 명나라에 보내어 이번에는 ≪대명회전≫의 반사(頒賜)를 요청하였다. 명나라의 예부에서는 황제의 친람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예부상서 심리(沈鯉)의 상주에 의해 명제의 칙서와 함께 중수된 ≪대명회전≫ 중에서 조선 관계 부분 한 질을 보냈다. 그 뒤 1589년에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 옴으로써 200년간의 종계변무의 외교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게 되었다.

④ 조선의 조공에 대한 명 황제가 내린 회사품의 양과 가치가 지나치게 적은 데 따른 갈등은 틀린 설명이다. 당시 조선과 명은 조공책봉관계에 따른 사대로써 조선은 명나라의 회사품과 관련된 선진문물의 수용와 무역을 위해 오히려 명나라에 조공을 여러차례 보냈다고 한다.또한 중국은 중화의 나라라는 인식으로 조선에서 보낸 조공의 양보다 오히려 더많은 양의 회사품을 주었다.



조선 초기 명과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사대외교를 추구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자주적인 실리외교관계를 취하는 사대교린 정책을 취했다.

태조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고명(왕을 승인하는 문서) ․ 금인(국왕의 인장)을 주지 않아 갈등이 있었으며, 태조가 이인임의 아들로 대명회전에 기록된 종계변무문제로 조선과 명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선과 명은 무역에 있어서 명은 3년 1공을, 조선은 1년 3공을 주장하면서, 교역의 방법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지 회사품의 양이나 가치 때문에 있었던 갈등은 아니었다.

17. 고려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지방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을 담당하였다.
②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③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대우하였다.
④ 광종은 황제라 칭하였고,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으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정답]  1번

[해설]
①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약 500여개의 군현이 존재하였지만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 전기에는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였는데, 대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373개나 되었으니 아직도 중앙통치력의 지방침투가 불완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1번이 틀린 설명이 되겠다.

② 고려시대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는 군사조직의 정비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고려 초기의 자치적인 지방호족의 사병은 고려가 집권체제를 확립함에 따라 점차 중앙정부에 직속된 국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에는 2군,6위의 경군이 성립되었고, 지방에는 주현군이 편성되었다.

③ 고려의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이념을 세웠기 때문에 이후 고려시대는 고구려의 계승의식에 대한 강한 인식이 자리잡았다. 이런 국가건국이념을 가지고 있던 고려왕조는 또다른 고구려후손인 발해유민의 유입이 곧 고구려계승의 국가이념을 실현하는 것이라 인식했을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발해가 망한 후 대광현은 여러 관료 장군들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였고, 태조 왕건의 후대(厚待)로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받고 종적(宗籍)에 들었다. 

④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으며, 독자적인 연호인 “광덕”, “준풍”을 사용하였으며,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 라고 불렀다.



①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은 속현이 주현보다 많이 존재하였다.

④ 광종은 자신을 황제로(짐, 조서, 폐하, 태자 등 사용),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로 부르며 격상하였다. 이를 외왕내제(外王內制 - 대외적으로 중국의 제후국으로서 왕격이지만 대내적으로는 황제국가)라 했다.

18. 고려시대의 건축과 조형예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초기에는 광주 춘궁리 철불 같은 대형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② 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③ 팔각원당형의 승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들 수 있다.
④ 후기에는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과 같은 다포식 건물이 출현하여 조선시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답]  3번

[해설]
① 광주 춘궁리 철불은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이시기에는 대형 철불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등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지역 특색이 반영된 거대한 불상도 조성되었다.

②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 양식을 일부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조형감각을 가미하여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다각다층탑이 많았고, 안정감은 부족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을 띠었으며, 석탑의 몸체를 받치는 받침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 고대 삼국의 전통을 계승한 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③ 신라말기에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과 승려의 일대기를 새긴 탑비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승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신라말의 승탑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고달사지 승탑과 같인 신라후기 승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는 것이 많았으나, 팔각원당형의 일반적인 승탑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형태를 띠면서 조형미가 뛰어난 승탑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답은 3번이 된다.

④ 고려전기에는 주심포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중 안동봉정사 극락전은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고려 후기에는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사이에도 짜여져있어 화려하게 보이는 다포식 건물도 등장하였는데, 황해도 사리원의 성불사 응진전은 고려 시대의 다포식 건물이다.



③ 고려시대의 승탑(부도)은 부분적인 변형을 보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신라의 팔각당형 승탑의 기본형을 계승한 고려시대 전기의 승탑은 전체적인 외관이 비교적 장중하고 화려하여 새로이 건국한 고려왕조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승탑의 전체적인 규모가 작아지면서 길쭉해지는 현상도 나타나는데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일반화 된다. 지광국사 현묘탑은 팔각이 아닌 사각형 모양의 승탑이다.

19. 민족적 자주의식을 반영한 고려 후기의 역사서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해동고승전
② 제왕운기
③ 삼국유사
④ 해동역사


[정답]  4번

[해설]
① 해동고승전은 고려의 고승 각훈이 1215년(고종 2)에 지은 한국 최고(最古)의 승전이다.해동고승전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일부분만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 문헌적 가치는 매우 크다. 해동고승전은 삼국시대의 승려 30여명의 전기가 수록되어있으며, 고려후기의 민족적 자주의식의 경향을 반영하였다.

② 제왕운기는 고려 후기인 1287년(충렬 13)에 이승휴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책이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가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조군왕세계연대’의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이승휴는 몽골의 침입으로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했던 시기에 신진 유학자로 정치계에 등장하여 파직을 당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였다. 따라서 제왕운기는 당시의 대내외적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회의와 함께 새로운 사회의 희원(希願)을 시로 적은 것이다. 제왕운기는 정치, 사회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한 의욕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가치기준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정치 간섭에 대한 불만이 이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③ 삼국유사는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서로써 당시 시대적 상황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한 시점으로 일연은 이러한 고려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민족의 시조를 단군으로 정하여 당시 분열된 민족적 의식을 하나로 합치려 하였다.

④ 해동역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이 찬술한 기전체(紀傳體)의 한국통사로 그는 책의 찬술 동기로 종래의 한국사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편찬되어 이를 바로 잡고, 객관적인 한국사의 참모습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적 자주의식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없다.



④ 해동역사 - 18C 이후 조선 후기에 한치윤이 저술하였으며, 중국 등 외국의 사서를 500여종이나 인용하여 기전체적 분류사로 서술한 통사이다.

① 각훈이 왕명(고종)에 의해 우리 불교사상을 교종 계통의 종교적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②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가 중국(상권)과 한국(하권)의 역대를 서사시로 읊은 것으로 현존한다.

③ 충렬왕 때 일연이 단군을 민족시조로 내세웠으며, 자주의식이 강조되었다.

20.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ㄴ. 최승로는 시무 28조 개혁안을 올려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ㄷ. 김부식은 기전체 역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ㄹ. 원효는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① ㄱ->ㄹ->ㄷ->ㄴ
② ㄱ->ㄹ->ㄴ->ㄷ
③ ㄹ->ㄱ->ㄴ->ㄷ
④ ㄹ->ㄱ->ㄷ->ㄴ


[정답]  2번

[해설]
ㄱ.백제의 성왕 30년인 552년 왕의 명으로 불상, 경론 등을 왜에 전파하였다.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전하자 당시 왜왕은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ㄴ. 최승로는 고려 성종때의 관료로 981년 성종은 즉위와 동시에 유교사회 건설을 표방했고, 이듬해 982년 최승로는 28조에 달하는 장문의 시무책을 올렸다. 이것이 곧바로 성종에게 채택되어 고려사회는 또 한 번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ㄷ.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다.

ㄹ. 원효는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 때까지의 신라시대의 승려로 성은 설씨, 원효는 법명이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일심사상은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가 모든 생명에게 이로움을 주는 삶의 중요성 강조한 것으로 그는 이를 통해 대립하는 불교의 종파 의식을 통합코자 노력하였다.


ㄱ. 6C 백제의 성왕때 노리사치계로 하여금 불교를 전하게 하였다.(552)

→ ㄹ. 원효는 신라 통일기에 활동한 승려였다.

→ ㄴ. 고려 성종 - 최승로

→ ㄷ. 삼국사기는 고려시대 인종의 명을 받고서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관찬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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