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3일에 시행한 서울시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 입니다.


1. 다음 제시된 자료와 관련된 시대의 유적이 아닌 것은?
옷은 방추를 이용하여 옷감을 짜서 입을 줄 알게 되었고 돌로 만든 괭이, 낫 등을 이용하여 조, 피, 수수 등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집은 동굴 생활에서 벗어나 땅을 파고 움집을 짓고 살았으며 바닥이 뾰족한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지역도 있었다.
① 고령 지산동 유적
② 양양 오산리 유적
③ 봉산 지탑리 유적
④ 부산 동삼동 유적

1. 정답 ①

주어진 자료는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에 대한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지는 주로 큰 강가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서울 암사동, 양양 오산리,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 부산 동삼동, 하남 미사동, 봉산 지탑리 등이 있다. 특히, 봉산 지탑리 유적에서는 탄화된 조와 피가 발견되었다.

① 고령 지산동 유적은 대가야가 위치했던 고령에 있는 무덤군의 하나로, 대가야 최고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덤에서는 금동관, 금제 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갑옷, 칼 등의 철제 무기류가 발견되었다.

2. 다음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나라에 대한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사람을 죽인 자는 바로 죽인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 '한서' -
①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② 말, 주옥, 모피 등의 특산물이 유명하였다.
③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를 사용하였다.
④ 요서 지방을 경계로 연나라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2. 정답 ②
주어진 자료는 고조선의 8조법 중 일부이다.

② 말, 주옥, 모피는 부여의 특산품이다.

① 고조선은 기원전 4~3세기 경 부왕, 준왕 등의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세습제가 마련되었고 상·대부·대신·장군 등의 중앙 관직을 두었다.

③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군장 국가의 형태로 건국되었다. 이 시기 청동기는 중국이 아닌 북방 스키토 시베리안 계통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비파형 동검과 거친무늬 거울 등이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덧띠새김무늬 토기 등이 있다. 특히 미송리식 토기, 비파형 동검, 고인돌, 거친무늬 거울은 고조선의 특징적 유물로 간주된다.

④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경 요서를 경계로 중국 전국 시대 7웅 중 하나인 연과 대등하게 대립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며 연을 칠 계획까지 세웠다.

3. 다음 ㉠과의 항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김윤후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있을 때 ( ㉠ )이/가 쳐들어와 충주성을 70여 일 동안 포위하자 비축해 둔 군량이 바닥나버렸다. 김윤후가 군사들에게 만약 힘을 다해 싸워 준다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관작을 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믿으라. 고 설득한 뒤 관노(官奴)문서를 가져다 불살라 버리고 노획한 마소를 나누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로 돌진하니 ( ㉠ )은/는 조금씩 기세가 꺾여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 '고려사' -
① 귀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② 강화도로 천도하며 항쟁하였다.
③ 흥화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④ 산성, 해도 입보 정책을 펼쳤다.

3. 정답 ③

주어진 자료는 고려시대 몽골의 2차 침입 당시 김윤후 장군의 충주산성 전투에 대한 것이다. ㉠은 몽골이다.

③ 흥화진은 서희가 거란과 담판하여 강동6주를 확보한 이후, 995년(성종 14) 구축한 압록강 방면의 요충지이다. 거란은 흥화진을 선점하기 위해 고려 현종대에 수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010년(현종 1), 1017년(현종 8), 1018년(현종 9)에 전투가 벌어졌다.

①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귀주에서 박서가 몽골군을 무찔렀다.

② 최우는 무리한 몽골의 조공 요구에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골의 2차 침입에 항쟁하였다.

④ 산성, 해도 입보 정책은 해안가 주민은 섬으로 피하고, 내륙에 사는 주민은 가까운 산성으로 피하게 하는 정책으로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 시 고려 정부가 실시한 것이다.

4. ㉠~㉣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옳은 것은?
① ㉠ -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② ㉡ - 백제가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다.
③ ㉢ -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되었다.
④ ㉣ -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

4. 정답 ③

③ 황룡사 9층탑은 선덕여왕(632~647) 때 자장의 건의에 의하여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건립하였다.

① 고구려 장수왕은 남북조와의 다면 외교를 통해서 472년 통구에서 도읍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② 백제 근초고왕은 고흥으로 하여금 「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하게 하였다.(375년)

④ 비담은 647년에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즉위하고자 염종 등과 함께 명활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5. 다음은 삼국시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에 들어갈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은?
㉠ 10월에 백제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달 23일에 서거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① 고구려에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
② 고구려가 동쪽의 옥저를 복속시켰다.
③ 신라는 지방의 행정구역으로 9주를 설치했다.
④ 신라가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에 원군을 청했다.

5. 정답 ④

㈀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371년)
→ ㈁
→ ㈂ 관산성 전투(554년)

④ 신라는 400년 내물마립간 시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왜의 침입을 무찔렀다.

① 고구려는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부여성에서 비사성까지의 천리장성을 영류왕 때부터 쌓기 시작하여 647년 보장왕 때 완공하였다.

② 옥저는 고구려 태조왕에게 56년 복속되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3)은 동부여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복속하였다.

③ 통일 신라 신문왕 때 전국을 9주로 나누고 특수행정구역에 5소경을 설치하였다.(685년)

6. 다음의 행사를 주관한 국왕의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8일 간의 화성 행차>
첫째 날 : 창덕궁을 출발해서 시흥에 도착하다.
둘째 날 : 시흥을 출발해서 화성에 도착하다.
셋째 날 : 향교 대성전을 참배하고 과거를 실시하다.
넷째 날 : 현륭원을 참배하고 장용영의 군사를 조련시키다.
다섯째 날 :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베풀다.
여섯째 날 : 노인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다.
일곱째 날 : 화성을 출발해서 시흥에 도착하다.
여덟째 날 : 시흥을 출발해서 창덕궁에 도착하다.
①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② 초계문신제도를 도입하여 관료들을 재교육하였다.
③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④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국정 수행의 편의를 도모했다.

6. 정답 ④

주어진 자료는 정조의 화성 행차에 대한 것이다.

④ 「대전회통」은 고종 때 편찬된 것으로 「경국대전」과 「속대전」, 「대전통편」의 내용을 모두 종합하고, 「대전통편」 이후의 수교와 조례 등을 보충하여 총정리한 법전이다.

①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에 관한 도서로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것으로 정조 때 편찬되었다.

② 정조는 젊은 관료들을 재교육하여 자신의 정치 철학을 주입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였다.(문신을 대상으로 하는 초계문신 문강과 무신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관 무강이 있었다.)

③ 정조는 향약을 수령에게 맡겨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고, 사족의 영향을 약화시켰다.

7. 다음 서적들의 편찬 시기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은?
㉠ '오주연문장전산고'
㉡ '만기요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 '연려실기술'
㉤ '동의보감'
① ㉢-㉤-㉣-㉠-㉡
② ㉢-㉤-㉣-㉡-㉠
③ ㉤-㉢-㉡-㉠-㉣
④ ㉤-㉢-㉣-㉡-㉠

7. 정답 ②

㈂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중종)
- ㈄ 동의보감(1613년, 광해군)
- ㈃ 연려실기술(정조~순조)
- ㈁ 만기요람(순조)
- ㈀ 오주연문장전산고(헌종)

* 만기요람 : 조선 후기 순조 때 심상규가 조선 후기의 세금 제도와 군사 제도를 정리한 것이다.

* 오주연문장전산고 : 조선 후기 헌종 때 이규경이 학문의 전 분야에 걸친 방대한 사실들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해설한 것으로 서양 의술과 발전기에 대한 최초의 저술이다.

8. 백제의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② 무령왕이 묻힌 관의 재료는 양나라에서 가져온 금송이다.
③ 칠지도에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낸 칼임을 알려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④ 목책과 우물, 사당 등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된 풍납토성은 한성 백제 시기에 축조되었다.

8. 정답 ②

② 무령왕이 묻힌 관의 재료는 양나라의 금송이 아닌 일본 규슈지방의 금송이다. 무령왕릉은 중국의 남조(양)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무덤터를 신선에게 샀다는 매지권이 나왔고, 지석의 발견으로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석에는 무령왕이 아닌 사마왕으로 기록되어 있어 당시 시호제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① 백제 무왕(600~641)은 익산으로 천도하려 하였으며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고 궁남지를 조성하였다.

③ 칠지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칼로 근초고왕이 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신공왕후에게 하사한 것으로 왜왕에게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있다.

④ 풍납토성은 백제의 한성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한강 유역에 있는 백제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의 토성 유적으로 백제 전기의 집터와 토기, 기와, 우물, 목책 등 당시의 생활상을 밝혀줄 만한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9. 다음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쌀로 통일하여 징수하였고, 과세의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변경하였다.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토지 1결당 쌀 12두만 납부하면 되었기 때문에 공납의 부담이 경감되었고 무전 농민이나 영세 농민은 일단 이 부담에서 해방되었다. 또 쌀을 납부하기 어려운 지방에서는 포목, 동전 등으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보  기>
㉠ 재정 감소분을 결작 등으로 보충하였다.
㉡ 이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 인징, 족징 등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여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① ㉠, ㉡
② ㉠, ㉢
③ ㉡, ㉣
④ ㉢, ㉣

9. 정답 ③
주어진 자료는 대동법에 관한 것이다.

㈀ 영조 때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주는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부족한 군포를 한량과 교생 등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 1필, 지주에게 1결당 2두의 결작을 부과하면서 보충하였다.

㈂ 세도 정치 시기 군정의 총액화로 백골징포, 황구첨정, 족징과 인증 등 군포 징수의 폐단이 극심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였다.

㈁ 정부는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중앙에는 선혜청, 지방에는 대동청을 설치하였다. 선혜청은 수납한 대동세로 공인을 고용하여 국가의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고 대동법이 확대 실시되면서 진휼청, 균역청 등을 통합하여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의 재정기관이 되었다.

㈃ 대동법은 공납을 토지 경작량이 아닌 토지 소유량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주들과 부농들의 부담이 증가하였고, 이에 지주들의 반발로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까지 100여 년이 걸렸다.

10. 고려시대의 역사서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려 초부터 역대 왕의 치적을 기록한 '실록'을 편찬했는데,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편찬할 때 참고자료로 사용되었다.

② 의종 때 김관의가 '편년통록'을 편찬하여 태조 왕건의 가계를 서술하였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③ 민지가 편찬한 '본조편년강목'에는 성리학적인 역사서술 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④ 이승휴는 태조에서 숙종 때까지 역대 임금의 치적을 정리한 '사략'을 편찬하였는데, 현재는 사찬 만이 남아있다.

10. 정답 ④

④ 「사략」은 고려 공민왕 때 이제현이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며 고려 태조에서 숙종 때까지 역대 임금의 치적을 정리한 것으로, 현재 그 속에 실린 사론만이 전하며 정도전의 「고려국사」에 영향을 주었다.

① 「실록」은 고려 초기부터 편찬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이는 조선 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② 「편년통록」은 의종 때 김관의가 「편년통재」와 「속편년통재」를 개찬하여 만든 것으로 태조 왕건의 가계와 역사를 정리한 역사서이다.

③ 「본조편년강목」은 충숙왕 때 민지가 문종에서 고종에 이르는 고려사를 강목체로 서술한 것으로 고려 말기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이 반영되고, 정통 의식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난다.

11. 세종 대의 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해시계인 혼의와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②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편찬하였다.
③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계산한 역법서인 '칠정산'을 만들었다.
④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인쇄 기술이 더욱 발전하였다.

11. 정답 ①

① 세종 때 혼의(혼천의, 선기옥형)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시계의 역할을 하였다. 앙부일구가 반구형의 해시계로서 백성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백성이 많이 다니는 광화문 부근과 종묘 남쪽 거리에 각각 설치하였고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을 배려하여 열두 띠 동물을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② 「의방유취」는 조선 세종 때 전순의가 왕명으로 중국의 의학 서적을 토대로 편찬한 것으로 365권으로 된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이다.

③ 조선 세종 때 중국의 <수시력>과 <대통력>을 토대로 「칠정산 내편」을 만들었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칠정산 외편」을 만들었다. 칠정산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④ 조선 세종 때는 밀랍 대신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안을 개발하여 인쇄 능률을 향상시켰고, 활자 중 가장 우수하다는 갑인자 등을 주조하였다.

12. 밑줄 친 적 이 요구한 내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은 모두 천민 노예이므로 양반, 사족을 가장 증오하였다. 길에서 갓을 쓴 자를 만나면 곧바로 꾸짖으며 말하였다. 너도 양반인가? 갓을 빼앗아 찢어 버리거나 자기가 쓰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양반을 욕 주었다. 무릇 집안 노비로서 을 따르는 자는 물론이요, 비록 을 따르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모두 을 끌어다 대며 주인을 협박하여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면천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중략)… 때로 양반 가운데 주인과 노비가 함께 을 따른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접장 이라 부르면서 의 법도를 따랐다. 백정이나 재민들도 평민이나 양반과 평등한 예를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치를 떨었다.
- '오하기문' -
<보  기>
㉠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 조혼(早婚)을 금지할 것
㉢ 각 도의 환곡을 영구히 폐지할 것
㉣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① ㉠, ㉡
② ㉠, ㉣
③ ㉡, ㉢
④ ㉢, ㉣

12. 정답 ②

주어진 자료는 조선 말기 황현의 야사인 「오하기문」의 내용 중 집강소시기에 동학 농민군들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밑줄 친 ‘적’은 동학 농민군이다.

㈁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이다. 이때 조혼을 금지하여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상 되어야 결혼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 갑신정변 당시 신정부 강령 14개조 중 6조의 내용이다.

13. 조선시대 과전법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을 ㉠~㉤ 중에서 모두 고른 것은?
과전은 ㉠ 18등급으로 나누어 경기 지방의 전지와 시지를 지급하였는데, 이때 관리들에게 준 토지는 ㉡ 소유권을 지급한 것이다. 이 토지를 ㉢ 받은 자가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 공신전은 세습을 할 수 없었으나, 죽은 관료의 가족에 대해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① ㉠, ㉡
② ㉠, ㉡, ㉢
③ ㉠, ㉡, ㉣
④ ㉢, ㉤

13. 정답 ③

㈀ 과전법에서는 18개 등급으로 나누어 전·현직 관리에게 전지의 수조권을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 과전법에서는 소유권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공신전은 공신에게 지급한 토지로 법적으로 세습이 허용된 토지였다.

㈂ 과전법 하에서 수조권은 1대에 한정되었고, 양도와 매매, 세습이 불허되었다. 사망 후 반납하였지만 직전법부터는 퇴직 후 반납하였으며, 반역을 일으켰을 때 반역자의 토지도 국가에 반납하였다.

㈄ 수신전은 과전을 받은 관리가 사망하였을 때 부인이 수절할 경우 그 과전을 부인에게 지급한 것이고, 휼양전은 관리가 사망하였을 때 그 자녀에게 20세까지 지급한 토지로 세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14. 발해의 정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건국 직후 신라와 협력하여 당 세력을 몰아냈다.
② 고구려 계승의식을 내세워 평양을 남경으로 삼았다.
③ 황상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황제국가임을 내세웠다.
④ 당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을 고려왕이라 자칭하였다.

14. 정답 ③

③ 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황상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대내적으로 황제국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① 발해는 신라와 기본적으로 친선과 대립의 교차관계였다. 건국 초기 대조영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고, 신라는 대조영에게 5관등 대아찬의 관직을 수여하는 등 친선관계였으나 발해와 신라가 협력하여 당 세력을 몰아낸 적은 없다.

② 고려 초기 태조는 고구려 계승 의식과 자주성을 보여주는 북진 정책을 펼쳤고 이때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개발하였다. 고려 문종 때 한양이 남경으로 승격되었고 동경 대신 남경이 3경에 포함되었다.

*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 민족 구성 : 지배층의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의 대부분은 말갈인
-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 :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땅에 발해를 건국하고 이후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
- 외교 문서 : 무왕(복고구려지구 거유부여유속), 문왕(고려국왕 대흠무)
- 문화의 유사성 : 굴식 돌방무덤, 온돌 구조, 축성술 등
- 고려의 발해 유민 수용 : 고려 초 망명하는 발해 유민을 수용한 것은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보았기 때문이다

④ 일본이 발해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고려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15. 고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고려 전기의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 승과가 있었다.
② 조선 초부터 현직 관리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③ 조선의 과거제도는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④ 조선 후기에는 중인이 과거에 급제하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15. 정답 ④

④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는 분관(일종의 수습기간)을 배당받았다. 이 분관은 교서관, 성균관, 승문원을 배당받았는데 이는 출신 가문에 따라 달라졌다. 중인이나 출신 가문이 미천할 경우 교서관에 배당되었고, 출신 가문이 좋을 경우 성균관이나 승문원에 배당되었다.

① 고려시대에는 문과, 잡과, 승과가 실시되었고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예종 때 1회 실시된 적이 있었고 고려 말 공양왕 때 무과가 제도화되었다.

② 현직관리들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을 경우 더 높은 품계를 받아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③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1894년 1차 갑오개혁 당시 폐지되었고 이때 문무관의 차별도 없어졌으며 관리의 월봉제가 실시되었다.

16. 일본이 강요한 조약의 내용을 시기순으로 나열한 것은?
㉠ 비밀 각서를 통해 대한 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다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채용하게 하였다.
㉢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 대한 제국이라는 국가가 없어졌다.
① ㉡-㉠-㉢-㉣
② ㉡-㉢-㉠-㉣
③ ㉢-㉠-㉡-㉣
④ ㉢-㉡-㉠-㉣

16. 정답 ②
㈁ 1904년 한일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 ㈂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 ㈀ 1907년 군대해산
- ㈃ 1910년 한일합방


17. 다음의 선거 벽보가 사용된 선거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②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이었다.
③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다.
④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승만이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선거였다.

17. 정답 ③

주어진 자료는 1956년 선거 당시의 벽보이다. 이 때 선거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내걸고 정권 교체의 바람을 일으키던 야당의 민주당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선에 성공하였다.

③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모두 승리한 것은 1960년 3월 15일 선거 때이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야당 대통령 후보가 사망한 가운데, 이승만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① 1956년 선거 당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였다.

② 1956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많은 지지를 얻었고 결국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④ 사사오입 개헌은 1954년 이승만과 자유당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을 사사오입의 논리로 가결한 것이다. 이후 1956년 이승만이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고 3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18. 광복 후 ㉠과 ㉡의 주장을 한 사람을 옳게 연결한 것은?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 연합성 신민주주의
① ㉠ 안재홍 ㉡ 백남운
② ㉠ 김규식 ㉡ 여운형
③ ㉠ 안재홍 ㉡ 여운형
④ ㉠ 김규식 ㉡ 백남운

18. 정답 ①

㈀ 안재홍은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의 분단 상황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연합, 좌와 우의 단결, 계급간의 단결을 통해 통일 민족 국가의 건설을 모색하는 신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또한 안재홍은 주요 산업지, 토지를 국유화, 상류층 위주의 민주주의가 아닌 노동 계층의 민주주의를 주장한 신민주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신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그 내용은 삼균주의와 유사하기도 하다.

㈁ 연합성 신민주주의는 좌우연합 민주정권으로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동시에 해결하여 계급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무계급성 단일통합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백남운은 해방정국을 ‘변혁기’와 같은 의미를 지닌 ‘건국기’로 표현하면서, ‘건국’이 현 단계 조선민족의 최대과제임을 강조하였다. 새로 세우는 나라의 정체는 자유민주주의도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아닌 신민주주의이며, 정권의 구성 형태는 연합정권으로서 ‘민주정권’임을 수없이 강조하였다.

19. 다음 가상 대화가 이루어진 시기의 사실로 가장 옳은 것은?
∙ 길동:이웃집 아저씨가 헌병 경찰에게 잡혀가서 태형을 당하였다고 하네.
∙ 수일:우리 학교 선생님은 제복을 입고 칼까지 차고 수업을 하고 있어.
①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② 제1차 조선 교육령이 공포되었다.
③ 배재 학당과 이화 학당이 설립되었다.
④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19. 정답 ②

주어진 자료는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의 내용이다.

② 1911년 1차 조선 교육령에서는 일본어, 일본 역사, 일본 지리를 중시하였고, 한국 역사· 한국 지리 과목을 폐지하고 단순한 실업 교육을 강조하였다. 수신 교육을 강조하였으며 보통 학교의 교육 연한을 6년에서 4년으로 축소하였다. 또한 일본과 대만에서 실시하고 있던 의무 교육은 조선에서 실시하지 않았고 1911년 사립학교 규칙과 1918년 서당 규칙을 제정하여 민족 교육을 탄압하였다.

① 경성 제국 대학은 1920년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제가 1924년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 중심의 민립 대학 설립은 실패로 돌아갔다.

③ 배재학당은 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이며, 이화학당은 1886년 스크랜턴이 세운 최초의 여자 사립학교이다.

④ 1930년대 3차 조선 교육령 때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화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 과목이 아닌 수의(선택) 과목으로 지정하였다. 1940년대 4차 조선 교육령 때는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을 금지하였다.

20. 밑줄 친 총선거 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948년 5월 10일, 마침내 남한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감시 아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제헌 국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① 만 19세 이상이면 모든 국민이 이 선거의 투표권을 가졌다.
② 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③ 이 선거를 앞두고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김규식은 선거에 나서지 않았다.
④ 제주도에서는 이 선거에 반대한 세력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20. 정답 ①

① 5·10 총선거에서는 당시 만 21세 이상의 등록 유권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② 5·10 총선거로 이승만 계열과 무소속 계열이 다수 당선되었고 임기 2년의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③ 1948년 4월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이 중심이 되어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5·10 총선 불참, 미군과 소련군의 즉각 철군에 합의하였다. 이후 5·10 총선거에 김구와 김규식 등의 남북 협상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④ 5·10 총선거 이전 4월 3일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단독 선거 반대, 미군 철수, 총선거 반대를 주장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때 경찰과 충돌이 발생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시위가 장기화 되면서 5·10 총선거 당시 제주도의 3개의 선거구 중 2개의 선거구에서 선거가 열리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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