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9일에 시행한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 입니다.


 문 1. (가)와 (나)에 들어갈 역사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 가 ) 은(는)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고려 인종 때 편찬되었다.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등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 나 ) 은(는) 충렬왕 때 한 승려가 일정한 역사 서술 체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저술한 역사서이다. 총 5권으로 구성되었으며, 민간 설화와 불교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① (가)-고조선의 역사를 중시하였다.
② (가)-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였다.
③ (나)-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양하였다.
④ (나)-도덕적 합리주의를 표방하였다.


◈ 출제 영역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 정답 : ③

■ 해설 :
③ (나) 일연의 삼국유사는 대몽 항쟁기를 거쳐 원 간섭기로 이어지는 대내외적으로 대단한 격동의 시기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통일적인 저항의식과 민족적 자주의식을 토대로 편찬하였다.

① (가)삼국사기는 신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국 시대 역사를 정사 중심으로 서술하여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소홀히 하였다.

② (가)삼국사기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진압한 이후 신라 계승의식을 강조하였다.

④ (나)삼국유사는 자주적 사관에 의해 편찬하였으며, 삼국사기가도덕적 합리주의를 표방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비교
구 분 삼국사기(官撰) 삼국유사(私撰)
저 자 김부식 일연
저술 시기 귀족 사회 전성기(인종, 1145년) 원 간섭기(충렬왕, 1285년)
방 법 기전체 기사본말체(야사체)
내 용 삼국부터 다룬 왕조 중심의 정사 단군의 건국 설화부터 다룬 설화 중심의 야사
사 관 합리적 유교 사관(충절, 효행, 정절) 민족적 자주적 사관(불교, 단군, 무속)
계승 의식 신라 고조선



정답 : ③


제시된 자료의 (가)는 삼국사기, (나)는 삼국유사이다.
③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① 『삼국사기』는 고구려는 호전적인 국가로, 백제는 속임수가 많았던 국가로 비판하였으며, 고구려·백제와 연결되는 고조선·삼한의 역사를 삭제하는 등 신라 계승 의식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

②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을 고수하면서 신라 계승 의식을 반영하였다.

④ 『삼국유사』는 또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다. 이는 『삼국사기』가 불교 및 비합리적 신이사를 일부러 삭제하거나 수정해 실었던 사실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으로 이전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닌다.




문  2. 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는 즉위하여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하는 등의 관제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권세가들의 농장을 견제하고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① 만권당을 통해 고려와 원나라 학자들의 문화 교류에 힘썼다.
②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편하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③ 철령 이북의 영토 귀속 문제를 계기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④ 기철을 비롯한 부원 세력을 숙청하고 자주적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 출제 영역 : 충선왕

● 정답 : ①

■ 해설 :
① 그는 충선왕으로 연경(북경)에 학문 연구소인 만권당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모으고, 고려에서 이제현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

②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편하였던 시기는 최초의 부마였던 충렬왕 때로 군사와 행정 등 국정 전반을 총괄하게 하였다.

③ 철령위 설치 문제로 명의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던 시기는 우왕 때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였다.

④ 기철 등 친원파를 숙청하고 자주적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던 시기는 공민왕 때이다.



정답 : ①

제시된 자료의 ‘사림원 설치’, ‘소금 전매제 실시’ 등을 통해서  밑줄 친 ‘그’는 충선왕임을 알 수 있다.

① 충선왕은 원나라에 학문 연구소인 만권당을 설치하여 고려의 이제현과 원의 조맹부 등의 학자들이 학문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②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편된 것은 충렬왕 대의 사실이다.

③ 우왕 대의 사실이다. 명(明)은 공민왕 때 수복한 철령 이북의 땅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자, 이에 대해 최영은 즉각적인 출병을 통해 요동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성계는 4불가론을 제시하며 출병에 신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 공민왕 대의 내용이다. 공민왕은 기철로 대표되는 친원파 세력을 숙청하였으며, 원의 내정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친원 세력의 연락 기구였던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또한 원에 의해 격하된 관제를 조·종 체제를 바탕으로 문종 때의 관제인 2성 6부 체제로 복구하였고, 몽골풍(몽골 복장, 족두리, 연지·곤지, 다처제)을 폐지하였다.



문  3. 다음 글을 근거로 할 때, 사료를 탐구하는 자세로 옳지 않은 것은?
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측면이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① 사료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므로 그대로 ‘사실로서의 역사’라고 판단한다.
② 사료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료가 기록된 당시의 전반적인 시대 상황을 살펴본다.
③ 사료 또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과거’이므로, 기록한 역사가의 가치관을 분석한다.
④ 동일한 사건 또는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는 여러 다른 사료와 비교․검토해 본다.


◈ 출제 영역 : 역사의 의미

● 정답 : ①

■ 해설 :
① 사료(史料)는 역사의 흐름 전체에서 보면 일부분에 불과하고 사료와 역사적 진실이 반드시 기술자의 편견 등으로 일치하지 않기에 사료의 신뢰성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먼저 외적 비판으로 사료의 작성 시기와 작성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확인하고 진본을 토대로 사료의 기술을 분석하고 기술 개개의 점에 관하여 신뢰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정답 : ①

제시된 자료는 역사 연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 비판’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고 있다.

① 사료에 있는 역사적 사실(事實)이 모든 역사적 사실(史實)일 수는 없다. 사료 안에 있는 역사적 사실(史實)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역사가의 사료비판 작업을 거쳐야 한다.

② 예를 들어 전시 검열이나 독재 체제하의 문서 있는 풍자나 비유, 수사법에 담겨 있는 내용의 의미는 단순히 문맥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전반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③ 사료 비판은 사료 연구자가 사료를 연구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작업으로 사료의 내용은 의식적이건 아니건 간에 그것을 만든 사람에 의해 선택된다. 즉, 완전하지 않은 불완전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한 역사가의 사관, 또는 가치관을 분석해야만 한다.

④ 사료 비판에 있어 교차 검토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교차 검토에 있어 같은 사건을 두고 각기 어떠한 관점과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해석 검토해야 하며, 그 안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 의미 등을 파악해야 한다.



문  4. 다음 결정문에 근거하여 실행된 사실로 옳은 것은?
조선을 독립시키고 민주국가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가혹한 일본의 조선 통치 잔재를 빨리 청산하기 위해 조선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①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②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③ 유엔 감시 하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④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 출제 영역 : 모스크바 3상 회의

● 정답 : ①

■ 해설 :
① 제시된 사료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1945년 12월 27일)으로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정부는 최고 5년 동안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② 서울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던 시기는 광복(1945년 8월 15일)과 더불어 최초의 정치 단체로 조직되었다.

③ 유엔 감시 하의 남한에서 총선거 실시는 1948년 5월 10일이다.

④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 시작은 1945년 8월에서 9월에 시작되었다.



정답 : ①

제시된 사료는 1945년 12월에 개최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문에 해당한다.

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3상 회의)에서는 한국 임시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 이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 임시 민주주의 정부와 협의하여 4개국(미,영,중,소)에 의한 최고 5개년간의 신탁통치 등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②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이 개편된 조직으로 시기상,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의 사실에 해당한다.

③ 유엔 감시하의 남한에서 실시된 총 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5.10 총선거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아닌 UN소총회의 결의(1948.2.26.)에 의해 시행되었다.

④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시작된 것은 광복 직후의 사실로, 이 또한 모스크바 3상회의 이전의 사실에 해당한다.



문  5. 밑줄 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4~5명의 개화당이 사건을 일으켜서 나라를 위태롭게 한 다음 청나라 사람의 억압과 능멸이 대단하였다. …(중략)… 종전에는 개화가 이롭다고 말하면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 조야(朝野) 모두 ‘개화당은 충의를 모르고 외인과 연결하여 매국배종(賣國背宗)하였다’고 하였다.
-'윤치호일기'-
① 정동구락부 세력이 주도하였다.
②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을 침범하였다.
③ 차관 도입을 위한 수신사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④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군이 청군에 패퇴하였다.


◈ 출제 영역 : 갑신정변

● 정답 : ④

■ 해설 :
④ 밑줄 친 ‘사건’은 개화당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일본 공사관이 소실되었고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 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데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물었고, 두 나라는 일본 공사관 신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을 체결하였다.

① 윤치호 등 손탁 호텔을 중심으로 한 정동구락부 세력은 독립협회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② 개화당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이어하고 정강을 발표하였으며, 일본이 경복궁을 침범하였을 때는 동학 농민 운동이 전개 과정에서 일어났다(1894년 6월 21일).

③ 개화당이 갑신정변 이전 수신사 박영효 등 여러 차례 차관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일본은 김옥균이 조선의 정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들어 차관 교섭을 기피하였고 보수 세력이 차관 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김옥균의 차관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답 : ④

문제의 밑줄 친 사건은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1884)에 해당한다.

④ 갑신정변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가 청의 내정간섭에 따른 개화정책의 침체 등에 불만을 품고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일으킨 정변에 해당한다. 당시, 급진개화파는 제물포 조약 체결 이후 공사관 경비를 목적으로 주둔한 일본군의 협조를 약속받고 대외적으로 청․프전쟁의 발발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일부가 철수하자 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은 청군에 의해 3일 만에 진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청군에 패퇴하였다.

① 정동구락부는 1895년경 서울 정동(貞洞)에서 개화파 정치인들과 서구 외교관들이 사교와 친목 도모를 내세우며 만든 모임을 말한다. 이들 세력은 이후, 독립협회(1896~1898) 창설을 주도하였다. 정동파를 구성했던 친미, 친러파 정치 세력들은 반일을 위해 일시적으로 연합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각기 자신들의 정치 지향과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하고 대립하였다.

②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개화파 세력은 일본군과 함께 경복궁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일본군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화약에 체결된 이후 강제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개혁(갑오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추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에 침범하였다.

③ 갑신정변은 3차 수신사였던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갔던 김옥균이 차관도입에 실패하면서 내렸던 일종의 최후의 수단이었다. 따라서 차관 도입 실패는 갑신정변의 배경이 되므로 결과라고 언급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문  6. 개항기 체결된 통상 협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일 통상장정(1876)-곡물 유출을 막는 방곡령 규정이 합의되었다.
② 조·청 수륙무역장정(1882)-서울에서 청국 상인의 개점이 허용되었다.
③ 개정 조·일 통상장정(1883)-일본과 수출입하는 물품에 일정 세율이 부과되었다.
④ 한·청 통상조약(1899)-대한제국 황제와 청 황제가 대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 출제 영역 : 각국과의 통상 조약

● 정답 : ①

■ 해설 :
① 방곡령 규정이 합의된 개정 조•일 통상 장정(조•일 무역 규칙, 1876년)은 양곡의 무제한 유출과 무관세를 규정하였고 개정된 1883년 내용에는 국내 사정에 의해 방곡령이 있을시 지방관이 1개월 전에 일본 영사관에 통고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②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년)에 의해 내지통상권이나 서울과 양화진에 상점을 개설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③ 개정된 조•일 통상 장정은 최혜국 대우와 관세가 일본에도 규정되었다.

④ 대한제국은 1899년 청과 대등한 관계에서 황제 명의로 한‧청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답 : ①

①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 1876)은 강화도 조약 직후 체결된 부속조약 중 일부로 양곡의 무제한 유출, 무관세, 무항세 등을 규정하였다. 이후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개정되면서 재해나 변란으로 인해 곡물 유출을 금지해야 할 때에는 1개월 전에 개항장과 영사관에 통보하고 곡물 유출을 금지할 수 있는 방곡령의 근거 규정이 마련되었다.

② 조․청 상민 수륙무역장정(1882)은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것으로 청국 상인을 대상으로 도성을 중심으로 적용되는 제한적 내지통상권을 허용하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이로 인해 청국 상인은 양화진을 중심으로 개잔무역을 행하였다.

③ 1876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조․일무역규칙)이 1883년 개정되면서 조선 화폐에 의한 관세 및 벌금 납입이 규정되었다.

④ 1899년 9월 11일 체결된 한․청통상조약은 대한제국이 청나라와 체결한 조약으로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표명하게 되었다.



문  7. (가)∼(라)의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가)-관등제를 정비하고 공복제를 도입하는 등 국가 통치 체제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② (나)-남쪽의 마한 잔여 세력을 정복하고, 수군을 정비하여 요서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③ (다)-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 일부 지역을 수복했으나 얼마 후 신라에게 빼앗겼다.
④ (라)-복신과 도침 등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비성의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 출제 영역 : 백제의 역사적 사건

● 정답 : ②

■ 해설 :
② 근초고왕(4세기 후엽)은 마한 세력을 정복하고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까지 진출하였기에 문주왕(475년 웅진 천도) 이전이다.

① 고이왕(3세기 중엽)은 율령 반포를 통해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였다.

③ 성왕(6세기 중엽)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를 일시 회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이 지역을 빼앗기고 관산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④ 백제 멸망(660년) 이후 흑치상지, 복신과 도침이 왕자 부여풍을 중심으로 임존성과 주류성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답 : ②

(가)는 백제 건국에서부터 개로왕의 전사와 웅진 천도, (나)는 문주왕의 웅진 천도에서부터 성왕의 사비 천도, (다)는 성왕의 사비 천도 이후부터 백제 멸망, (라)는 백제 멸망 직후부터 취리산 회맹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② 마한을 정복하고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것은 4세기 근초고왕 때의 사실로 시기상으로 본다면 (가)에 해당한다.

① 6좌평 16관등제와 자색, 비색, 청색 등의 공복 제정은 3세기 고이왕 대의 사실에 해당한다.

③ 성왕은 538년 사비 천도 이후,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수복했으나 이후,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이후, 성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관산성 전투(554)에서 전사하였다.

④ 660년 사비성 함락으로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과 도침은 왕자 풍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주류성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한때는 사비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부흥운동 과정에서 내분 등이 발생하였고 663년 백강(백촌강) 전투에서 왜의 부흥운동 지원군이 나․당연합군에 대패함으로써 결국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하였다.



문  8. 다음 자료에 나타난 통일 신라 시대의 신분층과 연관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그들의) 집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奴僮)이 3천 명이며, 비슷한 수의 갑병(甲兵)이 있다. 소, 말, 돼지는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기르다가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아먹는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어 늘리는데,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아 부린다.
-'신당서'- 
① 관등 승진의 상한은 아찬까지였다.
② 도당 유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③ 돌무지덧널무덤을 묘제로 사용하였다.
④ 식읍․전장 등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였다.


◈ 출제 영역 : 통일 신라의 귀족

● 정답 : ④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통일 신라 진골귀족들의 풍부한 경제 기반을 서술하고 있다.
④ 통일 신라의 귀족들은 식읍과 녹읍을 통하여 소유한 대토지나 목장 등에서 나온 수입으로 금입택이나 사절유택 등의 비용을 충당하였고 서민들을 상대로 한 고리대업도 수입원의 하나였다.

① 진골 귀족의 이벌찬까지 관등 승진이 가능하였으며, 아찬은 6두품의 관등 승진의 상한이다.

② 신라 하대 6두품에 대한 설명이다.

③ 돌무지덧널무덤은 통일 이전 신라에서 유행한 무덤 양식이다.



정답 : ④

제시된 사료와 관련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신분층은 진골귀족에 해당한다.

④ 통일신라의 진골귀족 등은 신라 중대 및 하대의 최상위 신분층으로 신분상 왕실 종친도 포함되기에 식읍을 하사받았으며 직역 수행의 대가로 녹읍 또한 지급받았다. 더불어서 이들은 이외에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장(개인이 소유한 논밭으로 대토지)과 수많은 노비들을 기반으로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향유하였다.

①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6관등 아찬이었던 것은 6두품에 대한 설명이다. 진골 귀족은 관등 승진의 제한선은 없었으므로 1관등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었다.

② 6두품은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정치 진출의 제한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고자 도당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당나라로 건너가 수학하면서 빈공과에 응시하였다.

③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은 4~6세기 마립간 시기의 대표적인 묘제로 문제에 언급된 시기와는 맞지가 않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돌무지 덧널무덤 대신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 주로 조성되었다.



문  9. 임진왜란 때의 주요 전투를 벌어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ㄴ.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ㄷ.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의 대군을 맞아 격전 끝에 진주성을 지켜냈다.
ㄹ.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의 수군을 격퇴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① ㄱ→ㄴ→ㄷ→ㄹ
② ㄱ→ㄷ→ㄴ→ㄹ
③ ㄹ→ㄴ→ㄷ→ㄱ
④ ㄹ→ㄷ→ㄴ→ㄱ


◈ 출제 영역 : 임진왜란

● 정답 : ④

■ 해설 :
㉣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법을 이용하여 승리(1592년 7월)

㉢ 진주 목사 김시민이 곽재우와 더불어 승리로 이끈 진주 대첩(1592년 10월)

㉡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작전(1593년 1월)

㉠ 권율의 행주 대첩(1593년 2월)






정답 : ④

ㄹ.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통해 왜의 수군을 격파한 것은 한산도 대첩으로 1592년 7월 8일에 해당한다.

ㄴ. 진주대첩에 대한 내용으로 시기상 이는 1592년 10월 5일~11일에 해당한다. 이는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진주성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관군이 왜군을 맞아 승리한 전투로, 이 과정에서 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ㄷ.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한 조․명연합군이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와가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한 시기는 1593년 1월 6일~9일에 해당한다.

ㄱ. 행주대첩에 대한 설명으로 이는 시기상 1593년 2월 12일에 해당한다.



문 10. 밑줄 친 ‘이 법’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현물로 바칠 벌꿀 한 말의 값은 본래 목면 3필이지만, 모리배들은 이를 먼저 대납하고 4필 이상을 거두어 갑니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이 법을 시행하면 부유한 양반 지주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가난한 농민이 원망한다는데, 농민의 원망이 훨씬 더 큽니다. 경기와 강원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으니 충청과 호남 지역에도 하루빨리 시행해야 합니다.
① 토지 결수를 과세 기준으로 삼았다.
② 인조 때 처음으로 경기도에서 시행하였다.
③ 이 법이 시행된 후에도 왕실에 대한 진상은 계속되었다.
④ 이 법을 시행하면서 관할 관청으로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 출제 영역 : 대동법

● 정답 : ②

■ 해설 :
제시된 사료의 대납(방납)을 통해 ‘이 법’이 그 개선책인 대동법임을 알 수 있다.

②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원익, 한백겸의 건의로 경기도에서 최초로 시행하였다. 이후 인조 때에 조익의 건의에 따라 강원도까지 확대되었다.

① 대동법은 기존 호를 기준으로 징수하던 공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이나 포목, 돈으로 부과하게 되었다.

③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공은 없어졌으나 별공이나 진상의 현물 징수는 존속하였다.

④ 대동법의 시행되면서 운영 관청으로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정답 : ②

밑줄 친 ‘이 법’은 광해군 때 시행된 대동법(1608)에 해당한다.

② 대동법은 광해군 때 최초로 경기도를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이후 숙종 때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되기 까지 100년이 소요되었다. 인조 때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영정법에 해당한다.

① 대동법은 종래의 현물 단위로 징수하던 공물을 쌀, 베, 돈 등으로 징수하던 것으로 원칙적으로 1결당 12두의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토지 결수를 과세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공납의 전세화를 의미한다.

③ 대동법은 항상 정기적으로 납부하던 상공이 변화한 것으로 별도로 징수하던 별공과 왕실에 대한 진상은 이후로도 현물 납부로 지속되었다.

④ 광해군 때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전담 관청으로 선혜청이 설치되었다.



문 11. 밑줄 친 ‘왕’ 때의 사실로 옳은 것은?
재위 2년에 전진 국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며 불상과 경문을 전해왔다. (이에 우리) 왕께서 사신을 보내 사례하며 토산물을 보냈다.

재위 5년에 비로소 초문사를 창건하고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또 이불란사를 창건하고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이것이 해동 불법(佛法)의 시작이었다.
-'삼국사기'-
① 역사서인 '신집'을 편찬하였다.
② 진휼 제도로 진대법을 도입하였다.
③ 유학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치하였다.
④ 왜에 종이와 먹의 제작 방법을 전해 주었다.


◈ 출제 영역 : 소수림왕

● 정답 : ③

■ 해설 :
사료의 밑줄 친 ‘왕’은 고구려의 소수림왕으로 백제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진과 수교하고  순도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③ 소수림왕은 유학 교육 강화를 위해 국립  대학인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고대국가 체제를 강화하였다.

① 고구려 영양왕 때 이문집이 「유기」를 간추려 역사서인 「신집」을 편찬하였다.

② 고국천왕 대 춘대추납의 진대법을 실시하여 국역 기반을 확보하고 귀족을 견제하였다.

④ 고구려 담징이 그림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일본에 전해준 것은 7세기경이다.



1. 정답 : ③

제시된 사료에서 밑줄 친 왕은 소수림왕이다.

③ 소수림왕은 태학을 설립하여 유학의 보급과 문화의 향상을 가져왔다.(372)

① 영양왕에 대한 내용이다. 고구려에는 『유기』 100권이 있었는데, 600년(고구려 영양왕 11년)에 이를 고쳐 『신집』 5권을 새로이 편찬하였다.

② 고국천왕에 대한 내용이다. 고국천왕 때 흉년과 고리대로 인하여 몰락한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로서 춘대추납(春貸秋納)의 진대법이 실시되었다.

④ 영양왕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10년에 고구려왕이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바쳤는데, 담징(曇徵)은 5경(五經)을 알고 또한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 12. 192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대종교 계통 인사들이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②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③ 민족 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④ 한국독립군이 한․중 연합작전으로 동경성에서 승리하였다.


◈ 출제 영역 : 192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

● 정답 : ④

■ 해설 :
④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한중 연합 작전으로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의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사도하자, 동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① 신민부는 북만주에 자유시 참변 이후 대종교 계통의 인사들이 내려와 1925년에 조직하였다.

②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 1920년 6월 20일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③ 1920년대 중반 이후 1차 국공 합작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3부의 통합 노력이 있어 통일 협의회를 구성하였으나 일부 혁신의회와 다수의 국민부로 통합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정답 : ④

④ 동경성 전투는 1933년에 일어났다. 혁신 의회 산하의 한국 독립군은 사령관 치청천을 중심으로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중 • 한 토일군을 조직하여 쌍성보 전투(1932), 사도하자 전투(1933), 동경성 전투(1933), 대전자령 전투(1933)에서 일 • 만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① 신민부 결성은 1925년 3월이다. 신민부는 대한 독립군단과 대한 독립 군정서 등 자유시 참변 이후 귀환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북만주에서 결성되었다.

②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에 일어났다.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 안무의 국민회군 •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이 연합 작전을 펼쳐 봉오동에서 일본군 500여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③ 국민부 결성은 1929년 4월이다. 1927년 3부의 간부들의 일제에 체포되면서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중앙 집권적 유일당을 추구하던 3부 인사들(촉성회파)를 중심으로 혁신 의회(1928. 12)가 북만주에서 조직되었고, 이듬해 각기 단체를 인정한 가운데 통합 기구를 창설할 것을 주장하던 3부 인사들(협의회파)을 중심으로 남만주에서 국민부(1929. 4)가 성립되었다.



문 13. 다음 자료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시기의 사회 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근래 세상의 도리가 점점 썩어가서 돈 있고 힘 있는 백성들이 갖은 방법으로 군역을 회피하고 있다. 간사한 아전과 한통속이 되어 뇌물을 쓰고 호적을 위조하여 유학(幼學)이라 칭하면서 면역하거나 다른 고을로 옮겨 가서 스스로 양반 행세를 하기도 한다. 호적이 밝지 못하고 명분의 문란함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다.
-'일성록'-
① 사족들이 형성한 동족 마을이 증가하였다.
② 향회가 수령의 부세자문기구로 변질되었다.
③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재소가 설치되었다.
④ 부농층이 관권과 결탁하여 향임직에 진출하였다.


◈ 출제 영역 : 조선 후기 사회 모습

● 정답 : ③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조선 후기 납속책 등을 통해 신분제의 동요를 보여주고 있다.
③ 경재소는 조선 세종 때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이다.

① 조선 후기 부계 중심의 사회로 가면서 동성(同姓) 마을이 증가하였다.

② 조선 후기의 향회는 사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물어보는 자문 기구로 변하하는 등 기능이 약화되었다.

④ 부농층은 국가 재정 위기 타개책에 편승하거나 관권과 결탁하여 향임직에 진출하는 등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정답 : ③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③ 경재소는 중앙 관직에 오른 현직 관료에게 자기 출신 지역의 유향소에 대한 연대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로 수도에 설치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36년(1603)에 폐지되었다. 유향소는 각 군현에 향촌 사족 유지들로 구성된 자치 기구이다.

① 조선 후기에는 양반은 군현을 단위로 농민을 지배하기 어렵게 되자, 촌락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거나 족적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를 지켜 나가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과 사우가 많이 세워졌다.

② 18세기 이후 점차 종래 재지 사족의 힘이 약화되고, 부농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향촌 세력의 힘이 강해지지 못한 가운데,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종래 재지 사족인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여 왔던 향회는 수령이 세금을 부과할 때에 의견을 물어보는 자문 기구로 구실이 변화하였다.

④ 18세기 중반부터 부세의 공동 납부 형태인 총액제 수취권에 대한 향촌 지배권을 두고 구향(사족)과 신향(향리) 간에 향전이 발생하였다.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 사족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향임직에 진출하거나 기존 향촌 세력과 타협하면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하여 갔다.




문 14. 밑줄 친 ‘이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 사람은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곧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삼년상이 끝나고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을사사화 등으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이내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1546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향리로 퇴거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경상도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조선 왕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다.
① 서리망국론을 부르짖으며 당시 서리의 폐단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② 아홉 차례의 과거 시험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③ 주희의 성리설을 받아들였으며, 이기철학에서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
④ 우주자연은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는 영원불멸하면서 생명을 낳는다고 보았다.


◈ 출제 영역 : 이황

● 정답 : ③

■ 해설 :
제시된 지문을 통해 밑줄 친 ‘이 사람’은 이황에 대한 내용이다.
③ 이황은 주희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주리론을 집대성하는 등 동방의 주자라 칭하였으며 이귀기천론을 통해 이의 절대성을 강조하여 유성룡, 김성일 등에 영향을 주었다.

① 서리망국론은 조식이 방납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주장하였다.

② 구도장원공은 이이로 중요 관직에 나가 집권 세력으로 현실적이고 개혁적인 면이 있었다.

④ 기에 천착한 서경덕과 관련이 있다.



정답 : ③

제시된 사료에서 밑줄 친 이 사람은 이황이다.

③ 이황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계승하여 이귀기천론(理貴氣賤論)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불완전한 기(氣)보다는 완전한 이(理)를 중시하였다.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이(理)로 돌아가기 위해 인간 스스로 도덕과 윤리를 확립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① 조식에 대한 내용이다. 조식은 1568년에 선조에게 올린 「무진봉사」에서 서리망국론을 제시하여 당시 서리의 폐단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② 이이에 대한 내용이다. 6살 때 서울 본가로 온 이이는 이후 과거에서 9번이나 장원을 하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④ 서경덕에 대한 내용이다. 서경덕은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도교에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는데, 우주자연은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는 영원불멸하면서 생명을 낳는다고 보았다.




문 15. 다음 선언문을 강령으로 했던 단체의 활동으로 옳지 않은 것은?
우리는 일본 강도 정치 즉 이족 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① 민족혁명당 창당에 가담하였다.
② 경성 부민관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③ 일본 제국의회와 황궁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④ 임시정부 요인과 제휴한 투탄 계획을 추진하였다.


◈ 출제 영역 : 의열단 활동

● 정답 : ②

■ 해설 :
제시된 사료는 신채호가 1923년에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으로 김원봉이 1919년 길림에 조직한 의열단의 강령이다.

② 경성 부민관 투척 사건은 1945년 7월 비밀결사인 대한 애국 청년단의 단원 조문기, 유만수 등이 종합공연장으로 일제 찬양이 가득하자 폭탄을 투척하여 대회를 무산시켰던 사건이다.

①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 좌우익의 여러 단체들이 민족 독립운동의 단일 정당을 목표로 1935년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③ 1924년 의열단인 김지섭의 이중교 투척 사건이다.

④ 1926년 나석주 의거는 김구와 함께 임정을 이끌던 김창숙의 요청으로 동양척식 주식회사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정답 : ②

제시된 내용과 관련된 단체는 의열단이다.

② 대한 애국 청년 단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은 1945년 경성 부민관에서 전시 선전과 동원을 위한 ‘아시아 민족 분격 대회’가 개최되자, 부민관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전시 선전과 식민 통치에 저항하였다. 

① 의열단은 일제 식민 지배 기관을 파괴하고 조선 총독부 고위 관리와 친일 인사를 처단하였지만 개별적 폭력 투쟁의 한계를 인식하고 조직적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후 의열단은 1932년에 독자적으로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고, 중국 지역 내의 독립 단체를 규합하여 1935년 조선 민족 혁명당 결성을 주도하였다.

③ 의열단원 김지섭은 1924년 도쿄에서 개최되는 제국회의에 일제 총리를 비롯한 많은 대신과 조선 총독이 참석하는 것을 신문보도를 통해 입구하고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총리 등 요인을 처단하기 위해 도쿄에 도착하였지만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꿔 일본의 궁성을 폭파하기로 계획하였다. 1924년 동경 궁성 니주바시에 3개의 폭탄을 투탄하였지만 불발되고 말았다.

④ 의열단원 김상옥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제휴하여 의열 투쟁을 준비하였고,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투탄 후 일본 군경과 총격전 끝에 자결하였다. 



문 16. 다음 상황이 나타난 시기에 추진한 정부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외국 사람들이 조계지를 지키지 않고 도성의 좋은 곳에 있는 집은 후한 값으로 사고 터를 넓히니 잔폐(殘廢)한 인민의 거주지가 침범을 당한다. 또한 여러 해 동안 도로를 놓고 있기 때문에 집들이 줄어들었다. 탑동(塔洞) 등지에 집을 헐고 공원을 만든다 하니 …(중략)… 결국 집 없는 사람이 태반이 될 것이다.
-매일신문-
①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았다.
②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 민족계 은행을 지원하였다.
③ 중추원을 개조하여 우리 옛 법령과 풍속을 연구하였다.
④ 한성전기회사를 통하여 서울에 전차노선을 개통하였다.


◈ 출제 영역 :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

● 정답 : ③

■ 해설 :
‘매일신문’은 1898년에 창간된 신문으로 구한말 외국인의 유입으로 침탈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③ 중추원은 대한제국 시기에는 민의를 반영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개편되어 총독부 자문 기관으로 설치되었으나 실제 조선의 제도나 관습 등 식민 통치에 참고할 자료를 수집하는 등 친일학술 기관 역할을 하였다.

① 대한제국에서는 경운궁(덕수궁)을 정궁으로, 평양을 서경으로 격상시키고 풍경궁이라는 행궁을 건설하였다.

② 한성은행, 천일은행 등 근대 개항기에 설립한 민족계 은행이나 일제 화폐 정리 상업으로 몰락하였다.

④ 1890년대에 황실과 미국인 콜브란의 합자로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899년에는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를 운행하는 전차가 최초로 운행되었다.



정답 : ③

제시된 내용은 대한 제국 시기이다.

③ 중추원은 본래 갑오개혁 때 국왕 자문기구로 만들어졌으나 유명무실화된 상태였고, 이후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운동 당시 주목되었으나, 결국 의회로 개편되는 데 실패하였다.

①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경운궁(덕수궁)을 정궁으로 삼았다.

② 대한 제국은 김종한 등 고위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성은행, 심상훈, 민병석 등의 정부 고급 관료들과 김두승의 실업가들이 발기인으로 참가한 대한천일은행 등 민족계 은행을 지원하였다.

④ 대한제국 시기 한성전기회사를 통하여 서울에 전차노선을 개통하였다(1899).



문 17. 밑줄 친 ‘이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신라 말기에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이 중국에서 유행한 이 사상을 전하였다. 이는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주택․묘지 등을 선정하는, 경험에 의한 인문 지리적 사상이다. 아울러 지리적 요인을 인간의 길흉화복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자연관 및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
① 신라 말기에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일반 백성의 인식이 반영되었다.
② 신라 말기에 호족이 자기 지역의 중요성을 자부하는 근거로 이용하였다.
③ 고려시대에 묘청이 서경 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논리로 활용하였다.
④ 고려시대에 국가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초제로 행하여졌다.


◈ 출제 영역 : 풍수지리설

● 정답 : ④

■ 해설 :
제시된 ‘이 사상’은 풍수지리 사상이다.
④ 도교에 대한 설명이다. 초제는 도교에서 여러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고려시대 때 국가적 행사로 개최되어 예종 때 도교 사원인 복원궁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①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것에서 주택이나 묘지 선정 등에 반영되었다.

② 풍수지리 사상은 신라 하대 경주 중심의 지리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방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특히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신봉되면서 신라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③ 고려 초기에는 개경과 서경이 명당설이 유포되면서 특히 서경명당설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정답 : ④

제시된 자료의 밑줄 친 ‘사상’은 풍수지리설이다.

④ 도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고려시대 궁중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초제(醮祭)가 성행하였는데, 예종 10년(1115)에 도교 사원(복원궁)을 처음 건립하였으며, 이곳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하늘과 별들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 행사를 개최하였다.

① 풍수지리설은 경주 중앙 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지방 호족들의 대두, 오랜 전란에 지쳐 통일의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일반 백성들의 인식을 종합하였다.

② 풍수지리설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국토 관념을 비판하면서 지방을 중심으로 국토를 재편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신라 중앙 정부의 권위와 통제력을 약화시켰으며, 각 지방에서 호족이 나타나게 된 사상적 근거로 제시되었다.

③ 고려 시대에는 개경·서경 길지설이 널리 유행하였으며, 개경과 서경이 명당이라는 설이 유포되면서 서경 천도 및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경 길지설은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문 18. 전시과 제도의 변천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가) 제도에 대한 <보기>의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모두 고른 것은?
<보  기>
ㄱ. 4색 공복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ㄴ. 산직(散職)이 전시의 지급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ㄷ. 등급별 전시의 지급 액수가 전보다 감소하였다.
ㄹ. 무반과 일반 군인에 대한 대우가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① ㄱ, ㄴ
② ㄷ, ㄹ
③ ㄱ, ㄴ, ㄷ
④ ㄴ, ㄷ, ㄹ


◈ 출제 영역 : 전시과 제도의 변천 과정

● 정답 : ④

■ 해설 :
(가) 제도는 문종 때 시행한 경정전시과이다.

㉡  경정전시과에서는 현직(職官) 관리만을 지급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산직(散職)인 퇴직자 등에는 전시과의 과전 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경정전시과에서는 전체적으로 개정 전시과에 비해 등급별로 토지 지급 액수가 감소하였다.

㉣ 경정전시과에서는 현종 때 거란 격퇴에 공을 세운 무관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어 무반에 대한 대우가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 시정 전시과에 대한 설명으로 광종 때 시행한 관복제도를 고려하여 관품이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



정답 : ④

제시된 자료의 (가) 제도는 문종 대의 경정 전시과이다.

ㄴ. 귀족이나 관료들의 토지 독점과 세습이 심화되면서, 관리에게 지급할 수조지가 부족해지게 되자, 공음전(5품 이상)과 한인전·구분전(6품 이하)을 제외하고,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경정 전시과를 마련하였다.

ㄷ. 경정 전시과는 개정 전시과에 비해 토지 분급량이 더욱 축소되면서 제15과 이하로는 시지가 지급되지 않았다.

ㄹ. 경정 전시과는 무신에게 지급된 과등이 크게 향상되어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는데, 이는 거란과의 항쟁 과정에서 무신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거나, 이들이 담당한 직역이 고역(苦役)이라는 점을 감안해 준 결과로 파악된다.

ㄱ. 4색 공복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어 분급한 것은 경종 대의 시정 진시과이다.



문 19. (가)와 (나) 시기 고조선에 대한 <보기>의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고른 것은?
<보  기>
ㄱ. (가)-왕 아래 대부, 박사 등의 직책이 있었다.
ㄴ. (가)-고조선 지역에 한(漢)의 창해군이 설치되었다.
ㄷ. (나)-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며,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였다.
ㄹ. (나)-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분포를 통하여 통치 지역을 알 수 있다.
① ㄱ, ㄷ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ㄴ, ㄹ


◈ 출제 영역 : 고조선

● 정답 : ①

■ 해설 :
(가)는 단군 조선, (나)는 위만 조선 시기이다.

ㄱ. 고조선은 3세기경 왕위를 세습하고 관직으로 왕 밑에 관직으로 상(相), 대부(大夫), 대신(大臣), 장군(將軍), 박사(博士) 등이 있었다.

ㄷ. 위만 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고 동방의 예(濊)나 남방의 진(辰)이 한(漢)과 무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을 통해 이득을 취하였다.

ㄴ. (나) 시기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창해군은 위만조선에 반발한 예의 군장 남려가 28만 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한 무제가 요동에 설치한 군 이름이다(기원전 126년).



정답 : ①

ㄱ.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무렵 대부(大夫)라고 표현된 별도의 관(官)까지 두고 있었으며, 위만이 망명해 왔을 때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직임이 부여된 직능인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외에 지방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하는 지방관을 지칭한 경우도 있다.

ㄷ. 위만이 집권한 이후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또한 준왕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철기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ㄴ. 압록강 중류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28만 구(口)를 이끌고 위만조선의 예속에서 벗어나 한의 요동으로 내속하자 (기원전 128), 한 무제는 그 땅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으나 토착인의 반항에 못견뎌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ㄹ. 위만 집권 이전의 내용이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북방형)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으며, 미송리식 토기와 거친무늬 거울의 출토 지역도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짐작케 해 준다.



문 20. 다음 법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17관 임시토지조사국은 토지대장 및 지도를 작성하고, 토지의 조사 및 측량한 것을 사정하여 확정한 사항 또는 재결을 거친 사항을 이에 등록한다.
① 토지와 임야를 함께 조사하도록 하였다.
② 토지 등급은 물론 지적, 결수, 지목 등을 신고하도록 하였다.
③ 지역별 지가와 그것의 1.3%를 지세로 하는 과세 표준을 명시하였다.
④ 본 법령에 따라 토지 소유를 증명하는 토지가옥증명규칙과 시행세칙이 공포되었다.


◈ 출제 영역 : 토지 조사 사업

● 정답 : ②

■ 해설 :
제시된 자료는 1912년에 제정된 토지조사령이다.
② 토지 조사령 제 4조에 따르면 토지 소유주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 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 번호, 사표, 등급, 지적, 결수를 임시 토지 조사 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하여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하여 많은 약탈하였다.

①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별도로 삼림령을 통해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임야를 강제적으로 편입시키고 1917년에는 임야 조사령을 통해 전 산림의 50에서 임야를 강탈하였다.

③ 1918년 개정된 지세령은 필지별 토지수익에 근거한 지가를 과세 표준으로 하였다.

④ 토지 가옥 증명 규칙은 1906년 외국인 즉 일본인도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법령이다.



정답 : ②

제시된 자료의 법령은 1912년 공포된 토지 조사령이다.

② 토지 조사 사업은 소유권 조사, 토지 가격 조사, 지형·지목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농민이 직접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하였다(기한부 신고제).

① 토지 조사 사업은 근본적으로 토지 소유권의 재조정을 통하여 식민 통치를 위한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토지의 매매·저당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일본인의 적극적인 토지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임야에 대한 약탈은 산림령(1911)을 공포하여 모든 산림에 관한 관리를 총독부가 담당하였고, 임야 조사령(1918, 임야 조사 사업)을 발표하여 전 산림의 50% 이상을 총독부와 일본인이 강점하였다.

③ 지세령에 대한 내용이다. 1913년부터 1년간 지세는 44.7% 증가하였으나, 반대로 미곡 가격은 폭락하여 1914년 이후 3년간 지세 체납으로 인해 차압을 당해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이 36,061명에 달하였다. 1918년 6월 지세령이 새롭게 만들어져 지가의 1000 분의 13(1.3%)을 지세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④ 한일 병합 이전의 내용이다. 토지 가옥 증명 규칙은 대한제국이 1906년(대한제국 광무 10년) 칙령 및 법부령(法部令)으로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 확대를 허용한 법령을 말한다. 이 법령은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개항장 등 특정 지역에만 제한되었던 것을 폐지하고 국내 어디에서나 부동산 소유를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를 통해 일본인의 조선 진출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애물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 법령과 한일 병합 이후 시행된 조선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조선의 토지 경제는 제도적⋅실제적으로 완전히 일본에게 장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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