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3일에 시행한 국가직 7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문 1.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임을 보여주는 문화 유산으로 옳은 것은?
① 공주 송산리 고분
② 부여 능산리 고분
③ 백제 금동 대향로
④ 서울 석촌동 고분


정답: ④

해설 :
서울 석촌동 고분은 계단식(피라미드식) 돌무지무덤으로서 초기 고구려 무덤양식(장군총)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백제 건국 설화(비류-온조 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유이민설을 입증하는 것이다.



☞답 ➃
서울 석촌동 고분은 계단식 돌무지 무덤으로 고구려 초기 무덤인 장군총과 같은 구조로 고구려인이 백제를 건국하였음을 알려주는 주요 증거이다.

문 2. 밑줄 친 그가 시행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권세있는 신하는 공신이든 처남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하고, 6조를 직접 장악하여 의정부 재상중심의 정책운영을 국왕중심체제로 바꾸었다.
① 공법을 실시하여 전세를 낮추고 공평하게 부과하였다.
② 언론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을 견제하게 하였다.
③ 호적사업을 강화하고 보법을 실시하여 군정수를 늘렸다.
④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료하여 반포하였다.


정답: ②

해설 :
6조 직계제를 실시한 조선시대 국왕은 태종과 세조이다. 그러나 세조와는 달리 태종은 조선 건국에 기여한 공신과 네 처남 등을 처단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임금이 장씨를 존중해서 방번에게 뜻이 있었다.”고 했는데 개국공신들이 방석을 추천해서 세자로 삼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국공신들의 영향력은 이처럼 막강했다.

조선 초기는 정도전과 권근이 조선을 다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정도전은 세자 방석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으나 태종에게 제거당하였다. 태종(이방원)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등 4형제도 모두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희생되어 사사되었다.
① 공법 실시는 세종, ③ 호적사업을 강화하고 보법을 실시한 것은 세조이며, ④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료하여 반포한 것은 조선 성종 때의 일이다.



☞답 ➁
태종의 6조직계제에 대한 설명이다.
➀ 세종, ➂ 세조, ➃ 성종의 업적이다.

문 3. 각 시대의 관료 선발제도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으로만 묶은 것은?
ㄱ. 통일신라의 독서삼품과는 골품신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관료를 채용하였다.
ㄴ. 고려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따라 과거제를 시행하여 관료를 채용하였다.
ㄷ. 조선에서는 생원․진사시에 입격하면 성균관에 진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ㄹ.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통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 관리 임용 제도를 도입하였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ㄷ, ㄹ


정답 : ③

해설 :
ㄱ. 통일신라의 독서삼품과는 최초의 관리 선발제도로 원성왕(8C)때의 일이다. 골품신분에 따라 3등급으로 등용한 것이 아니라 학문 성적에 따라 3개의 품계로 구분하여 관리를 등용한 것이다. 이것은 왕권강화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진골귀족의 반발과 골품제의 모순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ㄴ. 광종은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초의 과거제도를 실현함으로써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ㄷ. 조선시대 초기의 생원, 진사시는 관료후보자를 선발하는 문과(文科)에 나가기 위한 예비단계이었다.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응시자는 성균관에 들어가거나 문과에 응시하였다.

ㄹ. 과거제 폐지는 1894년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답 ➂
ㄱ. 통일신라의 독서삼품과는 골품신분이 아니라, 성적순으로 3등급으로 관료를 뽑는 제도로, 골품제도를 지지하는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ㄹ. 과거제도는 광무개혁이 아니라, 갑오개혁때 폐지되었다.

문 4. 평양 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 후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②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③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격침되었다.
④ 1920년대 초에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정답 : ①

해설 :
나성은 군사상 방위의 목적으로 도읍 외곽에 외성을 쌓는 것으로 거란의 3차 침입 후 고려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에 나성을 축조한다(1029).

② 조위총의 난은 1174년 평양에서 일어난 서북‧서경유수 조위총이 서북지방인의 불만을 이용하여 난을 일으킨 최대의 난이다.

③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평양)으로 몰고 와 마음대로 수심을 측량하고 조총을 발포하다가 선체가 섬 모래톱에 걸렸는데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적극적 대응을 결의하여 셔먼호가 불타고 선원들이 살해된 사건이다.

④ 1920년대 초에 물산장려운동은 평양에서 조만식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다.



☞답➀
➀ 나성은 평양이 아니라, 개경에 축조하였다.

문 5. (가), (나) 사론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나) 한국사는 역사적 발전 단계를 거치지 못하여 근대로의 이행에 필수적인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전 근대 단계에 머물러 있어 사회 경제적으로 낙후한 상태다.
① (가)와 같은 입장에서 쓰여진 대표적인 사서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있다.
② (가)의 저자는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칭하였다.
③ (나) 사론의 주창자들은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 하였다.
④ (나)의 사관에 입각해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가 집필되었다.


정답 : ③

해설 :
(가)는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1931)]의 내용이며, (나)는 일제의 식민사관인 ‘정체성론’에 관련된 내용이다.

③ 일제 식민사관을 주장한 사람들은 정체성론을 인정하였고 정체성론을 반박한 사람은 사회경제 사학자 백남운의 ‘역사발전단계설’이다.

① 박은식은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혼’을 강조한 신채호와 함께 2대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②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④ 조선사편수회 (1925)의 「조선사」 역시 일제 식민사관의 연장선에서 집대성된 책이다.



☞답➂
(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 (나) 식민지 사관 중 정체성 이론

문 6. 다음 백제와 관련된 사건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배열한 것은?
ㄱ. 불교가 전래됨
ㄴ. 웅진으로 천도
ㄷ. 나․제동맹의 성립
ㄹ. 칠지도 제작
① ㄷ-ㄴ-ㄹ-ㄱ
② ㄷ-ㄹ-ㄴ-ㄱ
③ ㄹ-ㄱ-ㄷ-ㄴ
④ ㄹ-ㄷ-ㄱ-ㄴ


정답 : ③

해설 :
ㄹ. 칠지도 제작(근초고왕, 4C) - ㄱ. 불교가 전래됨(침류왕, 4C) - ㄷ. 나․제동맹의 성립(비유왕-눌지왕, 433) -  ㄴ. 웅진으로 천도(문주왕, 475)



☞답 ➂ 
ㄹ. 4세기 근초고왕 - ㄱ. 4세기 침류왕 - ㄷ. 5세기(433년) - ㄴ. 5세기(475년)

문 7. 불교계의 동향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원효는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②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③ 지눌은 선과 교학의 근본이 하나라는 정혜쌍수를 사상적인 바탕으로 삼았다.
④ 요세는 법화신앙에 중점을 둔 백련결사를 제창하여 지방민의 호응을 얻었다.


정답 : ①

해설 :
①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해동 화엄종을 개창하고 교단을 형성한 승려는 의상이다. 그는 화엄종 교리의 중심인 일즉일체‧일체즉일의 원융무애와 화엄일승법계도 등을 통하여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② 의천은 교종 중심의 선종 통합으로 교관겸수, 내외겸전 등의 사상을 가졌다.

③ 지눌은 선종 중심의 교종 통합으로 정혜쌍수, 돈오점수, 불립문자, 교외별전를 주장하였다.

④ 원묘국사 요세는 백성들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덕사(백련사)에서 백련결사를 제창하였다.



☞답 ➀
➀ 원효가 아니라, 의상에 대한 설명이다.

문 8. 밑줄 친 그가 실시한 개혁 정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그의 즉위 이후에도 원의 간섭은 여전하였고, 친원파 역시 건재하였으나, 친원파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 때마침 원에서 기 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봉해지자, 이러한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를 계기로 기철의 권력이 그를 압도할 정도로 커졌고 기철의 일족과 친원파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①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②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③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교육기관으로 개편하고 유교교육을 강화하였다.
④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하여 개혁정치를 수행하였다.


정답 : ④

해설 :
사료의 밑줄 친 그는 공민왕이다.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을 설치한 군주는 충선왕이다. 정방을 폐지한 것은 충선왕과 공민왕이 모두 해당되지만 사림원은 충선왕 때의 개혁기구이고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때의 개혁기구였다.

① 요동 지방을 공략하여 요양점령, ② 불법적인 사법권 행사로 작폐가 심했던 정동행성의 이문소 폐지, ③ 신진사대부를 육성하기 위하여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교육기관으로 개편한 것은 모두 공민왕 때의 개혁정책이었다.



☞답➃
지문은 공민왕에 대한 설명이다.
 ➃ 사림원을 설치한 것은 충선왕의 업적이다.

문 9. 고려의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에서 공통점에 해당되는 것으로 묶은 것은?
ㄱ. 관리들에게 18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였다.
ㄴ. 과전은 본인 사후 반납이 원칙이었다.
ㄷ. 현직관리에게만 지급하였다.
ㄹ.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세습이 허용된 별도의 토지가 지급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ㄹ
④ ㄷ, ㄹ


정답 : ①

해설 :
왕토사상으로 원칙적인 소유권은 국가에 있었으며, 수조권의 귀속여부에 따라 공전과 사정으로 분급하였다는 점 등이 전시과와 과전법의 공통점이다. 또한 과전법과 전시과 모두 과전은 18등급에 따라 구분하여 지급하였고 현직‧구직 관리에게 모두 지급하였으며 1대에 한하는 수조권이 위임되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ㄷ. 전시과의 마지막 형태인 경정전시과에서는 현직관리에게만 지급하는 것은 변경되었다.

ㄹ.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세습이 허용된 별도의 토지 지급은 고려 전시과의 경정전시과 하에서 공음전의 지급을 말한다.



☞답➀
ㄷ. 전시과 중 경정전시과는 현직자에게만 지급하였고, 과전법은 현직, 전직 관료에게 지급하였다.
ㄹ. 고려의 전시과 중 공음전에 대한 내용이다.

■전시과와 과전법의 비교

전시과(고려) 과전법(조선)


․토지 국유제 원칙
․직·산관에게 수조권 지급(시정 전시과)
․관등에 따라 차등 지급
․세습 불가
․토지 국유제 원칙
․직·산관에게 수조권 지급
․관등에 따라 차등 지급
․세습 불가


․전지와 시지 지급
․전국 어느 곳의 토지나 지급할 수 있었음.
․농민의 경작권이 법적 보장 안 됨.
․전지만 지급
․경기에 한하여 지급(중앙 집권과 재정 확보책)
․농민의 경작권이 법적 보장됨(영구 경작권=실질적 소유권).

과전법과 전시과는 그 원칙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고려 말 이성계의 과전법 공포는 전시과의 원칙으로 환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 10. 다음 자료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 청과의 조공관계를 청산하고 대원군을 다시 데려 온다.
○ 양반신분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인민평등을 실현한다.
○ 내시부, 규장각 등 왕의 근시기구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에 입각한 내각제를 수립한다.
①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어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② 청일전쟁으로 청군이 일부 철수한 상황에서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일으켰다.
③ 봉건적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여 근대적 평등사회를 이루려고 하였다.
④ 일본의 침략 의도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력 지원을 받아 외세의 조선 침략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답 : ②

해설 :
사료는 1884년 갑신정변의 ‘신정부 강령 14개조’의 내용이다. 갑신정변은 1884년의 일이고 청일전쟁은 1894년의 일이므로 근대사에 있어서는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 갑신정변 직전 청불사변으로 청군의 일부(당시 총 3,000명의 청군 중에서 약 1,500명)가 철수한 상황에서 일본의 군사적 지원약속을 성급히 믿고 일으킨 면이 있다. 나머지 보기는 모두 신정부 강령 14개조의 내용에 해당된다.



☞답➁
지문은 갑신정변에 대한 내용이다.
➁ 청일전쟁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발생한 청ㆍ프전쟁으로 청군이 일부 철수하였다.

문 11. 통일 신라의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경주 인구의 증가로 상품 생산이 늘어 동시, 서시, 남시 등의 시장이 설치되었다.
② 역(役)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체로 16에서 60세의 남자에게 부과되었다.
③ 무역의 확대로 중국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방, 신라소, 신라관, 신라원 등이 설치되었다.
④ 귀족은 식읍과 녹읍을 통해 그 지역 농민을 지배하면서 조세와 공물을 거두었으나, 노동력의 동원은 불가능하였다.


정답 : ④

해설 :
녹읍과 식읍은 수조권 행사 외에도 노동력 징발을 함께 부여한 귀족의 경제적 특권이었다. 노동력의 동원은 불가능한 것은 관료전 지급이었다. ① 시장의 설치는 지증왕 때 동시의 설치를 기점으로 통일 이후 서시, 남시 등의 시장이 설치되었다. ② 군역과 요역은 일반적으로 16~60세의 남자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③ 신라의 대외무역에서 신라방은 신라인의 거주지로서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류에 주로 진출함을 알 수 있으며, 신라소는 신라방 안에 설치된 자치적 행정기관(관청소), 신라관은 신라의 사신, 구법승, 유학생 등이 묵었던 숙소(여관), 신라원은 신라인의 사원이다.



☞답➃
식읍과 녹읍에서는 조세와 공물, 노동력 징발이 가능하였다.

문 12. 조선후기 상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보부상은 농촌의 장시를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계시켰다.
② 동래의 내상은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였다.
③ 의주의 만상은 대중국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④ 개성의 송상은 인삼을 재배․판매하고 대외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정답 : ②

해설 :
동래의 내상은 대일무역을 한 사상들이며,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한 것은 경강상인이었다. 경강상인은 유통업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이의 기반인 선박의 안정적 확보와 유지는 필수적이었다.

즉, 경강상인은 활동의 근거가 선박을 이용한 운수업에 있었으므로 선박의 확보와 제조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들이 선박을 보유하는 방법에는 구입하는 경우와 직접 건조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필요한 선박까지도 경강인들이 건조해 조달했던 점을 본다면, 그들에 의한 조선 사업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경강상인들이 그들의 발달된 조선술과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답 ➁
➁ 한강 유역의 경강상인에 대한 설명이다.

문 13.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의 요구사항으로 관계가 먼 것은?
① 과거제를 폐지하고 지벌을 타파할 것
②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를 엄징할 것
③ 신분제를 폐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④ 무명잡세를 거두지 말고 기왕의 공사채를 무효화 할 것


정답 : ①

해설 :
과거제를 폐지하고 지벌을 타파에 관한 내용은 동학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 12개조”에는 들어 있지 않다. 이 내용은 오히려 1894년의 갑오개혁의 내용과 관련성이 있다.

②, ③, ④의 내용은 1894년 동학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이다.



☞답 ➀
과거제 폐지는 갑오개혁 때의 일이다.

문 14. 다음의 발언을 한 (가), (나) 정치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 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나)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로 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 하지 아니하겠다.
① (가)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② (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대표로 활약하였다.
③ (가), (나)는 신탁 통치 실시를 반대하였다.
④ (가), (나)는 좌우 합작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정답 : ③

해설 :
사료의 (가)는 1946년 6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며, (나)는 1948년 2월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다.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인 이승만과 김구는 모두 우익세력으로서 신탁통치 실시를 반대하였다.

① 신한청년당의 대표는 여운형이다.
② 독립총성중앙협의회의 대표는 이승만이며, ④ 좌우 합작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사는 여운형과 김규식이다.



☞답 ➂
(가) 이승만의 정읍발언 (나)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➀ 김규식, ➁ 이승만, ➃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은 좌우합작운동에 소극적이었다.

문 15. 역사서의 편찬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삼국사기」는 고려 초에 쓰여진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② 한 왕대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실록의 편찬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어 「태조실록」에서 철종실록까지 계속되었다.

③ 「고려사」는 「고려국사」를 계승하여 고려시대의 역사를 재정리한 기전체 역사서이다.

④ 안정복은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체계화하였다.


정답 : ②

해설 :
실록의 편찬은 고려시대 초기부터 편찬되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종 때 황주량의 ‘7대 실록’으로 간행되기도 하였으나 역시 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조선시대부터 실록이 시작되었다는 표현은 틀린 내용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철종실록]까지로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존재하지만 일제 사학자들이 첨삭하였으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① 삼국의 역사는 이미 고려 초기에 기전체 사서인 [구삼국사(舊三國史)]를 통해 일단 정리되었는데, [삼국사기]의 편찬에는 이 기록이 중요한 참고자료로 쓰였다. [구삼국사]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할 국내 자료와 중국 사서를 다 수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삼국사]의 편찬자가 미처 이용하지 못한 국내 고기류(古記類) 문헌을 참작하고 송나라에서 가져온 [신당서], [자치통감]같은 사서도 참고하였다.

③ 「고려사」는 「고려국사」에서 국왕보다 재상의 역할을 조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려국사」를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139권의 기전체로 엮은 사서이다. 「고려사」는 「고려국사」와 상호 별개의 책이 아니고 그 시작이 「고려국사」에서 있으므로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④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삼한정통론과 민족독자성에 입각하여 엮은 조선 후기 대표적 통사로서 단국조선~고려 말까지의 한국사의 독자적 체계를 세웠다.



☞답➁
➁ 고려 현종때 7대실록을 편찬하였다. 다만 현존하지 않는다.

문 16. 다음 제시문의 ㉠, ㉡, ㉢에 들어갈 내용이 바르게 연결된 것은?
(가) (㉠)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로 쳐들어와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 연해의 주군을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이 나서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왜선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나) (㉢)이(가) 이끄는 토벌군이 남원에 도착하니 왜구는 인월역에 있다고 하였다. 운봉을 넘어온 (㉢)은(는) 적장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아지바투를 사살하는 등 선두에 나서 전투를 독려하여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섬멸했다.
     ㉠     ㉡      ㉢
① 창왕  진포   최영
② 우왕  당포   최영
③ 창왕  당포  이성계
④ 우왕  진포  이성계


정답 : ④

해설 :
기본적으로 고려말 왜구의 출몰이 가장 극심한 때는 우왕 때이며 진포싸움이 왜구 격퇴의 전기가 되었다. (가)는 우왕 때 진포대첩(1380)으로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포를 사용하여 승리한 싸움이다. (나)는 이성계가 아지바투를 사살한 황산싸움(1380)에 대한 내용이다.



☞답➃
(가)는 우왕때 최무선의 진포대첩을, (나)는 이성계의 황산(운봉)대첩에 대한 설명이다.

문 17. 다음 서적들의 편찬 시기가 바르게 나열된 것은?
ㄱ. 동국이상국집
ㄴ. 불씨잡변
ㄷ. 임원경제지
ㄹ. 해동제국기
① ㄱ-ㄴ-ㄷ-ㄹ
② ㄱ-ㄴ-ㄹ-ㄷ
③ ㄴ-ㄱ-ㄷ-ㄹ
④ ㄴ-ㄱ-ㄹ-ㄷ


정답 : ②

해설 :
ㄱ. 동국이상국집(무신집권기, 이규보 - 279면) - ㄴ. 불씨잡변(1395년, 정도전 - 300면) - ㄹ. 해동제국기(성종2년 1471, 신숙주 - 392면) -  ㄷ. 임원경제지(순조, 서유구 - 376면)



☞답 ➁
ㄱ. 동국이상국집(고려 후기) - ㄴ. 불씨잡변(조선 태조) - ㄹ. 해동제국기(조선 성종) - ㄷ. 임원경제지(조선후기)

문 18. 다음 자료에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예전에는 군포가 2필이었던 것이 지금은 1필로 되었으니 백성들이 더욱 넉넉해져야 마땅한데 더욱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군적에 누락된 장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조실록-
① 재정 확보를 위해 공명첩을 발매해야 한다.
② 도망한 사노비를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③ 서얼출신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제한을 없애야 한다.
④ 양인과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양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정답 : ④

해설 :
사료에서 ‘군적에 누락된 장정’이라는 부분을 통해 누락된 장정을 찾아내거나 양인의 확보책으로 가장 적합한 것을 보기에서 찾으면 되겠다. 그러므로 ④와 같은 정책을 위해서 일천즉천을 폐지하면 그대로 양인의 확대를 가져온다.

① 공명첩, 납속책은 임진왜란 후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발급하였다. 이것은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제도였기 때문에 오히려 양인확보에는 불리한 시책이 된다. 양반은 군적에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② 도망한 사노비는 대부분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양인으로 살아가려 할 것이므로 양인 신분이 된다는 것은 양역 확대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원 주인에게 그 사노비를 돌려주면 양인 확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 정조 때에는 도방 노비를 국가에서 찾아주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하였다.

③ 조선시대 서얼들도 중인 정도의 신분이지만 양인으로서 군역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는데 서얼이 관직 진출에 제한이 없어지면 대거 양반이 되고 그만큼 군역 대상자가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①, ②, ③은 모두 군역을 질 수 있는 양인의 확보책에는 역행하게 된다.



☞답 ➃
조선 후기 양반수가 증가돠고 양인수가 감소하면서 양인의 경제적 부담이 증가되자, 양인수를 확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여야 했다.
➃ 노비 종모법은 양인수를 확보하려는 정책이다.

문 19. 다음 조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이 아닌 것은?
○ 일본국 정부는 동경의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할 것이요,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서의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을 서로 약속함.
① 포츠머스 조약
② 시모노세키 조약
③ 제2차 영일 동맹
④ 가쓰라․태프트 밀약


정답 : ②

해설 :
사료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다.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위하여 먼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1905년 7월)하여 상호 이권을 보장받고,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을 체결하여 마찬가지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한 뒤, 러일전쟁을 통하여 러시아를 배제(포츠머스 조약, 1905년 1905년 9월)하고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1905년 11월)하였다.

이는 모두 1905년 한 해에 있었던 일로 을사늑약 체결을 위한 전제 작업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또는 하관조약)은 1895년 1월로 을사늑약과는 10여 년간의 시간적 격차를 가지고 있고 그 내용도 청‧일전쟁 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배상문제와 요동반도 할양 문제와 관련이 있으므로 을사늑약과 직접적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답 ➁
지문은 을사늑약(1905)에 대한 내용이다.
②시모노세키 조약은 청일전쟁 결과 청일간에 맺은 조약이다.

문 20. 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업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제17조 임시토지조사국은 토지대장 및 지도를 작성하고 토지의 조사 및 측량에 대해 사정(査定)으로 확정한 사항 또는 재결을 거친 사항을 이에 등록한다.
① 명의상의 주인을 내세우기 어려운 동중․문중 토지의 상당부분이 국유지에 편입되었다.
② 지주계층의 사전 강매에 따른 혼란과 유상분배에 따른 빈농의 어려움이 나타났다.
③ 신고주의 원칙에 상관없이 조선인 지주와 수조권자의 경우 소유권 취득에 실패했다.
④ 대한제국기에 시행된 토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농민의 토지에 대한 여러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였다.


정답 : ①

해설 :
사료는 1912년 시행된 ‘토지조사령’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내용이다. 토지조사사업은 토지 소유권에 대한 조사였고 소유자가 불분명하거나 소유자를 내세우기 곤란한 동중이나 문중의 땅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② 토지조사사업은 토지분배가 아닌 토지 소유권의 확인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므로 지주층은 대부분 자신의 소유지로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보기의 내용은 이승만 정부 때의 농지개혁법에 따른 유상몰수‧유상분배 내용과 가깝다.

③ 토지조사사업의 기본원칙은 토지소유권을 조선총독 또는 그 권한을 위촉받은 자가 확정하고, 소유권의 주장은 신고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불복자에 대해서는 증거주의를 채택하였다. 조선인 지주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대해 신고를 통하여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으나 자작농의 경우 민족감정과 복잡한 신고절차 때문에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④ 이미 대한제국기에 시행된 양전 지계사업 이후에도 농민에 대한 경작권, 입회권, 개간권, 도지권 등은 부정되지 않았는데(특히 양전 지계사업에서는 경작권에 대한 보호 의지를 강하게 들어내고 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경우에는 이러한 농민의 권리들이 모두 부정되었고 고율의 소작제도(풍흉을 불문하고 동액을 징수하는 정조법, 수확고를 예상하고 징수하는 집조법, 수확량의 반액을 징수하는 타조법) 등은 그대로 묵인하였다.



☞답 ➀
 지문은 토지조사사업(1912~1918)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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