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4일에 시행한 지방직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입니다.


1. 발해의 대외관계에 대한 옳은 설명으로만 묶인 것은?
㉠ 발해는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정혜공주의 묘는 전형적인 당나라 양식의 벽돌무덤이다.
㉡ 발해는 북으로 돌궐과 통하였고, 일본과 친선관계를 맺고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 발해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빈공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발해는 신라와 연합하여 당나라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① ㉠, ㉡
② ㉠, ㉣
③ ㉡, ㉢
④ ㉢, ㉣


정답: ③

해설:
㉠ 발해는 문화의 담당자로서 고구려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선진문화로서는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고구려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대표적 유물로는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묘의 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이 있으며 당의 문화를 수용하였다는 대표적 유물로는 문왕의 막내 딸 정효공주묘의 양식인 벽돌무덤이 있다.
㉣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였으나 발해 무왕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발해 역사에서의 빈출은 당 문화인가 고구려 문화인가의 문제이고 이를 대표하는 유적이 정효공주묘와 정혜공주묘인 것이다. 역시 ㉠번 보기에서 제일 많이 사실관계를 뒤바꾸어 출제함으로 주의해서 살펴보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발해와 신라는 소위 “남북국”이라고 한다. 지금의 남북한 관계와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발해와 신라가 연합관계라기 보다는 대립관계임을 떠올린다면 가장 중요하고 흔한 발해 출제 부분에서 그대로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다음은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책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의 편찬과 가장 근접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은?
이 책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로서 왕명을 받아 편찬되었다. 이 책은 본기 28권, 지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요나라의 성종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② 묘청 등이 칭제건원과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였다.
③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④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


정답: ②

해설:
상자 안에서 언급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김부식(1075-1151)은 고려 중기 인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였다. 고려 중기에는 전기의 의연하고 자주적이었던 기상이 사라지고 보수화와 사대주의화를 특징으로 한다. 즉 여진족인 금의 압력에 굴복하여 사대외교를 맺었으며 이에 저항한 묘청의 난을 김부식이 진압하기도 하였다. ① 요나라는 1차 성종(993) 때, 2차 현종(1010), 3차 현종(1018) 때 침입하였다. ② 묘청 등의 서경파 세력은 천도운동이 실패하자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1936년 진압되었다. ③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것은 대몽 항전을 위하여 최우 집권 시기였던 고종 때(1232)이다. ④ 고려 공민왕 때(1356년) 유인우는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이를 탈환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고려의 대외항쟁 문제와 시대구분의 결합 문제이다. 고려는 11C 거란(요)이, 12C 금이, 13C 몽고가, 14C 원을 극복하며 왜구, 홍건적과의 항쟁기로 구분해 볼 수 있으며 이 중에서 김부식은 고려 중기의 보수화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출제에서는 다루어지기 때문에 정답은 의외로 쉽게 나타난다.


3. 192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고등교육기관으로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취지하에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추진하였다.
②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③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조선공산당도 조직되었다.
④ 조선학 운동이 전개되었고, 한국 학자들이 결집하여 진단학회를 창립하였다.


정답: ④

해설: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이하여 우리 민족주의 학자들이 모여 조선학 운동을 일으켰다. 1930년대 초반 신간회가 해소되고 일제 당국의 탄압이 한층 심화된 상황에서 일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적 고유성을 유지함으로써 일제의 동화정책에 저항하려는 소극적 민족운동가의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이것이 조선학 운동인 것이다. 친일적 청구학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진단학회가 1934년 조직되었으며 실증사관을 표방하였다.

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이상재 등이 조직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 의해 1922년부터 시작되었다.

② 조만식 등 민족주의 우파는 평양에서 1922년부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③ 3・1 운동 이후 국내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었으며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일제 강점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시대별 구분 문제이다. 조선학 운동 또는 진단학회 설립의 연도를 기억해 두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또는 1920년대의 민족주의 경제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제외한 보기 ④를 고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4. 조선 전기(15~16세기)의 향촌사회 조직과 운영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사창제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자치적 구휼제도였다.
②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다.
③ 선현의 제사와 교육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서원은 향촌 사림을 결집시키는 기능도 하였다.
④ 총액제에 의한 지방 재정의 운영으로 향촌에서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정답: ④

해설:
조세의 총액이란 뜻의 총액제(세총)는 조선 후기의 부세 수취체제로서 각 면과 리 단위로 세금의 총액을 미리 정해 놓고 수세자들인 수령과 향리로 하여금 그 액수를 채우도록 만든 제도로서 삼정 문란의 원인이 되었다. 총액제는 전세에 있어서의 비총제, 군포에 있어서의 군총제, 환곡에 있어서의 환총제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조선 후기 새로 양반에 편입되고 있었던 신향들은 기존 향촌 사림들이었던 구향들과 향전을 통해 승리하였고 수령과 향리에 아부하면서 향임직을 받아 총액제에 의한 과도한 세금을 면제받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향촌 사림은 조선 중기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그 지위가 약화되었다.

총액제가 조선 후기의 부세제도의 대표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사림의 지위 강화는 조선 중기의 사실이고 조선후기는 다시 약화된다는 것은 조선시대 향촌사회를 공부하는 수험생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5. 다음 자료는 고려시대 관제의 한 부분을 설명한 것이다. 밑줄 친 ㉠~㉣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처음에는 ㉠도병마사라 불리었다. 문종이 관제를 정할 때에 ㉡문하시중, 평장사 등을 판사(判事)로 삼고 ㉢추밀 및 직사 3품 이상을 사(使)로 삼았다. …… 충렬왕 5년에 도병마사를 고쳐 ㉣도평의사사로 하였다. 큰 일이 있으면 사(使) 이상이 모여 의논하였으므로 합좌(合坐)의 명칭이 생겼다.
①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합좌 회의 기구였다.
② ㉡-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다.
③ ㉢-관리의 임명 등에 동의하는 서경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④ ㉣-국가의 제반 정무를 관장하는 최고 정무기구였다.


정답: ③

해설:
추밀원[樞密院]은 중추원의 후신으로서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및 군기(軍機)를 맡아본 국왕의 비서기구였다. 추밀은 추밀원에 소속된 2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주로 군국 기무를 담당하였다. 관리의 임명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행사했던 관원은 어사대와 중서문하성의 낭사였다. 중추원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이 출제되는 부분은 중앙행정관청의 기능 설명이다.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에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양대 산맥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추밀원)의 기능을 파악하고 이 양 관청의 고관들의 합좌기관인 도병마사까지 공부하는 것은 필수이다. 따라서 과연 중서문하성 쪽 설명인지 아니면 중추원 쪽인지 빨리 구별해 주는 것이 답을 찾는 관건이 아닌가 싶다.


6. 다음의 단체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국내에서 8․15 해방 직후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건국 작업에 들어갔다.
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② 좌파와 우파 인사들로 조직되었으나, 좌파의 득세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탈퇴하였다.
③ 국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④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조선건국동맹이 모태가 되었다.


정답: ①

해설:
상자 안에서 제시한 단체는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이 중도파 민족주의자 안재홍과 함께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1945.8.15)에 대한 설명이다. 건준은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에 따라 좌익이 중심이 되어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등 국내외 좌우익 정치세력을 총망라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조직을 선포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은 1948년 9월 9일 북한이 처음 채택한 국호였다. 이름이 비슷하므로 주의하여야 할 문제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출제는 원래 7급 범위로서 최근 2-3년 동안 9급에서 간헐적으로 출제되고 있다.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문제이다. 더군다나 처음에 ①, ②, ③, ④ 읽으면서 쉽게 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꼼꼼히 보기를 읽어 나가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지 아니면 조선인민공화국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었던 것이다. 미소 짓게 하는 문제출제가 아닌가 싶다.


7. 선사시대 유적지와 그 곳에서 발굴된 유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모두 고르면?
㉠ 부산 동삼동 유적, 제주도 한경 고산리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 - 청동기 시대의 덧무늬 토기 출토
㉡ 상원 검은모루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공주 석장리 유적 - 구석기 유물 출토
㉢ 서울 암사동 유적, 봉산 지탑리 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출토
① ㉠, ㉡
② ㉠, ㉢
③ ㉡, ㉢
④ ㉠, ㉡, ㉢


정답: ③

해설:
구석기 시대 유적지는 단양 금굴유적, 상원 검은모루 동굴, 공주 석장리, 경기 연천 전곡리, 제천 점말 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 유적지로는 서울 암사동, 황해도 봉산 지탑리, 김해 수가리, 부산 동삼동, 제주도 한경 고산리, 양양 오산리 등이 있다. 청동기 시대는 벼농사 시작의 증거로서 충남 부여 송국리, 경기도 여주 흔암리 등이 있다.

부산 동삼동은 신석기 전기의 토기 출토로 유명한 곳이다. 제주 고산리 유적도 최근 발견으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이 앞당겨지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유적지이다. 결정적으로 덧무늬토기는 융기문(隆起文)토기라고도 하는데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유적지를 설사 모르더라도 덧무늬토기는 기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라는 사실만으로도 정답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8.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사상과 가장 관련이 깊은 것은?
그는 전 국토의 자연 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는 인문 지리적 지식에다 경주 중앙 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지방 호족들의 대두, 오랜 전란에 지쳐서 통일의 안정된 사회를 염원하는 일반 백성들의 인식을 종합해서 체계적인 ( )을(를) 만들었다.
① 수선사 결사 운동
② 만적의 봉기
③ 정조의 화성 건설
④ 조선의 한양 천도


정답: ④

해설:
상자 안은 풍수지리사상에 관한 설명이고 여기서 그는 도선을 말한다. 신라 말기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은 중국에서 유행한 풍수지리설을 들여왔으며 이는 산세와 수세를 살펴 도읍,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인문지리적 학설을 말한다. 즉 풍수지리적으로 한양명당설은 조선의 한양 천도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미래를 예측하는 도참사상과 결합되어 지리도참설로도 유행하였다.

① 수선사 결사 운동은 무신집권기 지눌에 의한 불교 선종계통의 개혁운동이었다.

② 만적의 난은 무신 최충헌 집권기에 개경에서 발생한 신분 해방 운동이었다.

③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한양을 탈피하여 굳이 화성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려고 한 것은 풍수지리적인 것보다는 실학사상에 영향 받은 바 크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실학자 정약용의 주도하에 거중기 이용 등 서양식 축성법의 사용으로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상자 안에서 이미 국토, 지리 등 풍수지리사상에 대한 설명임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보기 ③과 ④만이 지리적인 정보를 보여줌으로 둘 중 하나가 정답이다. 어느 것을 답으로 하겠는가? 보기 ④는 혼란스럽게 하려고 제시한 보기에 불과하다. 풍수지리사상은 신라 하대에서 고려로 이어지면서 도읍 선정에 영향을 크게 미쳤고 또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영향을 크게 미쳤기 때문에 한양 천도로 정답을 찾아야만 한다.

9. 갑신정변 이후 동학농민봉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조선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청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조선은 외교, 내정에 있어서 청의 간섭을 받았다.
②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
③ 국내 식량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곡물 수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④ 일본과의 무역은 청과의 무역보다 그 성장세가 더 높았다.


정답: ④

해설:
1882년 임오군란의 결과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청 상인의 특권이 인정되어 일본의 독점적인 조선 상권 독점에 제동을 걸었고 비록 전체적인 수출입에 있어서의 무역 비중은 일본이 높았으나 그 성장세는 청이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즉 1885년 청에서의 수입이 19%에서 1892년 45%로 증가한 데 비하여 일본은 그 만큼 감소하였다. 또한 1885년 청에 대한 수출이 3%에서 1892년 6%로 증가한데 비하여 일본은 그만큼 감소하였다.

갑신정변은 1884년의 일이며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두 사건 사이의 일이 아닌 것을 고르거나 설명이 틀린 것을 찾아내는 문제이다. ① 갑신정변 직후 초래했던 청의 내정간섭(1884) ② 거문도 사건(1885) ③ 방곡령(1889)만 정확히 연도 구별해 준다면 정답은 쉽게 발견된다.


10. 조선 숙종대의 정국에 대한 옳은 설명으로만 묶인 것은?
㉠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이 대두하였다.
㉡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왕은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눌렀다.
㉢ 서인은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갈라졌다.
㉣ 이조전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관행을 없앴다.
① ㉠, ㉡
② ㉠, ㉢
③ ㉡, ㉢
④ ㉡, ㉣


정답: ②

해설:
숙종 때부터 자율적 붕당정치의 원리가 붕괴되고 정치세력(당파)의 급격한 변동을 가져왔던 환국정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붕당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정치적 균형관계의 재정립을 꾀하는 탕평론이 대두되었다.

㉡ 숙종은 왕은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 이조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영조 대에 이르러 약화되었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었다.

붕당과 당쟁에 관한 문제이다. 숙종 때에 경신환국을 기점으로 자율적 붕당정치에서 타율적 붕당정치로 바뀌게 되고 붕당정치의 원리가 붕괴되어 당쟁의 소용돌이 빠지게 되는 때가 바로 숙종 때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남인 장희빈의 득세와 몰락이 이때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은 확실히 틀린 답으로 찾았어야 했다.


11. 고려시대에 국가불교가 발전한 사실과 관련된 내용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르면?
㉠ 승과를 실시하여 합격한 승려들에게 법계를 부여하였다.
㉡ 팔관회와 연등회가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왕이 보살계를 받는 보살계도량이 별도로 열렸다.
㉢ 승정을 담당한 승록사라는 기구가 있었으며 승군이 조직되어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 현존하는 팔만대장경은 대부분 해인사에서 제작되었다.
① ㉠
② ㉠, ㉡
③ ㉠, ㉡, ㉢
④ ㉠, ㉡, ㉢, ㉣


정답: ③

해설:
㉠ 광종 때 시행한 과거 제도의 틀 안에는 승과가 있었으며 승려들에게 법계를 부여한 승계제도가 있었다.

㉡ 태조는 훈요10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에 대한 장려를 당부하였고 현종 때에도 이들 행사의 부활과 불교의 장려가 있었다. 심지어 왕이 보살계를 받는 보살계도량이 별도로 열렸다.

㉢ 승록사는 고려 태조의 숭불정책에 따라 설치된 기관이었다. 승군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났으며 여진족의 침범에 대비했던 고려 때의 항마군도 유명하다.

㉣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은 최우가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분사는 진주에서 판각) 1236년부터 1251년까지 대부분 완성하였으며 조선 초기에 합천의 해인사로 이전하여 보관하였다.

해인사는 제작한 사원이 아니라 보관한 사원이었다는 점이다. 사학계의 새로운 도전이라면 팔만대장경의 제작 사원이 강화도 선원사가 아니라 합천의 해인사라는 소수설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뉴스보도나 주장에 학계의 다수설을 반대로 해석하면 안 될 것이다.


12. 조선 후기(17~19세기)의 상공업 발달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인구의 자연 증가와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진전이 보다 촉진되었다.
② 물산이 모이는 포구에서의 상거래는 장시에서의 상거래보다 규모가 컸다.
③ 선대제가 성행하면서 상인들이 수공업자들에게 예속되었다.
④ 의주의 중강과 봉황의 책문 등 국경을 중심으로 관무역과 사무역이 이루어졌다.


정답: ③

해설:
선대제 수공업이란 민영 수공업자들이 아직도 독자적인 생산을 하지 못하고 상인들로부터 주문과 함께 원료와 자금을 선대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수공업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선대제 수공업은 대동법 실시 이후 등장한 공인에 의해 발전할 수 있었다. 보기 ③은 상인과 수공업자를 반대로 서술하여 틀렸다.

조선 후기의 상공업은 항상 선대제 수공업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의 핵심부분을 다룬 매우 간단한 문제이다. 역시 선대제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상인이 먼저 대금을 주었느냐(선대) 아니면 수공업자가 먼저 대금을 주었느냐(선대)를 생각해 보면 된다. 후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수공업자는 돈을 받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을 준 상인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다. 매우 명료한 문제이다.


13. 신라의 주요 지식인의 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으로만 묶인 것은?
㉠ 원광 - 세속오계를 짓고,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를 작성하였다.
㉡ 강수 - 외교문서 작성에 큰 공을 세웠으며, 왕에게 풍간의 뜻을 담은 화왕계를 지어 바쳤다.
㉢ 원효 -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와 같은 걸출한 저술을 남겼으며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 최치원 - 신라 하대 도당유학생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계원필경, 제왕연대력과 같은 저술을 남겼다.
① ㉠, ㉡
② ㉠, ㉣
③ ㉡, ㉢
④ ㉢, ㉣


정답: ②

해설:
㉡ 강수가 외교 문서 작성에 큰 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에게 바친 것은 설총이었다.

㉢ 원효가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와 같은 걸출한 저술을 남긴 것은 사실이었으나 황룡사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한 것은 선덕여왕 때 자장에 의한 것이었다.

고승들과 지식인들의 업적이나 작품과의 연관성을 묻는 문제이다. 화왕계를 지은 사람이 통일 신라기의 원효의 아들 설총이라는 점과 황룡사 9층탑은 통일전의 건축물이었다는 사실만 알아도 정답은 쉽게 파악된다.


14. 다음의 글이 보여주는 시기에 일어난 경제적 상황과 가장 관계가 없는 것은?
배에 물건을 싣고 오가면서 장사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포, 영광의 법성포, 흥덕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 등은 비록 작은 강이나 모두 바닷물이 통하므로 장삿배가 모인다.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는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바닷가 사람과 내륙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서로의 물건을 교역한다.
① 전국적으로 장시는 1천여 개소였고, 보통 5일마다 열렸다.
②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도고 상업이 위축되었다.
③ 경강상인의 활동으로 한강 유역에는 나루터가 많이 늘어났다.
④ 덕대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대규모 광산을 개발하였다.


정답: ②

해설:
상자 안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언급된 포구 상업에 관한 설명이다. 조선 후기 상업 중심지로 새롭게 성장한 곳이 포구였으며 포구에서의 상거래는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포구는 원래 운송기지였으나 18세기 이후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조선 후기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은 폐지되었고(신해통공, 1791년) 이에 따라 성장한 사상들이 도고로 성장하였다. 보기 ②는 반대로 서술되었다.

상자 안은 비록 포구 상업에 관한 설명이지만 이와 직접 관련된 사실을 묻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일로서 맞는 내용이냐를 언급한 것이다. 조선 후기는 조선 전기 보다 모든 산업 분야에서 발달상을 보이고 있으며 ① 장시의 발달 ③ 사상인 경강상인의 활동 ④ 광산에 있어서의 덕대제 등은 일반적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다. 조선후기에 오히려 상업 활동이 위축되었다고 서술한 보기 ②번이 정답으로 선택될 수밖에 없다.


15. 조선시대의 학과 및 학설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주로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고,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②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③ 18세기 호락논쟁은 노론과 소론간의 학문적 논쟁이었다.
④ 주로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로 구성된 북인은 서인보다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구애를 덜 받았다.


정답: ③

해설:
호락논쟁은 18C 중엽 송시열의 제자들인 벌인 사상논쟁으로서 노론 내부에 주기설과 주기설의 분파가 생긴 것이다. 호론은 충청도 노론으로서 인물성이론을 강조하였고 낙론은 서울 노론으로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다.

당쟁 부분을 처음 공부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분당을 파악할 때 서인과 동인은 이조전랑 문제로, 북인과 남인은 정여립 모반사건과 정철건저 상소 문제로, 노론과 소론은 경신환국으로 분열된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16. 다음 글을 쓴 역사가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대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많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① 우리의 민족정신을 ‘혼’으로 파악하고 ‘혼’이 담겨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②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③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④ 「진단학보」를 발간하고 문헌고증을 중시하는 순수 학문적 차원의 역사 연구에 힘썼다.


정답: ②

해설:
상자 안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내용의 일부이다. 신채호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고대사 연구에 치중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①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에 대한 설명,
③ 백남운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회경제사학에 대한 설명,
④ 실증주의 사관에 대한 설명이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을 언급한 우리 민족주의 사학자가 신채호인가만 파악하면 정답은 쉽게 나온다. 민족주의 사학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7.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관한 옳은 설명으로만 묶인 것은?
㉠ 김구, 김규식이 제안했으며, 김일성, 김두봉이 이에 응함으로써 성사되었다.
㉡ 남북연석회의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 이승만은 향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막판에 참석했다.
㉣ 미국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대신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생각하고 적극 지원했다.
㉤ 이 회의에서 미, 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다.
① ㉠, ㉡, ㉤
② ㉠, ㉣, ㉤
③ ㉡, ㉢, ㉣
④ ㉡, ㉢, ㉤


정답: ①

해설:
1948년 1월 8일,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고 이승만, 김성수 등은 열렬히 환영했으나 이들은 북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북쪽에서 이들의 앞길에 차단봉을 내렸기 때문이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한국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만 선거를 치를 것을 결정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만 것이다. 유엔 소총회의 결정이 있기 전,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두 사람 명의로 북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바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후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한민족의 통일을 호소하였고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서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 요구 결의문이 채택되었으며 ‘남북 정치지도자간의 요인회담’에서 4김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있는 가운데 조만식의 월남문제가 다루어졌었다.

 ㉢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더 이상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와 타협에 한계를 느끼고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으며 유엔총회에 이어 유엔소총회가 개최되어 분단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18. 다음 금석문 중 신라 진흥왕대의 정복사업을 살피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만 묶인 것은?
㉠ 임신서기석
㉡ 남산 신성비
㉢ 단양 적성비
㉣ 북한산 순수비
① ㉠, ㉣
② ㉡, ㉢
③ ㉡, ㉣
④ ㉢, ㉣


정답: ④

해설:
신라 진흥왕대의 정복사업으로 단양군 적성면까지 진출하여 한강 상류를 확보한 단양 적성비와 네 개의 순수비(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유명하다.

㉠ 임신서기석은 612년 진평왕대로 추정되며 화랑도 연구에 도움이 된다.

㉡ 남산 신성비는 591년 진평왕대로 추정되며 역제 연구와 지방통치 연구에 도움이 된다.

정복사업은 보통 척경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비석의 이름에 지명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양군 적성면, 북한산이라는 지명은 이곳까지 정복사업을 통해 영토를 넓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19. 조선시대 의궤에 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현재 남아있는 의궤는 모두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②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책이다.
③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들은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하였다.
④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의 성곽을 축조한 공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정답: ①

해설:
의궤란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책을 말한다(②). 의궤는 조선 태조 때부터 만들어졌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에 관련된 많은 기록이 전하나 현재 조선 초기 의궤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의궤는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 기록을 남기기 위해 편찬된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최근 조선왕조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국사도 모두, 전부, 꼭 등의 극단적 부사어를 잘 쓰지 않는다. 즉 이런 표현들은 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 다음은 지방 토착 세력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서술이다. 시대순으로 바르게 나열된 것은?
㉠ 속현에 감무가 파견되기 시작함으로써 자치적인 지배력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반독립적인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사심관 제도, 기인 제도를 통하여 견제를 받기 시작하였다.
㉣ 군공 등으로 첨설직을 가지게 된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① ㉠-㉡-㉢-㉣
② ㉡-㉢-㉠-㉣
③ ㉡-㉢-㉣-㉠
④ ㉡-㉣-㉢-㉠


정답: ②

해설:
㉡ - 신라 하대 호족세력은 골품제에 반대하면서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 고려 초 태조 왕건은 지방 향리세력(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심관 제도와 기인 제도를 만들었다.

㉠ - 고려 중기 예종때 속군현과 향, 소, 부곡에 파견하였는데 속군현의 유망민을 안정시켜 조세와 역을 효과적으로 수취하면서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하여 실시한 것이었다.

㉣ - 고려 후기 공민왕 때 군공을 포상하기 위해 설치한 산직제도였다. 고려 후기에 몽고·홍건적·왜구 등의 침입이 계속되자 이에 대한 대비책, 유인책으로 첨설직을 신설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하층민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았다.

지방 토착 세력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은 신라 하대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호족세력에 대한 언급인 ㉡이 제일 먼저 나와야 한다. 따라서 ㉢-㉠-㉣은 모두 고려시대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의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는 수험생이라면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에서 언급되어야 한다. 고려시대 토착세력에 대한 견제를 넘어서 토착세력의 자치력에 영향을 주었다는 표현인 ㉠번이 국어적 표현상 세 번째로 언급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마지막에 등장하여야 한다. 이 출제는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이치상 하나하나 따져들면 공부량에 관계없이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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