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5일에 시행한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 한국사 기출문제 입니다.


1. 다음 자료와 관련된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 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 라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 정월에 지내는 제천 행사는 국중 대회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은 영고라 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
① 쑹화 강 유역의 평야 지대에서 성장하였다.
②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여러 가(加)들이 있었다.
③ 왕이 죽으면 노비 등을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④ 국력이 쇠퇴하여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완전 병합되었다.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사료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 관련 내용이다. 특히 제천 행사인 “영고”를 통해 부여임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쑹화 강 유역의 평야 지대에서 성장했으며,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 여러 가(加)들이 있었다. 한편 순장의 풍습이 있었으며, 고구려 문자왕 때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494)



정답 : ➃

제시된 자료는 부여와 관련한 사료이다.

➃ 부여는 광개토대왕이 아닌 문자왕 대(494) 완전히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①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에서 성장하였다.

➁ 부여는 연맹체 단계로 왕 아래에 마가․우가․저가․구가의 가축 이름을 딴 여러 가들이 독자적으로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었다.

➂ 부여에는 왕이 죽으면 껴묻거리와 함께 노비 등의 많은 사람들을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2. 삼국 간의 경쟁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신라 지역으로 쳐들어온 왜국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① ㈏ - ㈐ - ㈑ - ㈎
② ㈐ - ㈎ - ㈑ - ㈏
③ ㈐ - ㈑ - ㈎ - ㈏
④ ㈑ - ㈐ - ㈏ - ㈎


정답: ③

해설:
제시된 사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격파(400)

- ㈑: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이후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였다.(475)

- ㈎: 백제 성왕은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554)

- ㈏: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켰다.(642)




정답 : ➂

(다) 399년에 신라에 출몰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고구려는 5만 여명의 군대를 신라로 파견하여 400년에 왜구를 격퇴하였다.

(라)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인하여 백제 위례성(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였다.(475)

(가) 백제 성왕은 신라와 연합을 통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확보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다시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기자 이에 반발하여 554년에 신라와 관산성 전투를 벌였으나 이 과정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하였다.

(나) 642년에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으로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공취하였다.



3. 삼국시대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부여 능산리에서 발견된 백제대향로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이 조각되어 있어 백제인의 신선사상을 엿볼 수 있다.

② 삼국 불교의 윤회설은 왕이나 귀족, 노비는 전생의 업보에 의해 타고났다고 보기 때문에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는 관념을 제공하였다.

③ 신라 후기 민간사회에서는 주문으로 질병 치료나 자식 출산 등을 기원하는 현실구복적 밀교가 유행하였다.

④ 고구려의 겸익은 인도에서 율장을 가지고 돌아온 계율종의 대표적 승려로서 일본 계율종의 성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답: ④

해설:
오답확인 - ④:  백제의 겸익은 529년(성왕 4)에 인도에 다녀와서 (계)율종을 개창하였다



정답 : ➃

➃ 고구려가 아닌 백제의 겸익이 6세기 초 성왕 대에 인도에 가서 구법하고 율장을 가지고 돌아와 백제 신율을 성립시켰고 일본 계율종의 성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① 백제의 금동대향로는 능산리 절터 공방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정상부에 봉황이 있고 아래로 다섯 악사와 다섯 마리의 기러기, 인면조신상, 인면수신상 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 세계에 실재하는 동물 등을 새겨서 신선들이 사는 이상 세계를 표현하였다.

➁ 삼국 불교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업보를 받는다는 업설과 윤회설 및 연기설이 연결되어 왕, 귀족, 노비 등의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제시되어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➂ 밀교는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로서 7세기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밀교를 수용하였으며 신라 후기 민간사회에서는 현실 구복적 신앙과 연결되어 질병 치료나 자식 출산 등을 기원하는 현실구복적 밀교가 유행하였다.



4. 빈칸에 들어갈 왕의 재임 시기에 일어난 사실로 가장 옳은 것은?
발해와 당은 발해 건국 과정에서부터 대립적이었으며 발해의 고구려 영토 회복 정책으로 양국의 대립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통치관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당과 흑수말갈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발해의 [______]은 흑수말갈에 대한 정복을 추진하였다. 이 계획을 둘러싼 갈등이 비화되어 발해는 산둥 지방의 덩저우에 수군을 보내 공격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당은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남쪽의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를 제어하려고 하였다.
① 3성 6부를 비롯한 중앙 관서를 정비하였다.
② 융성한 발해는 해동성국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③ 왕을 황상(皇上) 이라고 칭하여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④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을 천명하였다.


정답: ④

해설:
흑수말갈 정벌을 추진하고, 장문휴의 산둥 반도 덩저우 공격은 발해 무왕 (대무예 2대 : 719-737) 때 일어난 사건이다.

④ - 무왕 때 일본과의 국교가 수립되었고, 이 시기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고구려 계승 의식이 표방되었다.

오답확인:
① - 문왕은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를 비롯한 중앙 관서를 정비하였다.

② - 9세기 선왕 이후 발해는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었다.

③ -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 공주 묘비에서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라는 문장이 발견된다. 따라서 문왕 때 황제 국을 표방했음을 알 수 있다.



정답 : ➃

발해 무왕 대 흑수말갈을 복속하는 과정에 당과 항쟁한 사실과 관련한 내용이다.

➃ 발해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고 부여의 습속을 이었다’라고 하여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나타냈다.

①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과 6부의 중왕 관서를 정비한 왕은 문왕이다.

➁ 9세기 선왕 대 요동과 만주를 비롯한 연해주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➂ 왕을 ‘황상’이라고 칭하며 황제국을 표방한 것은 문왕 대이다.



5. 고려시대의 대장경을 설명한 것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대장경이란 경(經) ․ 율(律) ․ 논(論) 삼장으로 구성된 불교경전을 말한다.
② 초조대장경의 제작은 거란의 침입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③ 의천은 송과 금의 대장경 주석서를 모아 속장경을 편찬하였다.
④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정답: ③

해설:
오답확인 ③ - 의천은 송과 요(거란족)의 대장경 주석서를 모아 속장경(교장)을 편찬하였다.



정답 : ➂

➂ 의천은 고려의 대장경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하여 송과 요에서 들여온 대장경 주석서를 바탕으로 속장경을 편찬하였다. 의천이 속장경을 간행한 시기는 선종부터 숙종 대까지로 1102년에 완성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금나라가 건국되지 않았다.

①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 등 삼장의 불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이다.

➁ 초조대장경은 부처의 힘을 빌려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한 목적에서 거란 2차 침입 이후에 제작되었다.

➃ 몽골의 2차 침입 때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렸고 흥왕사와 함께 속장경마저 소실되었다.



6. 다음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 김보당의 난 발생
㈏ 이의민의 권력 장악
㈐ 김사미와 효심의 난 발생
㈑ 교정도감의 설치
① ㈎ - ㈏ - ㈐ - ㈑
② ㈎ - ㈏ - ㈑ - ㈐
③ ㈏ - ㈎ - ㈐ - ㈑
④ ㈏ - ㈎ - ㈑ - ㈐


정답: ①

해설:
제시된 사건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김보당의 난(1173)
- ㈏: 경대승의 사망 후 이의민의 권력 장악(1183)
- ㈐: 김사미와 효심의 난 발생(1193)
- ㈑: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최충헌은 최고 권력 기구인 교정도감을 설치하였다.



2. 정답 : ①

(가) 김보당의 난은 정중부 집권기인 1173년에 발생하였다.

(나) 이의민은 경대승 사후 1183년에 집권하였다.

(다) 이의민 집권기에 초전과 운문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신라 부흥 운동을 표방하며 난을 일으켰다.(1193)

(라) 최충헌 집권기에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가 최고 기구로 발전하였다.



7.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정치제도는 당과 송의 제도를 참고하여 2성 6부제로 정비하였다.
② 지방제도는 5도 양계 및 경기로 구성되었고 태조 때부터 12목을 설치하였다.
③ 관리 등용 제도로는 과거와 음서 등이 있었으며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④ 성종 대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건의하는 등 유교정치 이념의 토대를 닦았다.


정답: ②

해설:
오답확인 ② - 12목은 성종 때 처음 설치되었다.



정답 : ➁ ※ ①번도 복수

정답의 여지있음

➁ 고려의 지방 제도는 성종 대 12목이 설치되면서 처음 지방관이 파견되었고 이후 현종 대 전국을 5도 양계의 이원적 체계로 정비하고, 경기 지역을 성종 대에 이어서 경중 5부와 개성현과 장단현 등으로 구분하였다.

① 고려는 당의 3성 6부제를 참고하여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 6부제로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송의 제도를 참고하여 중추원과 삼사를 정비하였다.

➂ 고려의 관리 등용 제도는 문과, 잡과, 승과의 과거 시험과 함께 5품 이상 고위 관료 자제들에게 혜택이 부여된 음서 등이 있었다. 무과의 경우에는 예종 대와 무신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다가 공양왕 대 정비되었다.

➃ 성종 대에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김심언의 봉사 등을 토대로 유교적 이념에 따라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8. 충선왕 대의 개혁 정책으로 옳은 것은?
① 원나라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였다.
② 몽골풍의 의복과 변발을 폐지하였다.
③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주도하기 위한 기구로 사림원을 두었다.
④ 정치도감을 두어 부원 세력을 척결하였다.


정답: ③

해설:
충선왕 시기의 개혁 기구는 “사림원”이었다. 오답확인 ①, ② - 공민왕 시기의 반원 자주 정책에 해당한다. ④ - 정치도감은 충목왕 때 개혁 기구이다.



정답 : ➂

➂ 충선왕은 충렬왕 대의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개칭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등용하여 왕명 출납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① 공민왕 대 반원 개혁 정치를 실시하면서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➁ 공민왕 대에 반원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정책이다. 공민왕은 몽골 복장, 족두리, 연지․곤지 등의 몽골품을 폐지하였다.

➃ 충목왕 대 개혁 기구로 정치도감을 설치하였다.



9.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있었던 요동정벌 운동을 설명한 것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우왕 때 최영은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② 태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추진하였고 정도전과 남은은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③ 명은 정도전을 조선의 화근 이라며 명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④ 이방원은 태조의 요동정벌 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정답: ④

해설:
오답확인 ④ - 이방원은 태조의 요동정벌 운동을 반대하였고, 정도전과 대립하였다.



정답 : ➃

➃ 태조 대에 정도전을 중심으로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과 함께 내부적으로는 사병을 혁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추진하려 하자 이방원은 이에 반발하면서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1398)을 일으켰다.

① 우왕과 최영은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반발하여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통해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고 이후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고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➁ 태조 이성계는 표전문제 등으로 명과의 외교적 마찰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정도전과 함께 요동정벌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정도전과 남은은 군량미를 확보하고 정도전의 진법서에 따라 진법훈련을 전개하고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➂ 표전문은 중국에 대한 사대문서로, 당시 조선에서 명나라 주원장에 보낸 글귀가 예의에 어긋난다하여 표전문제가 발생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표전문을 찬술한 정도전을 ‘조선의 화근’이라고 하면서 명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고 조선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10. 다음 중 영조 대에 편찬된 서적은?
① '동국문헌비고'
② '동국지리지'
③ '동사강목'
④ '동의보감'


정답: ①

해설:
① - '동국문헌비고'는 영조 46년(1770) 홍봉한 등이 편찬한 한국학 백과사전이다.
오답확인

② '동국지리지'는 한백겸이 17세기 초 광해군 때 편찬한 역사지리서이다.

③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기까지를 다룬 역사서로서 정조 때 편찬되었다.(1778)

④ '동의보감'은 광해군 때 허준이 편찬한 의학 서적이다.




6. 정답 : ①

① 영조 대에 홍봉한 등이 왕명으로 우리나라 각 영역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다.

➁ 『동국지리지』는 한백겸이 광해군 7년(1615)에 저술한 것으로 고증적이고 실증적인 비판이 이루어진 역사 지리서의 효시이다.

➂ 『동사강목』은 성호 이익의 제자 안정복이 스승의 역사 인식을 계승하여 정조 2년(1778)에 저술한 역사서로 단군조선-기자조선-마한-삼국-고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우고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을 탈피하였다.

➃ 허준의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에 의해 편찬되기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완성된 의학서적이다.



11. 조선 전기 일본과 관계된 주요 사건이다. ㈎~㈑ 각 시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 : 부산포, 제포, 염포 등 3포를 개항하였다.
② ㈏ :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쓰시마 주의 제한적 무역을 허락하였다.
③ ㈐ : 왜선이 침입하여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④ ㈑ : 조선은 포로의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답: ①

해설:
① 1426년 부산포, 제포, 염포 등 삼포를 개항하였다. 따라서 (나) 시기에 해당한다.
지문확인

② -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쓰시마 주의 제한적 무역을 허락하였다.

③ - 을묘왜변은 1555년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과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되었다.

④ -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포로의 송환 교섭을 위해 사명당(유정)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정답 : ①

① 부산포, 제포, 염포의 삼포 개항은 1426년(세종 8)의 사실이다. 부산포(동래)·염포(울산)·제포(진해)가 개항되었으며, 조선의 통제 아래 세견선(歲遣船)이 조선과 일본을 왕래하였다.

② 계해약조의 체결은 1443년의 사실이다. 삼포 개항 후 지나치게 증가된 무역량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일본과의 무역량은 최대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歲遣船)은 50척으로 제한하였다.

③ 왜선 70여 척이 전라남도 연해안 사건을 습격한 을묘왜변은 1555년(명종 10년)의 사실이다.

④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은 막부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중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 사명대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한 후 조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한편 1609년에는 부산에 왜관을 다시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섭을 허용하는 기유약조를 체결하였다.



12. 다음 ㈎~㈐의 설명에 해당하는 인물을 바르게 연결한 것은?
㈎ 스승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갔다가 서양인 신부의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하는 󰡔천학문답󰡕을 저술하였다.
㈐ 신부가 되어 충청도 당진(솔뫼)을 근거로 포교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      ㈏       ㈐
① 이가환 안정복 황사영
② 이승훈 이기경 황사영
③ 이승훈 안정복 김대건
④ 이가환 이기경 김대건


정답: ③

해설:
(가) - 이승훈은 스승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갔다가 서양인 신부의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우리나라 최초의 세례교인)

(나) - 안정복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비판한 '천학문답'을 저술하였다.

(다) -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은 충청도 당진을 근거로 포교하다가 붙잡혀 순교하였다.(관련 박해: 1846년 병오박해)



정답 : ③

③ (가) 이승훈은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이벽을 만나 천주교도가 되었다. 1784년 사신단의 일행인 아버지를 따라 서장관으로 청에 가서 북천주당 예수회의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서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나) 안정복에 대한 내용이다. 『천학문답』은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이 쓴 천주교에 대한 비판서이다. 안정복은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당시의 남인 소장 학자들이 유교적 정학(正學)을 하였으면서도 사학(邪學)인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를 가까이하여 사교(邪敎)에 빠져 들어감을 안타까이 여겨, 그들의 미혹을 깨우치고자 『천학고(天學考)』와 함께 이 책을 편술한다고 하였다.

(다) 김대건 신부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조선교회가 멀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던 김대건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헌종 11년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후 충청남도 당진(솔뫼)를 근거로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이처럼 김대건은 교회재건에 헌신하다가 다음해 성직자 영입을 위한 해상루트 개척차 서해에 나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13. 근대의 구국 계몽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① 송수만, 심상진은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일본의 황무지 개척에 반발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철회시켰다.

② 이종일은 순한글로 간행한 황성신문을 발간하여 정치논설보다 일반 대중을 위한 사회계몽 기사를 많이 실었다.

③ 최남선은 을지문덕, 강감찬, 최영, 이순신 등의 애국 명장에 관한 전기를 써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④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친서를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의 대한매일신보를 통하여 발표하였다.


정답: ④

해설:

오답확인
① - 송수만, 심상진 등은 보안회를 조직하고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켰다.

② - 이종일은 순 한글로 제국신문을 간행하여 일반 대중을 위한 사회 계몽 기사를 많이 실었다.

③ - 신채호 등 역사학자들은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등 애국 명장들의 전기를 써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정답 : ④

④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초빙하여 1904년에 창간하였으며,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친서를 발표하였다.

① 송수만, 심상진 등이 일제의 황무지 개척에 반발하여 설립한 애국 계몽 단체는 보안회(1904)이다. 대한 자강회는 1906년 윤효정·장지연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정신이 계승된 단체였으나,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체되었다.

② 이종일이 창간한 신문은 황성신문이 아니라 제국신문(1898)이다. 제국신문은 순한글로 매일 4면을 발행했으며 한문을 익히지 못한 부녀자, 하층민을 독자층으로 삼았다. 또한 기사의 주요 내용은 한국의 문명개화 및 국권 수호와 관련된 계몽주의적, 민족주의적 성격의 것이었다.

③ 신채호에 대한 설명이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조선제일위인 이순신전’을 연재, 나중에 책으로 펴냈고, 을지문덕과 최영 등의 전기물을 썼다.



14. 대한제국의 성립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을미사변 이후 위축된 국가 주권을 지키고 고종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②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경운궁을 증축하였다.
③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 하고 경운궁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④ 대한제국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발표하였다.


정답: ③

해설:
오답확인 ③ - 고종은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정답 : ③

③ 1897년 아관파천을 마감한 고종은 원(환)구단에서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라 칭하여 대한제국이 자주 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① 을미사변 이후 더 이상 일본의 영향 아래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 고종은 1896년 2월 일제의 강압을 모면하고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 후 약 1년 만에 고종은 자주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의 우월적 지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1897. 2. 20).

② 경운궁은 조선 전기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거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광해군이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기간 동안 경운궁을 수리하도록 지시를 내리면서 명성황후의 빈전을 경운궁 별전으로 옮기고, 경복궁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선왕의 어진을 경운궁 별당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후 1897년 2월에는 경운궁 공사를 속히 준공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④ 대한제국은 전제 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헌법으로 대한국 국제를 반포(1899. 8)하였다. 대한국 국제를 통해 국가의 모든 권한(통수권·입법권·행정권·사법권·외교권)이 황제에게 집중되었으며, 군주의 전제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15. 일본이 대한제국의 정부 기관에 자신들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게 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주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조약은?
① 1904년 2월 한·일 의정서
②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한 ․ 일 협정서)
③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④ 1907년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


정답: ②

해설:
② - 일본은 1904년 제 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체결하여 재정고문으로 메카타(화폐정리사업 주도)와 외교 고문으로 스티븐슨을 파견하였다.



정답 : ②

‘고문 정치’에 대한 내용으로 이에 해당하는 조약을 찾는 문제이다.

② 일제는 한국의 재정 및 외교 정책 쇄신을 위한 외국 고문의 초빙에 대한 협정 체결을 한국 정부에 강요하여 1904년 8월 22일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외교 고문으로 친일 미국인 언론가 스티븐스가 초빙되었다(일본의 외교권·재정권 장악). 한편, 일본은 2명의 고문 용빙 이후, 하등의 근거도 없이 자진 초청의 형식을 빌려 군부, 내부, 학부, 궁내부 등 각 부에도 모두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① 1904년 2월 한·일 의정서 체결로 인해 일본은 군사 전략상 필요한 곳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한 제국은 일본의 승인없이 제3국과 의정서에 반하는 조약을 체결할 수 없게 되었다.

③ 러일전쟁 승리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사실상 대한 제국은 일본의 보호국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05년 11월 외부대신 박제순의 이름으로 한 ·일 협상 조약(韓日協商條約 = 제2차 한·일 협약),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④ 일제는 헤이그 밀사를 명분으로 1907년 7월 21일 고종을 강제 퇴위하고 이어 7월 24일 이완용과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통감의 권한이 확대되고 차관 정치(次官政治)가 실시되었다.



16. 다음 약력에 해당하는 인물은?
∙ 1872년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
∙ 1884년 갑신정변에 참여함. 실패 후 일본 망명
∙ 1894년 내무대신에 임명됨. 다음해 일본 망명
∙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본의 작위를 받고 동아일보사 초대사장, 중추원의장 ․ 부의장, 일본 귀족원 의원 등 역임
① 박영효
② 윤치호
③ 김옥균
④ 김홍집


정답: ①

해설: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영혜옹주와 결혼)였으며,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1894년 귀국하여 제 2차 갑오개혁을 주도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일본의 작위를 받는 등 각종 친일 행위를 하였다.



정답 : ①

제시된 약력에 해당하는 인물은 박영효이다.

① 박영효(1861~1939)는 1872년 철종의 딸인 영혜 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며 형인 박영교를 통해 김옥균을 알게 되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의 사후 수습을 위해 특명 전권 대신 겸 3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 일본 정계의 지도자 및 서양 외교 사절들과 접촉하였다.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한성 판윤 재직시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인 박문국을 설립하여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민씨 정권의 견제를 받아 광주 유수로 물러났으나 오히려 이곳에서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고 이 중 일부가 잡신정변에 동원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지만,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박영효는 갑신정변의 주동자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이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하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고종 폐위 음모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다시 사면되었으며, 한일병합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 귀족원 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 행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② 윤치호(1865~1945)는 1881년(고종 18) 17살의 최연소자로 신사유람단에 끼어 일본에 다녀온 후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뒤에 미국에 유학하고, 1883년 조미수호조약 비준 때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했다. 1896년에는 서재필·이상재·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1898년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겸임했다. 1906년에는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으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 말기에 귀족원 의원을 지내다가 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개성(開城)자택에서 자결했다.

③ 김옥균(1851~1894)은 조선 후기 정치가이며 급진 개혁파로서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총국 낙성연을 계기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10년간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④ 김홍집(1842~1896)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 때 청나라 황쭌셴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와 보수 유생 등 위정척사파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온건 개화파로 외교 수완이 뛰어났으나, 단발령을 강행하여 민중들에게 임금과 태자의 머리를 강제로 깍은 자로 여겨져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1896년에 아관 파천 직후 친일파로 몰려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라는 일본군의 권고를 뿌리치고 군중들에게 붙잡혀 맞아 죽었다.



17.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 보 기 >
ㄱ.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설치
ㄴ. 농지 개혁법 시행
ㄷ. 안두희의 김구 암살
ㄹ. 제주 4 ․ 3 사건 발생
ㅁ. 여수 ․ 순천 10 ․ 19 사건 발생
① ㄱ, ㄴ, ㅁ
② ㄱ, ㄴ, ㄷ, ㅁ
③ ㄱ, ㄴ, ㄹ, ㅁ
④ ㄱ, ㄴ, ㄷ, ㄹ, ㅁ


정답: ②

해설:

오답확인
ㄹ - 제주도 4. 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8. 15) 이전 발생하였다.

지문확인
ㄱ - 1948년 9월 반민법이 통과된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1948.10)
ㄴ - 농지개혁법은 1949년 6월 법제화되었고, 1950년 초부터 시행되었다.
ㄷ - 1949년 6월 육군 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하였다.
ㅁ -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사건(10. 19 사건)이 발생하였다.



12. 정답 : ②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이다. 따라서 이 시기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고르는 문제이다.

ㄱ.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고조되어 1948년 8월 16일 헌법 제 101조에 의거,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특별 위원회(반민기초특위)가 구성되고, 9월 22일 제헌 국회에서는 친일파를 처벌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겠다는 취지에서 법률 제3호 반민족 행위 처벌법(약칭 : 반민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이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 1948. 10. 23)가 설치되고, 본격적 활동을 개시하였다.

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여론의 압력과 좌익의 사회 운동 및 북한의 토지 개혁 등의 영향을 받아 더 이상 토지 개혁을 지체할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농지 개혁안’을 만들어 국회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지주 출신이 많았던 국회에서 견제를 받다가 1949년 6월에 이르러서야 ‘농지 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제정되었고, 1950년 3월에 시행령이 공포되었다.

ㄷ.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에 암살당하였다.

ㅁ. 여수․순천 10․19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8년 10월 19일의 사실이다.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으나 군부대 내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며 여수·순천 일대를 점령하였다.

ㄹ. 제주 4․3사건의 발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1948년 4월 3일의 사실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28돌 기념 집회에서 경찰이 집회에 참석한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6명의 희생자를 내는 등, 공권력에 의한 폭력 진압으로 비롯되었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민과 미군정 및 우파 간의 갈등이 매우 심화되었다. 경찰과 서북 청년단(극우 단체)이 제주도민을 탄압하자, 좌익 세력의 주동으로 1948년 4월 3일 제주도민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들은 ‘좌파에 대한 폭력적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민족 통일!’, ‘미군정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봉기에 가담하였고 미군정은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발포로 이를 진압하였다.



18. 1950년대 정치와 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이승만 정권은 1951년 국민회, 대한청년당, 노동총연맹,농민총연맹, 대한부인회 등 우익단체를 토대로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② 이승만 정권은 신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고 반공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하였다.

③ 미국의 원조로 소비재 공업이 성장하였고 밀가루, 설탕, 면화 산업 등 삼백산업이 중심을 이루었다.

④ 이승만 정권은 1954년 의회에서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사사오입의 논리로 통과시켰다.


정답: ④

해설:

오답확인
④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952년 발췌개헌안에 해당되며,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서는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 것이 핵심 내용이다.




정답 : ④

④ 1954년 의회에서 통과된 개헌안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아니라 3선 금지 조항 폐지와 관련된 개헌안이다.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3선 금지 조항 폐지)을 골자로 한,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1954).

① 자유당은 1951년 12월 창당된 정당으로 이승만이 집권을 계속하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들 필요성에서 결성했다. 임시 수도 부산에서 1951년 12월 23일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 (원내)자유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에 의한 (원외)자유당이 각기 같은 날 발당식을 가지며 탄생하였다. (원외) 자유당에는 국민회,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대한청년단, 대한농총 등이 참여했으나, 주도세력은 미군의 지원을 받았던 이범석의 민족청년단계(족청계)였다. 또한 (원외) 자유당은 관권을 업고 조직을 확대한 관제정당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될 대까지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오로지 이승만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승만을 유일 절대 지도자로 떠받드는 정당이라는 점에서 일반 정당과 차이가 있었다.

② 이승만과 자유당은 대공 사찰 강화와 언론 통제를 골자로 한 신국가 보안법(1958. 12. 24)과 지방 자치제 개정안을 경찰을 동원하여 야당 의원을 국회 지하실에 감금시키고 통과시켰다. 이어 개정된 보안법을 통해 경향신문을 폐간하였다(1959. 4. 30). 한편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15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선거전위대로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과 박정호 등을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하였다(1959. 7. 30, 진보당 사건)

③ 1950년대 원조 경제의 상황이다.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로 삼백 산업[밀가루(제분)·설탕(제당)·면직물(면방직 공업)]이 성장하였다.



19. 다음 자료와 관련된 사업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만약 지주가 정해진 기한 내에 조사국 혹은 조사국 출장소원에게 신고 제출을 게을리 하거나 신고를 제출하지 아니하는 때는 당국에서 이 토지에 대해 지주의 소유권 유무 등을 심사하여 만약 소유자로 인정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 토지를 지주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당연히 국유지로 편입하는 수단을 집행할 것이니, 일반 토지 소유자는 고시에 의한 신고 제출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하였더라.
- 「매일신보」-
① 소유권 분쟁을 인정하지 않아 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② 명의상의 주인을 내세우기 어려운 동중 ․ 문중 토지의 상당부분이 조선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③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직후 신속하게 사업이 시작되었다.
④ 사업의 결과 조선 총독부의 재정 수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정답: ①

해설:
제시된 사료에서 “토지를 기한을 정해 신고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업”은 토지조사사업임을 알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1912-1918)은 일제가 근대적 토지 소유권의 확립을 명목으로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1910)하고, 토지조사령을 공포하면서 시작되었다.(1912) 그러나 실제로는 토지 수탈을 통한 지세의 안정적 확보가 토지 조사 사업의 근본적 목적이었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명의상 주인을 내세우기 어려운 동중, 문중 토지의 상당 부분이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오답확인
① - 토지조사사업 당시 소유권 분쟁은 3만 3937건에 달했다. 따라서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틀린 내용이다.



정답 : ①

제시된 자료와 관련된 사업은 토지 조사 사업이다.

①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면서 내세운 목적은 지세 부담의 공평, 지적의 확정과 소유권의 보호, 토지 개량과 이용의 자유 보장, 생산력의 증진 등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과정에서 토지소유권의 확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은 한국인 사이의 토지소유권 다툼이나 경계 분쟁이 아니었다.
오히려 분쟁의 대부분은 민유지 대 국유지이거나 일본인 대 한국인 사이의 경계 다툼 등이었다.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3만 3천여 건의 분쟁 중에서 일제의 관권에 의해 화해·조정이 이루어진 것은 1만 2천여 건이 있었다. 따라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서술은 옳지 않다.

② 토지 조사 사업에서 기한 내 미신고 토지는 물론이고, 신고하였다고 하더라도 문중이나 마을의 소유지처럼 소유자가 불분명한 토지·공공 기관이 소유한 토지·산림·초원·황무지 등이 모두 총독부에 의해서 몰수되었다.

③ 국권 피탈 이후 일제는 식민지 경제 체제를 완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일제는 총독부 산하에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1910)하고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였고(1912) 이후 1918년까지 이루어졌다.

④ 토지 조사 사업 시행으로 총독부는 지세 부과 대상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식민지 통치를 위한 재정 수입을 강화할 수 있었다. 과세지는 10년 사이에 52%나 늘어났으며, 총독부의 지세 수입도 2배로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20. 다음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 김영삼 신민당 당수 국회 제명
㈏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 유신 헌법의 국민투표 통과
㈑ 국민교육헌장 제정
㈒ 7 ․ 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① ㈑ - ㈒ - ㈐ - ㈎ - ㈏
② ㈑ - ㈒ - ㈐ - ㈏ - ㈎
③ ㈒ - ㈐ - ㈑ - ㈎ - ㈏
④ ㈒ - ㈐ - ㈑ - ㈏ - ㈎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사건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
- ㈒: 1972년 7월 4일. 7. 4 남북공동성명 발표
- ㈐ : 유신헌법은 1972년 10월 17일 제정되었고, 동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 ㈏ :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 ㈎: 1979년 YH 사건 이후, 반 유신운동을 추진했던 김영삼이 국회에서 제명당했다.(1979년 10월)



정답 : ②

(라)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은 1968년의 사실이다.

(마)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3원칙을 천명한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는 1972년 7월 4일의 사실이다.

(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이후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나) 김대중 납치 사건은 1973년 8월 8일의 사실이다. 신변상의 이유로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유신 헌법의 공포 이후 귀국을 포기하고 재미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반유신 활동에 앞장섰다. 이후 김대중은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렌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당하여 한국으로 연행되었다가 129시간 만인 8월 13일에 서울 자택에서 풀려났다.

(가) 1979년 8월 국내 최고 수준의 가발 수출 업체인 YH 무역의 폐업 조치에 항의하여 여성 노동자들이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YH 무역 사건).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농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상도동 자택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농성 노동자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신민당의 무기한 농성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인 부⋅마 항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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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4 4 3
문제 6 문제 7 문제 8 문제 9 문제 10
1 2 3 4 1
문제 11 문제 12 문제 13 문제 14 문제 15
1 3 4 3 2
문제 16 문제 17 문제 18 문제 19 문제 20
1 2 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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